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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명성황후 생가유적지 기념관

명성황후 생가유적지 기념관은 명성황후 친필 · 고종 황제의 편액 등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조선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여덟 살 때까지 살 던 생가 옆에 있다

 

 

명성황후기념관

 

 

 

 

명성황후 · 고종황제

 

 

 

 

명성황후기념관 특별전시실 / 글씨보고 밤에 잘 잔일 든든하여 전

명성황후는 우리에게 친숙한 역사 속 인물이다

시대의 격변기를 겪은 일생과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명성황후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이 전해지는 자료는 많지 않다

근대의 인물임에도 실제 모습이 담긴 어진이나 사진은 전해지지 않으며, 당시 주변인이 묘사한 모습만이 전해질 따름이다

이러한 명성황후를 가장 가까이, 그리고 정확하게 만날 수 있는 자료는 그녀가 남긴 한글편지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전시가 시작되었다

 

 

 

 

명성황후간찰첩(明成皇后簡札帖) / 여주박물관 소장 · 19세기 · 복제품

명성황후는 한글편지를 통해 자신의 안부를 나누며 여러 질병과 아픔에 시달리는 괴로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성황후의 모습은 급변하는 시대에 맞선 강인한 여성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한글편지 속 명성황후는

담체(담이 뭉쳐서 생긴 병) · 소화불량 · 불면증 · 두통 등에 시달리는 병약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명성황후 한글편지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19세기 · 복제품

명성황후의 한글편지는 고종과 동궁의 안부를 전하며 시작한다

어지러운 시기를 보내는 왕실의 구성원으로서 왕과 동궁의 안위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편지마다 빼놓지 않고 고종과 동궁의 안부를 전하는 것은 부인이자 어머니로서 남편과 아들에 대한 끊이지 않는 걱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한글 편지에 담긴 조선의 모습 / 병을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 · 임술년에 자부가 시어머니에게 편지

한글이 창제된 15세기 이후에도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 문자는 한자였다

양반으로 대표되는 지식인의 문자였던 한자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오랜 교육기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에 비해 한글은 배우기 쉽고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교육 기회가 적었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문자였다

조선시대에서 한글이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분야는 편지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편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소소한 일상과 다양한 소식을 주고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편지에는 다른 문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개인의 독특한 말투와 습관 · 생활의 언어 · 의식주와 관련된 일상용어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병을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 /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 20세기~광복 이전 · 복제품

황구를 여러 마리 구해서 진하게 고아 먹으려고 하니 기를 보하기에 제일인 듯하다

너무 걱정 말아라. 원기가 충실하면 담체는 저절로 사라지고 다른 증세도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임술년에 자부가 시어머니에게 편지 /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 20세기~광복 이전 · 복제품

어머니께 문안 드립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안녕하시길 바라오며 보내신 편지를 받고 문안 편지를 올리며(소식을)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내 몸과 마음이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임술 십이월 십칠일에 며느리가 사뢰어 올립니다

 

 

 

 

어머니의 귀한 외동딸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19세기 · 복제품

명성황후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명성황후는 4명의 남매가 있었지만 명성황후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하여 외동딸로 성장했으며, 9세 때는 아버지 민치록마저 사망했다

가장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없이 외롭게 자란 명성황후에게 어머니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안부를 살뜰히 챙기며 지난 밤에 뵙지 못해 서운한 마음을 털어 놓는 한글편지를 통해

한 나라의 황후이기 전에 어머니의 귀한 딸로서의 명성황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정조어필 한글편지첩 /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 18세기 · 복제품

숙모님께(叔母主前)

서릿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숙모님을) 뵌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드리웠는데 어제 편지 보니 든든하고 반갑습니다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니 기쁘옵니다

원손(元孫)

 

 

 

 

명성황후간찰첩(明成皇后簡札帖) / 여주박물관 소장 · 19세기 · 복제품

「명성황후간찰첩」은 명성황후의 친필 한글편지 16점을 모은 서첩이다

본 간찰첩은 2008년, 여주군 향토사료관 유물 확충을 위해 여주군이 구입한 유물로서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인 민영소에게 보낸 한글편지가 담겨 있다

명성황후 한글편지에는 고종과 왕세자로 대표되는 왕실의 근황과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 담겨 있으며

