계양산성(桂陽山城 사적 556호)은 인천의 고대문화를 상징하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둘레 1,180m · 면적은 62,863㎡에 달한다
고대 산성으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성곽이 계양산 정상 동쪽의 낮은 봉우리 주위에 축조되어 있어 「사모봉(紗帽峰)」형 산성으로 분류된다
성벽은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성벽이 잘 남아 있는 곳은 그 높이가 7m에 이른다
산성의 모습은 동남에서 서북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긴 타원형에 가깝다
삼국시대 계양산성은 한강 하류를 제어하는 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때문에 계양지역을 점유한 백제가 처음 계양산성을 쌓고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삼국의 각축과정에서 한강유역을 차지한 고구려 · 신라가 차례로 계양산성을 활용하였는데 고려 말까지도 활발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성이 폐지되고 일제강점기에는 공동묘지로 이용되면서 성은 황폐해지고 말았다
계양구는 유적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2003년부터 발굴조사와 1,000여 기의 분묘 이전 · 사유지 매입 · 성곽 보수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 결과, 계양산성의 뛰어난 역사적 · 성곽사적 가치가 확인되어 2020년 5월 22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계양산성박물관
계양산성실(2전시실)
계양산성에서 10차에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계양산성의 유적과 출토 유물을 다루고 있다
계양산성에 대한 역사 기록 · 발굴조사 성과 · 유적의 분포현황 · 삼국시대 목간 등 발굴 유물 · 계양산성 축소 모형 등
다양한 전시 자료를 통해 계양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체감할 수 있는 전시공간이다
둥근바닥항아리 · 주부토(主夫吐) 명문기와 · 논어의 글귀가 남아 있는 목간 · 성문을 고정시켰던 부재와 대형 기와
각종 토기와 철제무기 등 전시된 계양산성 출토 유물을 살펴보며 이 성을 쌓고 활용했던 선조들의 숨결을 생생히 느껴볼 수 있다
계양산성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산성이다
계양산(395m) 정상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여 인근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낮은 봉우리와 계곡부를 감싸고 있는 사모봉형 성곽이다
성벽의 둘레는 1,184m이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7m 이상으로 삼국시대의 성곽 중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삼국시대에 쌓아 지속적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전기에 이미 폐허가 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1997년 이후 학술조사 및 발굴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계양산성의 전모가 서서히 확인되고 있다
계양산성의 입지
인천지역은 간척사업으로 많은 지형 변화를 겪었으며, 계양산 일대의 지형도 마찬가지이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의 「계양망해지(桂陽望海誌)」에는 계양지역이 "한 면만 육지에 통하고 삼면은 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지형도에서도 계양산이 해안가와 불과 5km 가량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형 조건 때문에 인근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계양산은 한강 하류에서 서울로 진출하는 길목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여기에 축조된 계양산성은 한강 하류의 넓은 세력권을 지키는 전략적 거점 산성으로 활용되었다
계양산성의 역사기록
계양산성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기록은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돌로 쌓았고 둘레가 1,937척인데 모두 무너졌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이후의 기록들은 대부분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17세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지》와
대한제국기의 기록인 《중고문헌비고》에는 "삼국시대에 쌓았다"고 성의 연혁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문헌기록들을 통해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나, 16세기 이전에 이미 폐지되어 그 터만 남겨졌음을 알 수 있다
계양산성
계양산성 주변의 산성들
계양산성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계양산고성(桂陽山古城) / 돌로 쌓았고 둘레가 1,937척이다.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동국여지지(1656년) 계양산고성(桂陽山古城) / 돌로 쌓았고 둘레가 1,937척이다. 삼국시대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대동지지(1862~1866년) 고성(古城) / 안남산(安南山)의 동남쪽인데, 둘레가 1,937척이다
증보문헌비고(1908년) 부평 계양산성 / 삼국시대에 설치한 것으로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937척이다. 지금은 폐성(廢城)이다
계양산과 산성 옛 지도
해동지도 · 지승 · 광여도 · 대동여지도가 있다
계양산성 1~3차 발굴조사
계양산성 4차 발굴조사 / 4차 발굴조사 전경
4차 발굴조사 / 출토유물(수막새)
계양산성 5 · 6차 시 · 발굴조사
5 · 6차 시 · 발굴조사 / 5 · 7호 건물지
5 · 6차 시 · 발굴조사 / 8호 건물지
5 · 6차 시 · 발굴조사 / 출토유물(토기류)
5 · 6차 시 · 발굴조사 / 출토유물(철기류) 금속유물 자물쇠 · 재갈 · 문고리
