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대청댐 건설이 계기가 되어 수몰 위기에 처한 지역문화재를 보존하고 주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1992년부터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총 4만여 평의 대지 위에 문화재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청주시 유형 · 무형의 문화재를 수집 전시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하고 조상의 삶과 얼을 되살리고 배우는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산장의 여인 노래비 / 노래 권혜경
문의문화재단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눈에 들어오는 빗돌이 있다
이 빗돌이 왜 이곳에 세워졌는지 알기 위해 검색해 보았다
가수 권혜경이 죽기 전 살던 곳인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과 관련이 있는 듯싶다
아래 글은 덤으로 알게된 노래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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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출신으로 KBS마산방송국 문예부장으로 근무하던 친일 작사가 반야월이 6 · 25 전쟁 당시 방송국 위문단을 만들어
국립마산병원(마산결핵요양소)으로 위문공연을 갔는데, 위문공연 중 그의 눈길을 붙잡은 것은 모퉁이에서 흐느끼고 있는 한 여인이었다
공연을 마친 뒤 이 여인이 폐결핵환자로 쓸쓸히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알고는 비감한 마음을 노랫말에 담았다
곡(曲)은 마산결핵요양소에서 폐결핵으로 투병중이던 작곡가 이재호가 붙였다
노래는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던 가수 권혜경이 불렀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 / 조동마을탑을 세우는 이유
갈라진 땅이야 합치면 북쪽 끝자락 어디인들 밟지 못할까마는 우리는 언제 우리가 보금자리를 들고 오순도순 모여 살던 그 땅을 다시 밟아 볼수 있을까
기억속에서 영원히 잊혀질 뻔한 우리가 살던 고향 땅의 일부나마 이렇게 남아 있어 이곳에 우리 마을의 존재를 알려줄 탑을 세운다
문의수몰유래비
주차장에서 문의문화재단지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있다
양성문(養性門)
문의문화재단지가 자리잡은 양성산에는 신라 자비왕 17년(474)에 축성한 산성이 남아 있으며
이곳 성문의 명칭도 양성산성에서 인용하여 양성문이라 칭하였다
문의문화재단지 관람안내도
양성문 앞에 있다
대청호
대청호에 연잎처럼 「인공수초재배섬」이 떠있다
하나의 분수와 꽃창포 · 노랑꽃창포 · 갈대 등을 재배하는 열 개의 섬이다
문화유적전시관
코로나19로 관람금지다
청주 문산리 돌다리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2호
상판의 장대석은 장축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결하여 놓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하여 마루식으로 만들었다
남북 장축 중간에 동서로 교각을 받치고 있으며, 석재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또한 석재는 거칠게 다듬었으며, 석주를 갖춘 시렁교이다
이 석교는 교각 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와 교각 중심에 을(乙) 각자가 남아 있다
축조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조선 헌종 초기에 편찬된 「충북도읍지」에 최초의 기록이 나온다
1980년 대청댐이 건립되면서 문의초등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100m 전방에 있던 석교가
문산관과 함께 미천리로 이전되었다가 2002년 3월 문의문화재단지로 다시 이전되었다
학소리 유적 1호 집자리
학소리유적의 위치는 불당산(246m)에서동남쪽으로 내려오는 두 개의 가지능선 가운데 북쪽에 위치한 능선의 말단부에 해당하며
미호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고, 하천의 주변으로 넓은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유적의 가운데에 위치한 과수원을 기준으로 북동쪽으로 낮은 능선이 북주하고 있으며 동쪽 사면으로 경사 낮은 경작지를 형성하고 있다
유구는 황갈색 및 적갈색을 띠는 풍화암반층에서 확인되었으며
청동기 집자리 4기 · 석관묘 7기 · 토광묘 19점 · 석기류 10점 · 청동류 14점 · 철기류 40점 · 옥석류 15점이 출토되었다
놀이마당
가운데 왼쪽으로 김선복 충신각과 양반가가 있다
민화정(民和亭)
문화유적전시관에서 놀이마당으로 올라서면 왼쪽에 있다
청주 부강리 고가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이 집의 안채는 부용면 부강리(지금의 세종시)의 김종철씨가 살던 고가를 1995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한 것으로 'ㄱ'자 형태의 목조 기와집이다
광채는 새로 지은 건물로 얇은 판석으로 덮은 돌기와집이며 중부지방의 산골부락에 많이 있던 형태이다
청주 부강리 고가 안채
천불능궁력색가(天不能窮力穡家) / 하늘도 힘써 일하는 집을 궁하게 못한다
대청마루 주련에 붙어 있는 글귀다
문의현 옛 비석
옛 문의현 지역인 문산리 · 미천리 일대에 있었던 관찰사 또는 현령들의 공적비와 선정비이며
1979년 대청댐이 수몰되면서 문의면 미천리에 보관하였다가 1997년 4월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양반가옥
중부지방의 양반이 살았던 옛가옥을 재현한 것으로, 양반가 중에서도 문벌이 높은 사대부 가옥에 가까운 건축구조이다
가옥의 구조는 목조와가로 안채와 사랑채 · 행랑채로 크게 구분되고 부속건물로 안채 뒤편에 가묘(家廟)와 오른쪽으로 광과 측간을 배치하였다
1994년도에 건립하였다
김선복 충신각 / 청주시 향토유형 제37호
임진왜란 때 조헌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충신인 의성 김씨 김선복(1571~1592)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신각은 1957년 문의면 등동리 정가울 마을 앞에 중건한 건물로서 1989년에 해체 복원하였으며
1998년에 문의문화재단지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사랑채