어머니, 딸, 여성으로서 명성황후의 개인적인 모습과 내밀한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명성황후간찰첩(明成皇后簡札帖) / 여주박물관 소장 · 19세기 · 복제품

 

 

 

 

명성왕후 연표

1838년 영국 챠티스트운동부터 1910년까지의 연표다

 

 

 

 

명성왕후 연표

1851 (철종 2)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명성황후 출생

1859 명성황후 아버지 민치록(여성부원군)사망

1863 조선 제26대 고종 즉위 · 흥선대원군 집권

1866 명성황후 왕비 간택 · 1871 원자 출산(11월 8일 사망)

1873 공주 출산(9월 28일 사망) · 고종 친정 선포(대원군 실각)

1874 대군 출산 (조선 제27대 순종) · 어머니 한산이씨(한창부부인)사망

1882 왕세자 혼례(세자빈 민태호의 딸) · 명성황후 사망 발표 · 명성황후 환궁

1886 명성황후 이화학당 교명 하사

1888 명성황후 전속의로 미국인 여의사 홀튼 등용

1895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1897 명성황후 국장 거행 · 대한민국 수립 황제 즉위 (명성왕후에서 명성황후로 개칭)

 

 

 

 

고종황제 어첩 · 명성황후 어첩 / 명지대학교박물관 소장 · 영인본

고종 · 명성황후가 1885년 정월 보름날 이범진에게 내린 「천운」이란 당호(堂號)임

 

 

 

 

고종어첩 어첩 / 명지대학교박물관 소장 · 영인본

고종이 1885년 정월 보름날 이범진에게 내린 「천운」이란 당호(堂號)임

 

 

 

 

고종어첩 어첩 · 명성황후 어첩 / 명지대학교박물관 소장 · 영인본

명성황후가 1885년 정월 보름날 이범진에게 내린 「천운」이란 당호(堂號)임

 

 

 

 

순종어첩 / 명지대학교박물관 소장 · 영인본

순종이 12세 때 쓴 글씨

 

 

 

 

좁쌀이야기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

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 / 광무 8년 갑진 5월 어느날 손을 들어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경건히 쓰다

이 비가 1904년(광무 8)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부만 남아 있으며, 비각은 1970년에 새로 보수하였다

필자 미상이나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이며,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로 추측된다

 

 

 

 

명성황후의 여흥민씨 / 민유증 · 민치록 · 민승호 · 민영익 · 인현황후

민유증(閔維重 · 1630~ 1687)

숙종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이자 명성황후의 6대조이다

1650(효종 1)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딸이 숙종의 왕비가 되자 여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이어 돈녕부영사가 되었다

*

민치록(閔致祿 · 1799~ 1858)

민유증의 5대손이며 명성황후 아버지로써

1826년 장릉 참봉 · 제용감 주부 · 의금부 도사 · 사복시 주부 · 충훈부 도사를 거쳐 과천현감 · 임피현령 · 영천군수 관직을 맡았다

1858년(철종 9) 9월 17일, 명성황후가 7세 때에 사망하였다

*

민승호(閔升鎬 · 1830~ 1874)

민치구의 둘째 아들로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자 민치록의 양자가 되어 명성황후 오빠로 명성황후의 학문적 기초에 영향을 주었다

1873년 명성황후와 함께 흥선대원군을 축출하는데 앞장을 서고 1874년 11월 28일 대원군 측에서 보낸 폭발물에 의해 숨진다

*

민영익(閔泳翊 · 1860~1914)

민승호의 양자가 되어 명성황후의 집안으로 들어와 187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83년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오면서 선진문물을 익히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사망하였다

*

인현왕후(仁顕王后 · 1667~ 1701)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민유증이고, 명성황후의 5대 조모이며,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두 번째 왕후이다

 

 

 

 

대한황후계하(大韓皇后階下) · 대한황태자전하(大韓皇太子殿下) · 대한황제폐하(大韓皇帝陛下)

구한말 경성암전사진관에서 발행한 우편엽서로 왼쪽부터 순종비 순종효황후(윤비) · 영왕 · 순종이다

 

 

 

 

우편엽서

구한말 경성암전사진관에서 발행한 우편엽서로 왼쪽부터 고종 · 순종 · 영왕이다

 

