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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감고당

감고당(感古堂)은 조선 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 속에서 물러났다가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살았다

명성황후(1851~1895)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고종 3) 왕비로 간택 · 책봉되기 전까지 머물렀다

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이란 편액을 하사한 후부터다

원래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던 여주시가 현재 위치로 이전 · 건축했다

여러 차례 수리하고 이전하면서 감고당의 본래 모습이 변형됐지만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구조 형태를 보여준다

 

 

감고당(感古堂)

감고당 솟을대문과 행랑채이다

 

 

 

 

감고당 행랑채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신분이 가장 낮은 하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나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조선시대 상류 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 연령별로 공간을 분리했고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지는 가족생활을 고려해 공간을 배치했다

 

 

 

 

감고당 방 영조 어필(感古堂 倣 英祖御筆) 편액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感古堂)」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

서예가 전기중 작가가 영조의 글씨체로 휘호했다

영조가 직접 감고당의 편액을 휘호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분명하기에

영조의 글씨인 「사조어제무안왕묘비(四朝御製武安王廟碑)」를 참조하여 수백 번 임서한 후에 글씨를 썼다

 

 

 

 

감고당 안내판 · 준공표시판

 

 

 

 

사랑채

사랑채는 남자 주인과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행랑채와 중문채 사이에 자리하고 대청 · 사랑방 · 누마루로 구성됐다

사랑채는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자녀들에게 학문을 교육하는 장소였다

또한 사대부 남자들이 사랑채에 모여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고, 거문고 등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했던 장소다

이렇듯 유학을 장려하고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 문화가 발달했다

 

 

 

 

사랑채

 

 

 

 

황후의 서재

사랑채 편액이다

 

 

 

 

지재곤도순(至哉坤道順)

지극하도다! 왕비의 법도가 잘 이루어졌구나!

사랑채 주련이다

*

사랑채 주련의 글은 장지연이 쓴 「명성황후국장만장」을 참고했다

감고당은 비록 개인의 집이지만 어필 편액이 걸려있었고 인현왕후와 명성황후의 정환과 애환이 서린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에 서예가 전기중 작가는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당나라 시대의 안진경 서체를 바탕으로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간결한 서체를 섞어 오랜 시간을 연습한 후 휘호했다

 

 

 

 

사랑채 주련

 

 

 

 

행랑채

 

 

 

 

솟을대문

안에서 봤다

 

 

 

 

행랑채

솟을대문 왼쪽이다

 

 

 

 

중문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위치한 중문채는 청지기 등이 거처했던 곳이다

또한 쌀 · 김치 · 장작 등을 보관하는 공간으로도 활용했다

안채의 부속건물로 안채와 사랑채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여성의 거주공간인 안채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기능을 한다

 

 

 

 

중문채

안에서 봤다

 

 

 

 

중문채

물레를 돌리는 여인상이 있다

 

 

 

 

안채

안채는 몸채 · 내당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안방 · 대청 · 건너방 · 윗방 · 다락 · 부엌 등으로 구성된다

집안의 주인 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있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 실내공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에 있으며 출산과 임종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있는데 이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제한하던 조선시대 사회상을 반영하는 공간배치라고 볼 수 있다

 

 

 

 

안채 주련

 

 

 

 

안채 주련

사랑채 주련의 글은 장지연이 쓴 「명성황후국장만장」을 참고했다

감고당은 비록 개인의 집이지만 어필 편액이 걸려있었고 인현왕후와 명성황후의 정환과 애환이 서린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에 서예가 전기중 작가는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당나라 시대의 안진경 서체를 바탕으로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간결한 서체를 섞어 오랜 시간을 연습한 후 휘호했다

 

 

 

 

부엌

 

 

 

 

안채 뒷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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