계양산성에서 출토된 금속 유물은 신라~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동곳 등의 장신구 · 삽날 등의 농공구류 · 솥 등 조리기구 · 쇠못 등 건축재료 · 철촉 등 무기류 등이 있다
이 중 북문 자리 부근에서 출토된 자물쇠는 대형 사찰이나 지방행정 거점에서 주로 출토되는 유물로 계양산성의 높은 위상을 지녔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또한 철을 생산할 때 사용하는 집게와 제철 부산물 등이 출토되어 성 내부에서도 철기를 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7차 시 · 발굴조사 / 치성2
7차 시 · 발굴조사 / 출토유물(토기류 및 명문기와)
8차 발굴조사 / 1지점 건물지
8차 발굴조사 / 2지점 집수시설
8차 발굴조사 / 출토유물(토기류와 수키와)
9차 시 · 발굴조사 / 집수시설 및 축대시설(동→서)
9차 시 · 발굴조사 / 출토유물(토기류)
계양산성 발굴조사
1997년 인천광역시가 계양산성의 복원 · 정비를 위한 지표조사를 처음 실시한 이후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에 의해 1~3차 발굴조사 · (재)겨레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4~10차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1~3차 발굴조사에서는 동벽 및 서벽 일부와 제1 · 3차 발굴조사에서는 동벽 및 서벽 일부와
제1 · 3 집수정을 조사하여 성벽의 축조 방식과 규모 등을 확인하였다
또한 집수정 내부에서 「논어」 목간을 비롯하여 연화문 막새 등의 기와류 · 거북 등 다양한 유기물이 출토되었다
4~10차 발굴조사에서는 북벽 일대의 성벽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북문지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 · 건물지와 집수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통일신라 말~고려 초의 토기와 기와류가 대부분이다
성벽
계양산성은 계양산 주봉 동쪽의 작은 봉우리와 계곡부를 에워싸는 형태로 축조된 사모봉형의 성곽이다
성벽 단면은 사다리꼴이며 안팎을 돌로 쌓았다
남아 있는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7m 정도로 매우 높고 경사도 가파르다
성돌은 계양산 인근에서 채취한 응회암을 주로 사용했는데, 화강암과 편마암 · 규장암도 일부 사용되었다
일정한 크기로 네모나게 가공하여 바른층 쌓기를 했는데, 바닥 쪽의 성벽을 보강하기 위해 곳곳에 보축 성벽을 쌓았다
'主夫+夫□大' 명 암키와 · 명문기와편(銘文瓦)
계양산성 전경
계양산성 서벽구간 외벽 석축
계양산성 서벽구간 내부 협축
계양산성 집수시설
집수시설은 생활용수 확보 및 빗물이 스며들어 성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모아놓는 시설이다
집수시설의 형태는 원형 · 타원형, 방형 · 장방형 등 다양하다
계양산성에서는 동문지 부근에서 3기 · 북문지 부근에서 1기 등 모두 4기의 집수시설이 확인되었다
성문 근처에 집수시설이 있는 이유는 불을 이용한 적의 공격 등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동문지 부근의 낮은 곳에 위치한 3기의 집수시설 가운데 원형인 제1집수정과 네모난 제3집수정이 조사되었는데
내부에서 목간과 둥근바닥항아리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가락바퀴 · 그물추 · 굽다리접시
거북등껍질 · 둥근바닥항아리
논어 목간(木簡)
목간은 좁고 기다란 모양의 깎은 나무 조각을 엮어 만든 것으로, 종이가 보급되기 이전에 종이 역할을 한 것이다
제1집수정 바닥에서 먹으로 기록한 다각형의 나무토막 형태인 「고(觚)」 2점이 출토되었다
5면의 목간에는 「논어(論語)」 제5편 「공야장(公冶長)」의 일부가 쓰여져 있다
목간의 연대에 대해 탄소연대 측정을 통해 5세기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했는데, 7세기 신라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목간의 내용을 통해 당시 사회에서 유교사상이 널리 퍼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목간(木簡)
목간 1면 제2장 (子謂子)賤君子(哉若)人(魯無君者斯焉取斯)
공자가 자천에게 말하기를 "그 같은 사람 참으로 군자다. 만일 노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그가 어떻게 그런 학덕을 터득하였겠는가?" 하고 되물었다
*
목간 2면 제5장 (子使漆雕開仕對日)吾斯之未能信子說
공자가 칠조개(漆彫開)에게 벼슬을 주려자 하자 칠조개가 말하기를 “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만한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공자가 크게 기뻐하였다
계양산성에서 발굴된 목간(木簡)
명문(銘文) 기와
계양산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문자가 새겨진 명문(銘文)기와는 당시의 연대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기와의 새겨진 글자 중 가장 많은 것은 과거 계양지역의 지명인 「주부토(主夫吐)와 관련된 것이다
이는 문헌 기록상의 위치와 계양 지역이 일치함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와 함께 북문지 부근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기호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건물지와 북쪽 치성에서도 「월(月)」 · 「관(官)」 · 「초(草)」 · 「범초고(凡草)」 · 「사(寺)」 등의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확인되었다
명문(銘文) 기와
기와의 새겨진 글자 중 가장 많은 것은 과거 계양지역의 지명인 「주부토(主夫吐)」와 관련된 것이다
고구려계 유물과 중국자기
계양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 신라~통일신라시대의 것이다
다만, 고구려계 유물로 추정할 수 있는 토기 및 기와가 소량 출토되어
계양 지역이 고구려의 「주부토군(主夫吐郡)」이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표면에 흑색을 입히고 좌우로 문질러 격자문 효과를 낸 토기는 제작기법으로 보아 고구려의 암문토기로 추정된다
또한 고구려의 기와제작 방식과 유사하게 제작된 붉은 색의 기와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중국 청자편
북문지 부근과 건물지 등에서 당나라 하북성의 형요, 정요 일대에서 제작된 백자와 절강성의 월주요 청자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수입 자기는 도읍의 건물지나 지방의 대형 사찰 등에서 주로 출토되는 것으로