 

 

 

여흥민씨족보(驪興閔氏族譜)

 

 

 

 

여흥민씨 족보(驪興閔氏族譜)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조선 왕실의 족보. 숙종 때 처음 간행한 뒤에 새 임금이 즉위할 때마다 보간(補刊)하다가 고종 34년(1897)에 모두 합쳐서 펴냈다

총서(總序) · 범례(凡例) · 선계(先系) · 계서도(繼序圖) · 세계(世系) · 팔고조도(八高祖圖) 따위를 수록하였다

 

 

 

 

왕비가 되다

명성황후는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으나, 맏아들과 셋째 대군 · 넷째 대군 · 그리고 딸 하나 공주 모두 일찍 죽었다

*

감고당에서 운현궁을 오가다

명성황후와 고종의 생모(부대부인 민씨)는 12촌간으로, 감고당에 살고 있던 명성황후가 자주 운현궁을 방문하였다

어린 고종은 1살 많은 명성황후를 「안동방 아줌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

왕비를 꿈꾸다

1865년 명성황후의 꿈에서 인현왕후가 나타나 말하기를

"너는 마땅히 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영원히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라"라고 하였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명성황후어찰(明成皇后御札)

명성황후의 서찰 20장을 한데 묶어 재책한 것으로, 이모(한산이씨)가 보낸 서찰에 대한 답장으로

전반적인 내용은 어머니를 대신한 이모라는 차원에서 모녀간의 정을 나누듯 정답고 격이 없이 나눈 내용들과

명성황후와 이모 사이가 가까운 것을 아는 이들이 청탁해 왔을 때 시시비비를 가려 들어줄 것은 들어주고 들어주지 못할 것은 단호히 거절하는 내용이다

이 서찰은 명성황후의 부드럽고 정겨운 면과 단호하고 냉철한 면의 두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명성황후어찰(明成皇后御札 · 궁녀 대필) / 조선시대 19세기 말 · 영인본

 

 

 

 

명성황후 친필(明成皇后親筆) / 조선시대 19세기 말 · 영인본

일편단충(一片丹忠) · 마음에서 우러난 참된 충정심이라는 뜻이다

명성황후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충성을 다해 왕실을 보필한 세 명의 환관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이 글씨를 하사하였다

 

 

 

 

감고당

숙종 왕비인 인현왕후가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으로

희빈 장씨의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5년동안 유폐된 곳으로 명성황후가 8세 이후 왕비 간택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원래 서울 안국동36번지, 지금의 덕성여고 본관에 있던 건물로 여주시에서 2008년 원형을 이전 복원하였다

 

 

 

 

여흥민씨족보(驪興閔氏族譜) 권1~39 · 민정중 서간(閔鼎重 書簡) · 민시중 서간(閔蓍重 書簡) · 민유중 서간(閔維重 書簡)

 

 

 

 

여흥민씨족보(驪興閔氏族譜)

여흥(驪興 · 여주의 옛 이름)을 본관으로 여흥민씨(驪興閔氏)는 고려 때 벼슬을 한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의 원경왕후와 인현왕후 · 명성왕후 등 여러 왕비와 황후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이 족보는 1923년 계해년 중판된 것으로 총 39권이다

 

 

 

 

민시중 서간(閔蓍重 書簡) / 1671년

민시중(閔蓍重 · 1625~1677)이 1671년(현종 12) 4월 20일에 행초서로 쓴 편지이다

민시중은 민광훈(閔光勳)의 장남이자 민정중(閔鼎重)과 민유중(閔維重)의 형이다. 이들 3형제를 일러 삼방파(三房派)라 부른다

호는 인재(認齋)이며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관직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민진주가 아들이며, 우이정 이경억 · 좌의정 윤지선과는 사돈지간이다

학행으로 이름났고 인품이 충후(忠厚)하였다

묘는 여주군 가남면 오계리에 있다

 

 

 

 

왕비가 되다 · 어린시절의 명성황후

 

 

 

 

왕비민씨(王妃閔氏) · 조선국왕(朝鮮國王) · 대원군(大院君)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이다 

 

 

 

 

명성황후 한문봉서(明星皇后 漢文封書 · 1889년) · 옥항서간(玉衖書簡 · 조선말기) · 위안스카이 전보(袁世凱 電報 · 조선말기)

