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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의주길 제1길(벽제관길)

한양과 의주를 잇는 옛길인 의주대로는 관서대로 · 경의대로 · 연행로로도 불리웠다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은 모두 이 길을 이용했기 때문에 「의주대로」는 조선의 대로에서 가장 중요시한 길이었다

산업화로 옛 원형이 많이 훼손된 다른 옛길과는 달리 의주대로는 거의 원형이 보존되어 지금의 50번 · 78번 등 도로로 남아있다

하지만 교통량이 많고 인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곳이 대부분으로 도로 탐방로도 적합하지 못하여

도보여행객을 위한 탐방로를 개척하여 역사문화탐방로 「의주길」을 개통하게 되었다

의주길은 통일을 지향하는 길이며 유라시아 대륙을 향해 세계로 나아가는 꿈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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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길 벽제관길은 서울에서 의주와 대륙을 향하는 첫 길이다

사람들은 이 길에서 멀리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배웅하고 중국에서 온 사신들을 영접했다

벽제관길의 중심인 벽제관은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도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하룻밤 쉬어가던 곳이었다

한편 삼송역에서 멀지않은 숲길에선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조선의 국경 문제를 매듭지은 김지남의 묘를 만날 수 있다

공릉천 부근에서는 고양군민들이 힘을 모아 공릉천에 다리를 세워 의주대로를 탄탄하게 만든 사람들의 기록이 담긴 덕명교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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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길은 한 코스씩만 걷자고 했건만 오늘은 두 길을 걸었다

보통 한 코스를 걸을 땐 코스 주변 이곳저곳을 들리며 늘려걷기를 하지만 두 길을 걸으면 지름길로 가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삼송역 8번출구

GS25 방향으로 가야 한다

 

 

 

 

고양한북누리길 · 의주길 방향안내판

 

 

 

 

의주길 · 고양한북누리길 안내판

 

 

 

 

의주길 제1길 벽제관길 안내판

 

 

 

 

삼송주택 빗돌

 

 

 

 

삼송초등학교 교차로

숯돌고개를 오르며 돌아 봤다

 

 

 

 

숯돌고개

숯돌고개는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과 오금동 · 신원동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요충지였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시기에도 큰 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에서 파견된 이여송 장군은 1593년 1월 27일 숯돌고개에서 일본군과 큰 싸움을 벌였지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싸움에서 패한 이여송 장군은 복수를 다짐하며 이 고개에 있었던 바위에 자신의 칼을 갈았다고 하며 그 때부터 이 고개 이름은 숯돌고개가 되었다

숯돌고개 주변에는 지금도 많은 참호와 군부대가 있어서 중요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숯돌고개를 넘어 바로 왼쪽 길이다

 

 

 

 

숲길로 작은 언덕을 넘으면 김지남 묘역이 나온다

 

 

 

 

고양삼송휴먼시아아파트단지

김지남 묘역으로 가는 언덕 정상에서 봤다

 

 

 

 

우봉(牛䗦 · 牛峰) 김씨 묘역

이곳에는 수십 기의 묘소가 자리해 있는데 대체적으로 묘역의 상단에 선대조를 모시고 아래로는 후대의 묘소를 조성하였다

 

 

 

 

김지남 묘(金指南墓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1호)

김지남은 조선시대 후기의 역관으로 만 18세인 1672년 역과에 급제한 후 일본과 청나라를 오가며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특히 숙종 38년(1712) 청나라와 국경을 확정하여 간도 및 토문강 동쪽을 조선의 영토로 정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이에 따라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문사와 중국어에 유창하였고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연혁 · 역사 · 행사 · 제도 등을 체계화한「동문관지」를 아들과 함께 편찬하였다

벼슬은 지충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지남 비갈(金指南碑碣)

사면에 글이 새겨진 금석문으로 비문 뒷면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된 과정과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실록과 같은 문헌 기록을 제외한 비문 기록으로는 보기 드물어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고양시 향토문화재로 지정하게 되었다

 

 

 

 

김지남 공적비

증 형조판서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 지중추부사 김지남 공 공적비

 

 

 

 

우봉(牛䗦 · 牛峰) 김씨 묘역

공적비가 있는 아래에서 올려다 봤다

 

 

 

 

고양 오금초등학교

의주길 이야기판은 햇빛에 바래 하얗다

이곳만이 아니다

 

 

 

 

오금천

김지남 묘에서 내려오면 만난다

 

 

 

 

북한산

노고산 너머로 보인다

 

