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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신립장군 묘

신립장군은 조선 명종 1년(1546)에 생원 화국(華國)의 아들로 출생하여 선조 때의 무장으로서 임진왜란(1592) 때 충주에서 순국하였다
선조 원년(156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를 지내고 진주판관이 되었다
선조 16년(1583) 은성부사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 온 이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와
그 전공으로 함경도 북병사에 승진하고 얼마 뒤에 이탕개를 토멸하였다
그 후 선조 20년(1587)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니 경상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하기도 하였다
선조 23년(1590) 평안도 병마절도사 · 다음 해 한성부 부사가 되었고 임진왜란(1592) 때 삼도순변사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하여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하였으나 참패하여 부장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 순국하였다

 

신립장군 묘역 입구에 있는 나무다

 

 

의정부 영의정 평천군 증시 문장 신완 신도비
신립 장군 묘로 오르는 길이 왼쪽으로 있다

 

 

신립장군 묘역

 

 

신립(申砬) 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제95호)
신립과 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 합장묘로 봉분은 단분이며, 묘역 규모 625㎡이다
봉분의 규모는 높이 210㎝ · 둘레 20m이며, 묘 앞에 장대석(長臺石)을 쌓아 계절(階節)을 만들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 · 향로석(香爐石) · 무덤 앞 좌우로 동자상과 망주석 · 문인석을 세웠다

 

 

신립과 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 묘비
봉분의 왼편에 대리석으로 된 묘비를 세워져 있는데 규모는 총높이 224㎝ · 높이 162㎝ · 너비 47㎝ · 두께 20㎝이며
가첨석(加檐石) · 비신(碑身) · 대석(臺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립과 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 묘비
가첨석은 팔작지붕의 형태로 지붕에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대석의 측면에는 당초문(唐草紋)이 장식되었고, 상부 모서리에는 연화문(蓮花紋)이 장식되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신익상(申翼相)이 글씨를 써서 1703년(숙종 29)에 건립한 것이다

 

 

증 영의정  충정 행 형조판서 평흥군 신준과 부인 안동김씨 합장묘
의정부 영의정 평천군 증시 문장 신완과 부인 임천조씨 합장묘

 

 

의정부 영의정 평천군 증시 문장 신완과 부인 임천조씨 합장묘
본관은 평산(平山) · 자는 공헌(公獻) · 호는 경암(絅庵)이다
영의정 신경진(申景禛)의 증손 · 할아버지는 신준(申埈) · 아버지는 목사 신여식(申汝拭) · 어머니는 공조판서 이기조(李基條)의 딸이다
삼촌 신여정(申汝挺)에게 입양되었다.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의정부 영의정 평천군 증시 문장 신완과 부인 임천조씨 묘비
1672년(현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正言)이 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이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남인 권대운(權大運) · 민희(閔熙) 등을 공격하였다
1684년 강양도(江襄道 지금의 강원도)의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도승지 · 대사헌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을 때 태조의 시호를 덧붙이는 것에 반대한 박태유(朴泰維)의 상소에 편들었다 하여 삭탈관직되었다
1688년 경기도관찰사에 기용되었다. 1694년 예조판서를 거쳐 1700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완화를 주청하였고 시무(時務) 8조를 올렸으며
일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북한산성의 축성을 건의하여 윤허를 얻었다
1703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천군(平川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1706년 유생 임부(林簿)로부터 앞서 1701년 세자에 대한 모해설이 있었을 때
추국(推鞫)에 참여하여 사건규명을 잘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저서로 『경암집(絅庵集)』이 있다

 

 

증 영의정  충정 행 형조판서 평흥군 신준과 부인 안동김씨 합장묘
신준(申埈 1572년(선조 5)~1638년(인조 16)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평중(平仲) ·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조부는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고, 부친은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이다
인조반정 때 백의종군한 공적을 인정받아 1623년(인조 1)에
구인기 ‧ 노수원 ‧ 박유명 ‧ 송영망 ‧ 신경식 ‧ 한여복 ‧ 홍효손 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음사(蔭仕)로 충병(忠兵)이 되었고, 평흥군(平興君)에 봉해졌다

 

 

증 영의정  충정 행 형조판서 평흥군 신준과 부인 안동김씨 묘비
1633년(인조 11) 강화유수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공조판서 ‧ 수원부사 ‧ 어영대장 ‧ 총융사 ‧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사간원에서 그의 성품이 탐욕스럽다는 점과
강화유수로 재직 중 수탈을 일삼아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탄핵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 충정(忠靖)을 하사받았다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아들은 신여정(申汝挺) ‧ 신여식(申汝拭)이다
그 외에 서자 신여린(申汝遴) ‧ 신여형(申汝逈) ‧ 신여근(申汝近) ‧ 신여선(申汝選) ‧ 신여통(申汝通)이 있다

 

 

평흥군 신준과 부인 안동김씨 합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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