명성황후 한문봉서는 명성황후가 외직에 근무하는 민영소에게 위로 겸 보낸 봉서로 민영소가 1889년 광주부유수로 있을 때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황후의 한문으로 된 봉서는 이것이 유일하다

*

옥항서간은 청(淸)의 옥항이 광주유수로 있던 금래 민영소(琴來 閔泳韶 · 1852~1917)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용은 최근의 근황과 안부를 묻는 것이다

붉은 색 편지지에 노란색 피봉을 사용하고 있어 당시의 유행을 살펴볼 수 있다

*

위안스카이 전보는 청의 전보국을 통해 민영소에게 보내진 조폐 관련 전보이다

'발신자는 전후 사정으로 보아 청의 대신인 위안스카이(袁世凱)로 추정되고 있다

빨간색으로 인쇄된 전보 용지에 총 63자의 글씨가 기록되어 있다

 

 

 

 

고종황제 사진(高宗皇帝寫眞)

서양식 정장 차림의 고종황제를 촬영한 흑백 초상 사진이다

사진은 두껍고 빳빳한 종이판지에 부착되어 있으며 사진 바깥쪽을 따라 요철선으로 사각형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사진 위쪽 여백에 이화문이 큼직하게 금박되어 있다. 당초 실내에 모셔 두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의 고종황제는 등받이가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약간 오른쪽을 향한 얼굴에 턱수염이 길게 자라 있는데 수염이 모두 흰색인 것으로 보아 노년에 찍은 사진으로 판단된다

오른손에 장갑을 쥐고 있으며 왼쪽 가슴에 훈장을 달았다

고종황제의 뒤에 일본식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이 둘러쳐져 있으며 실내 바닥에는 사방연속무늬가 있는 카펫이 깔려 있다

사진이 부착된 종이 아래 가장자리 중앙부에 「京城(경성)」이라는 글자가 돌출되게 찍혀 있고

그 아래에는 판독이 어려운 다섯 글자가 같은 형태로 찍혀 있다

 

 

 

 

명성황후 친필 / 19세기 · 영인본

 

 

 

 

명성황후 어보(御寶)

왕비 어보는 시호나 존호 · 묘호를 내릴 때마다 어보를 새겨놓고 실제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며 종묘에 보관하였었으나

현재는 역대 왕과 왕비 어보는 궁중 유물관에 보관하고 있고, 명성황후 어보는 총 10개가 있다

 

 

 

 

명성황후 관련 궁중유물

 

 

 

 

고종 · 명성황후 가례(家禮)

가례는 왕을 포함하여 왕세자나 왕세손과 같이 왕통을 이어나갈 사람들의 궁중의 혼인식이다

그 절차는 다른 어느 의례보다 화려하고 웅장하였으며, 복잡한 절차와 상징성 때문에 여러 달에 걸쳐 수천 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나라의 큰 잔치였다

1866년 3월 21일 조선왕조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 명성후의 화려한 세기의 혼인식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고종 · 명성후 가례이다

 

 

 

 

금래서실(琴來書室) 편액

금래 민영소(琴來 閔泳韶 · 1852~1917) 서실에 내린 고종황제 어필 편액(高宗 御筆 扁額)이다

*

민승호 · 민규호 · 민치록 · 민영익 서간이 아래에 있다

 

 

 

민영익 서간(閔泳翊 書簡) / 조선말기

민영익(1860~1914)이 청에 망명시 조선의 경성에 사는 아들 민정식(1897~1951)에게 보낸 해행(楷行)의 편지이다

민영익은 민태호의 아들이자 순종의 비인 순명효황후의 오빠이나 민승호에게 입양되었다

명성황후의 양조카로서 일찍 관직에 나아가 민씨 세력의 청년 세도가로 크게 활약하였다

전권대신이 되어 미국을 시찰하기도 하였으며 벼슬이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글씨는 특히 행서에 뛰어났으며 묵란을 잘 그려, 청에게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

묘는 여주군 가남면 안금리에 있다

 

 

 

 

민치록 서간(閔致祿 書簡) / 1829년

민치록(1799~1858)이 1829(순조 29)년에 행초서로 쓴 편지이다

일가 친척에게 인삼을 부탁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의 인삼 가격이 3냥 2전이라 되어 있어 흥미롭다