이를 사용할 만큼 지체 높은 인물이 계양산성에 거주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금속유물
계양산성에서 출토된 금속 유물은 신라~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동곳 등의 장신구 · 삽날 등의 농공구류 · 솥 등 조리기구 · 쇠못 등 건축재료 · 철촉 등 무기류 등이 있다
이 중 북문 자리 부근에서 출토된 자물쇠는 대형 사찰이나 지방행정 거점에서 주로 출토되는 유물로 계양산성의 높은 위상을 지녔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또한 철을 생산할 때 사용하는 집게와 제철 부산물 등이 출토되어 성 내부에서도 철기를 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속유물 / 자물쇠 · 재갈 · 문고리
건물지
계양산성의 건물지는 모두 10동이 조사되었다
5호 건물지는 'ㅁ' 형태의 기단 안쪽 전면에 돌을 채웠는데, 비교적 규모가 큰 창고 시설로 보인다
8호 건물지는 담장을 갖춘 정면 4칸 · 측면 3칸의 건물로, 북문측 성벽과 인접한 것으로 보아 병사가 주둔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북쪽 치성의 남쪽에서 조사된 건물지는 정면 길이가 23.7m에 달하는 대벽 건물로, 40~50cm 내외의 잘 다듬어진 석재로 쌓은 기단이 있다
출토된 기와 · 토기 등의 유물로 보아 이 건물들이 사용되었던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보인다
암키와 · 수키와
성문과 치성
계양산성 동 · 서 · 북방에 세 성문이 있었는데 이 중 북문 자리만 확인되었다
북문은 성벽 가운데 문을 낸 현문식(懸門式)으로, 신라시대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성문 안쪽으로 길게 길을 낸 뒤 'ㄱ'자 형태로 꺾고 양 측면에 3열의 초석을 놓았다
이는 왜성(倭城)의 축성기법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하면서 수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치성(雉城)은 성벽으로 접근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시설이다
계양산성의 치성은 총 9개로 추정되며 성벽이 능선을 지나는 구간에 설치되었다
네모난 형태를 띠며 외부는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워졌다
성돌을 다듬은 상태와 성벽의 짜임새가 달라, 성벽이 축조되고 난 후 치성이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유물은 통일신라~고려 전기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문확석(門確石)
계양산성 지도가 바닥에 그려져 있다
계양산성 지도
계양산성의 비밀
계양산성 발굴조사를 통해 성곽과 직접 관련이 있는 성벽과 문지 · 치성 이외에도
성 내부의 건물지 · 집수시설 · 구들 등 여러 성격의 유구와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통해 계양산성과 인천지역의 역사를 규명할 중요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향후 진행될 조사는 앞선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단순히 확인된 유구에 대한 부분적인 조사가 아닌 정비복원사업과 연계하여 진행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는 계양산성의 본 모습을 되살려내고 삼국시대 인천의 역사를 보다 뚜렸하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대벽건물지 출토 기와
계양산성 8차 발굴조사에서 가로 24.1m · 세로 10.6m 규모의 통일신라시대 「대벽건물지」가 확인되었다
판축기법으로 흙을 다져 두께가 1.7m에 달하는 벽체를 쌓은 건물로, 계양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된 것이 극히 일부에 불과할 정도로 발굴조사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대형 기와가 출토되어 건물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계양산성 초기의 모습
성곽으로서의 기능이 폐지된 16세기 이후 계양산성의 모습을 자세히 전하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남아 있는 몇몇 근대자료를 통해 100여 년 전 이미 크게 훼손되기 시작한 계양산성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계양산성 근대지형 1/50,000 / 1911년 국립중앙박물관(복제)
계양산성 근대지형 1/50,000 /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복제)
계양산 일대 조사서 · 계양산사적도(桂陽山史蹟圖) / 일제강점기
계양산성 실측도 / 일제강점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복제)
정비계획
계양산성은 조선전기 이후 성을 쓰지않고 오랜 기간 방치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에 산성 안에서 공동묘지가 조성되었으며, 동남쪽 치성이 있었던 곳은 헬기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전체 둘레가 원래 1,184m였던 계양산성의 성벽은 약 300m 구간만 남았고, 남은 성곽 높이도 원래 절반인 3~4m에 불과하다
인천을 대표하는 고대 산성인 계양산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계양구는 묘지 등 산성을 훼손하는 시설물들을 이전 · 철거하였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을 3D스캐닝 기법으로 정밀 측정하여 성곽의 복원 및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계양산성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을 추진함으로써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는 한편
보다 체계적인 보존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계양산성 모형
계양산성 안내도
약속의 성벽
계양산성 발굴조사 동영상이다
계양산성 북측 구간의 치성과 성벽
계양산성박물관
치성과 성벽의 형태를 표현한 박물관과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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