양반가옥을 일오도화서(日午圖畵署)에서 쓰고 있다
행랑채
일오도화서에서 그린 그림 같다
안채 · 행랑채
안채 기둥에 입춘대길 · 건양다경 등의 글귀가 붙어 있다
가묘(家廟)
안채 뒤편에 있다
문의 문산관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조선 현종 7년(1666)에 세워진 문의현의 객사(客舍)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 지방관아의 건축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원래 대청댐 수몰지역에 위치해 있어
1979년 문의면 소재지로 이건되었다가 1996년 이곳 문의문화재단지로 다시 이전되었다
대청호
놀이마당 앞으로 흐른다
저잣거리
한복 · 전통놀이 · 캘리그라피 · 공예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코로나19로 저잣거리도 문을 닫았다
민화당
공예품 전시판매장으로 일오민화연구소에서 그린 민화도 판매한다
청주 노현리 고가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0호
문의면 노현리의 연안이씨 괴정 이현승 참봉이 살던 가옥이었으며, 당초 강릉김씨 김승지의 종가였다
가옥구조로 안채는 'ㄱ'자 형태의 목조기와집이며, 광채와 사주문 · 측간은 목조초가로 되어 있다
1993년 손자인 이양훈에 의해 이곳으로 이전 복원되었다
청주 노현리 고가 안채
문의면 노현리의 연안이씨 괴정 이현승 참봉이 살던 목조기와집이다
옹기전수관
박재환 옹기장(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은 1932년 이곳 봉산리 점촌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6대째 전통옹기 도공으로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재환 옹의 7대조부터 천주교 신자였는데, 6대조 박태진 공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옹기를 굽기 시작한 이후 옹기마을로 번성하여 마을 이름도 점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 옹기마을이 형성된 것은 미호천 유역에 점토가 많아 태토를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박재환 옹이 주로 만드는 옹기는 항아리 · 소줏고리 · 장군 · 자배기 등의 생활용기이다
대청호미술관
역시 코로나19로 휴관이다
청주 관정리 고가
청주 관정리 고가 옆에 생육비 · 기념비 등 5기의 비가 있다
청주 관정리 고가 /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8호
낭성면 관정리의 신방호씨가 살던 가옥을 원래의 모습 그대로 1994년에 이전 복원한 집으로 전형적인 중부지방 초가이다
가옥의구조는 'ㅡ'자 형태의 안채와 대문이 있는 광채로 구분되는데
본래의 가옥에는 사주문이 담장 사이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으나, 이전하면서 광채와 함께 설치하였다
서덕길 효자각 / 청주시 향토유형 제38호
숙종 32년(1706) 이천인(利川人) 서덕길(1599~1658)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효자각은 1973년에 문의면 도원리에 중건된 후 1997년에 문의문화재단지로 옮겨 세운 건물로
정면 1칸 · 측면 1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효자문 편액을 걸었다
문의면 노현리의 연안이씨 괴정 이현승 참봉이 살던 목조기와집이다
미원 수산리 · 문의 가호리 · 내구 학평리 고인돌 / 청주시 향토기념 제6 · 5 · 7호
중앙의 문의 가호리 고인돌은 대청댐으로 수몰된 가호리 아득이 마을에 있었던 고인돌이다
1977년에 발굴조사한 이후, 대청댐 수몰지역 밖인 마을 입구로 옮겼다가 1997년 다시 문의문화재단지 야외전시장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고인돌의 뚜껑돌은 2조각으로 깨져 있는데 본래 크기는 길이 304cm · 너비 275cm · 높이 55cm로 큰 편에 속한다
또 이 큰 뚜껑돌의 무게를 지탱하는 굄돌은 판석형으로 뚜껑돌과 같은 돌이다
뚜껑의 장축 방향은 강물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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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 수산리 고인돌은 상당구 미원면 원미마을을 지나는 미원~초정 간 지방도로의 동쪽 둔덕에 있었던 고인돌로서
도로 건설로 인하여 길 옆으로 옮겨져 방치되어 있다가, 1997년에 문의문화재단지로 이전하였다
현지의 주민들도 고인돌이라 부르는 이 고인돌은 돌로 쌓아 만든 축대 위에 축조되어 있는데
현재 민묘 1기가 옆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민묘를 장식하는 조경석처럼 보인다
고인돌은 이미 파괴되어 뚜껑들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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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 학평리 고인돌 청원구 내수읍 학평리 마을 동쪽의 구릉지에 있던 고인돌이 농로를 개설하면서
길 옆에 방치되었던 것을 1997년에 문의문화재단지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이 고인돌이 있던 곳은 본래 성황당이라 불리던 곳인데 고인돌 뚜껑을 제단으로 이용하여 매년 정월 보름날에 동제(洞祭)를 진냈다고 전해진다
고인돌은 현재 1매 판석으로 이루어진 뚜껑돌만 남아 있다
뚜껑돌 윗면에는 10개의 성혈이 있어, 이 돌을 대상으로 하여 민간신앙이 행하여졌음을 나타내준다
개석 하부 구조는 이미 파괴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신동문 시비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群) 들
기자석
신화에서의 바위나 돌은 영험과 신격화된 인물이 태어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기자석은 다산과 번식 그리고 굳건함을 상징하는 돌로 남근석 또는 아들바위로 불린다
기자석의 형상은 성기형 · 교구형 · 말모양 · 거북모양 등으로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과 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이와는 달리 여자의 성기 모양을 하고 있는 여근형의 돌도 신앙의 대상으로 전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2020. 0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