민치록은 민유증의 5대손이며 민기현의 아들이고, 명성황후의 생부로 자는 원덕(原德)이며 관직은 장악원 첨정을 지냈다

 

 

 

 

민승호 서간(閔升鎬 書簡)

민승호(1830~1874)가 1866(고종 3)년에 해행서로 쓴 편지이다

7가지의 선물을 보내준 것에 감사하고 나라의 경사에 모두 기뻐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민승호는 민치구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처남이나 민치록에게 입양되었다

명성황후의 양오빠로서 국정의 전반에 참여, 민씨 세도정치의 거두로 활약하였다

관직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구한말의 서화가로 이름을 떨친 운미 민영익이 양자이다

묘는 여주군 근동면 신대에 있다

 

 

 

 

민유증 서간(閔維重 書簡) / 조선 1680년

민유증(1830~1887)이 1680년(숙종 6) 둘째 형인 민정중에게 쓴 편지이다

형에 보내는 만큼 해서로 단아하게 썼다

민유증은 민광훈의 셋째 아들로 민시중과 민정중의 동생이며 호는 둔촌(屯村)이다

장인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관직이 영돈령부사에 이르렀다

1681년(숙종 7) 딸이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어 인현왕후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노론(老論)의 중진으로 경서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좌참찬 민진후와 좌의정 민진원이 아들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묘는 여주읍 능현리에 있다

 

 

 

 

민광훈 서간(閔光勳 書簡) / 조선중기

민광훈(1595~1659)이 병환중에 쓴 것으로 허병사(許兵使)에게 초상이 나자 목수를 보내 빈청을 지어주라고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필획과 운필이 막히지 않고 유수와 같이 자연스러우며, 활달하면서도 격하지 않고, 단아하면서도 거칠지 않은 수준급 간찰이다

 

 

 

 

명성황후 생가유적지 기념관 내부

 

 

 

 

교지(敎旨)

조선시대 국왕이 관원에게 내리는 각종 문서, 관원에게 관작이나 관직을 내리는 교지는 고신(告身), 문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홍패(紅牌)

생원, 진사시 합격자에게 내리는 교지는 백패(白牌), 죽은 사람에게 관작을 높여주는 교지는 추증교지(追贈敎旨)

토지와 노비를 주는 교지는 노비토전사패(奴婢土田賜牌), 향리에게 면역(免役)을 인정하는 향리면역사패(鄕吏免役賜牌)라 하였다

매우 다양하게 쓰였으며, 개국초에는 왕지(王旨), 한말에는 칙명(勅命)이라고도 하였다

교지는 국왕의 신하에 대한 권위의 상징이며, 봉건적 관료정치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교지(敎旨)

명성황후 당숙이신 민치일을 정3품 당상관(堂上官) 무관인 절충장군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임명한다는 국왕의 명령서

 

 

 

 

운요호사건(1875년)

일본은 운양호가 포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협상을 강요했다

그 결과 1876년 음력 2월 2일 조선은 일본과 최초로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며 개항하였다

 

 

 

 

청 · 일전쟁 - 성환전투 직전의 일본군의 전투 태세 / 1894년

 

 

 

 

일본 해군에게 격침된 청군 고승호 / 1894년

 

 

 

 

 

교지(敎旨)

무과 응시생인 한량 민치일이 무과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을 때 받은 홍패 교지

 

 

 

 

개항(開港)

이양선(異樣船)은 우리나라 배와는 다른(異) 모양(樣)의 배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런 서양의 군함과 상선은 18세기말부터 우리나라 주변에 나타나 통상과 개국을 요구하였으며, 초기에 조선은 이들의 통상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은 1868년에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부국강병 정책을 기도하였고 그것을 기반으로 국사제국주의 건설에 매진해 나가고 있었다

조선은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 하에 서양과 화친을 논하는 자는 매국이라 규탄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내부는 세도정치로 기강이 문란했고 무리한 정책과 혼란한 사회정세로 백성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1875년 8월 일본은 조선의 문을 열고 자신들의 침략욕을 채우기 위하여 군함 운양호를 앞세워 강화도에 접근하였다

일본은 운양호가 포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협상을 강요했으며

그 결과 1876년 음역 2월 2일 조선은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며 개항했다

이에 부산(1876년)을 비롯하여 원산(1880년) · 인천(1883년) · 목포(1897년) · 진남포(1897년) · 군산(1899년) 등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조선의 개항은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의 신호였으며, 동시에 새로운 세계관을 체험하고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비운에 가신 황후님

- 명성황후를 기리며 -

 

 

 

 

명성황후 생가유적지 기념관 내부

 

 

 

 

외국인이 바라본 명성황후

 

 

 

 

순종이 기억하는 명성황후

명성황후는 순종에게 "나라가 있는 것은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어찌 나라를 영위하겠는가?

그러므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라고 가르쳤다

 

 

 

 

명성황후 피난지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의 표적이 된 명성황후는 대원군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와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으로

안국동 윤태준의 집에서 여주 민영위의 집으로 충주 장호원(지금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피난가게 되었다

 

 

 

 

아! 옥호루(玉壺樓)

조선 26대 왕인 고종 32년(1895) 10월 8일

옥(玉)으로 만든 항아리(壺) 같이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여진 경복궁 내 옥호루에서 전대미문의 국모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우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에 태운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하던 조선정부는 자주적 외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친일세력의 제거를 위하여 미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구사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미우라를 시켜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 · 이두황이 지휘한 조선인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옥호루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한 나라의 국모이자 자주적 외교를 구사한 정치가였던 명성황후는 일본의 잔악한 침략욕에 희생되어 낭인들의 칼날에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명성황후 국장

명성황후는 고종황제의 황후로서 본관은 여흥이며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이 빈한하여 고생이 많았으나, 재주가 비상하여 일가에 알려졌으며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16세에 고종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성황후는 역대 어느 왕비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인인데

특히 권력의 정상에 군림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유일하게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타살된 왕비이기도 하다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경장으로 국권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흔들리자 친러책을 써서 적절한 등거리 외교로 일본을 압박하였다

이에 일본은 1895년 10월 8일에 일본 낭인들은 궁중에 침입시켜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해 버렸다

그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홍릉으로 옮겨져 조성되었다가 후에 고종과 함께 현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이장하여 자리잡았다

본 장면은 1897년 11월에 있었던 명성황후의 국장 장면을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규장각 소장)」를 기초로 재구성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기록화 영인본 · 명성황후 시해도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두 번째로 칼을 휘둘러 명성황후를 절명케 한 칼로서

길이 120cm로 성인이 한 손으로 휘두르기 힘겨울 정도로 무겁고 아직도 날이 시퍼런 살상용 칼이다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섬뜩한 글이 적혀 있으며

작전명을 「여우사냥」이라고 붙였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칼은 일본의 시해 당사자인, 토우 카츠아키가 「민비를 베었을 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와서는 않된다」라며 시해 13년 뒤인 1908년부터 지금까지 일본 쿠시다신사 금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

*

이 칼은 일본에서 사진 촬영해온 것을 토대로 복제한 것이다

 

 

 

 

일본인 방문단 기증품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제1차방문단 명성황후 생가 참배후 기증한 물품(명성황후 시해 낭인 후손 2명 동행)

명성황후가 어린시절 사용하던 향안(향을 넣는 주머니)

2005. 5. 9

 

 

 

 

명성황후 관음상 · 시해도 봉납대장 · 명성황후 시해도

 

 

 

 

2015년 10월 7일 제10차 명성황후시적방문단 방문록

 

 

 

 

일본인방문단 사죄문

우리들 제2차 방문단은 명성황후의 묘전에 엎드려 사죄하러 왔습니다

우리들은 이 과거의 사실을 더 많은 일본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날의 일본 어린이에게도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양국의 우호와 평화가 더욱 진전되도록 정진할 것을 맹세합니다

2007. 7. 31

제2차방문단 사무국장 가이도시오

*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제2차방문단 명성황후생가 참배 후 작성했다

 

 

 

 

안중근과 명성황후 · 명성황후 시해사건 · 명성황후국장 · 홍릉 · 백범 김구와 명성황후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로는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것에 격분하였기 때문이다

*

독립운동가이면서 정치가인 백범 김구는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일본인 장교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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