 

 

 

오금천

천변으로 걸어도 좋을 듯한데 의주길 입석방향표지는 인도를 가르킨다

 

 

 

 

고양삼송퍼스트빌아파트단지

 

 

 

 

고양 신원동 덕명교비(高陽 新院洞 德明橋碑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2호)

한양과 북부지방을 연결하는 의주대로 구간 중 공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기록한 비다

비문에 의하면 비의 건립자는 이한과 당시 고양군수인 통정대부 유후성 그리고 정헌대부 윤면지 · 이상식 · 홍사우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이다

즉 앞면은 비의 서문과 본문으로 주민 760여 명이 모두 힘을 합쳐 공릉천 위에 돌다리를 건립했고 그 명단을 자세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특히 수 십 명의 인명이 이두문자로 기록되어 있어 이두문자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비의 건립 연대는 효종 9년(1658)이며 고양시 공릉천 일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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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명교비 오른쪽에 의주길 덕명교 이야기 · 스탬프 함 · 뒷쪽에 덕명교비 안내판이 있다

 

 

 

 

덕명교비

고양 신원동 덕명교비는 총 높이 286m · 비신은 가로 95cm · 두께 25c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비를 받치고 있는 대좌는 현재 지표면보다 낮은 상태로 비신의 비문은 비바람 등으로 마멸이 심해 일부분은 판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비의 가장 윗 부분인 옥개석의 일부도 마모되어 있는 상태이다

 

 

 

 

북한산

오금천11교 옆에서 봤다

 

 

 

 

공릉천이야기 안내판

오금천이 공릉천에 흡수되는 오금천11교 옆에 있다

새로 만든 걷기길이다

 

 

 

 

벽제교

신원마을 고양삼송아이파크아파트단지가 보인다

의주길은 벽제교를 건너야 한다

 

 

 

 

송강약속마당 안내판

이곳에서 이동식을 했다

 

 

 

 

벽제교

 

 

 

 

공릉천

벽제교를 건너며 봤다

 

 

 

 

삼송공룡테마파크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밑을 지난다

 

 

 

 

벽제관 고지(碧蹄館 古址) 빗돌

이곳에서 동북방 3.5km 지점에 벽제관 고지가 있다

 

 

 

 

벽제역(폐역) 철길로 올라가는 계단

의주길 제1길을 걷다 대자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잠시 걸으면 있다

 

 

 

 

벽제역(폐역)

비가림막은 기둥만 남았고 플랫폼도 깨져 있다

 

 

 

 

벽제역(폐역) 역사

 

 

 

 

도로로 튀어나온 집

벽제역에서 다시 의주길로 가기 위해 대자삼거리로 가다 만났다

 

 

 

 

제1대자교

이곳에서 벽제천을 따라간다

이곳도 역시 놋쇠로 만든 교량제원판이 없어졌다

 

 

 

 

벽제천을 따라가다

오른쪽에 보이는 용복교를 건넌다

 

 

 

 

용복교

 

 

 

 

벽제천

용복교에서 봤다

 

 

 

 

대자동 이야기

대자동은 고양동 서쪽과 남쪽에 위치한 마을의 이름으로 이곳에는 쌍궁말 · 고골 · 대적골 · 빈정동 · 용복원 · 한오동 · 새원 · 간촌 등의 자연촌락마을이 있다

대자동에는 최영장군 묘를 비롯해 연산군시대 금표비 등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다

대자동의 유래설은 조선조 태종 넷째 아들인 성령대군이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임금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만 홍역으로 일찍 죽고 말았다

이에 상심한 태종은 무덤 근처에 암자를 세워 불공을 드리기로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길이 너무 멀어 임금이 이곳을 자주 왕래하면

혹 나라 일을 소홀히 할까봐 잦은 행차를 삼가도록 진언하였다 한다

이에 태종은 무덤 근처에 큰 자비를 내린다는 뜻으로 대자사(大慈寺)라는 절을 지어 명복을 빌었으며

이때부터 이 절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대자리로 부르게 되었다

 

 

 

 

벽제천을 따라간다

 

 

 

 

벽제천

윗쪽으로 보이는 빈정교를 건넌다

 

 

 

 

빈정교

역시 교량제원판이 없다

 

 

 

 

의주길 부착형 안내판이 보인다

 

 

 

 

빈정1교

이곳은 CCTV가 있는데도 다리 명판이 없어졌다

 

 

 

 

고양일고등학교

빈정1교를 건너다 봤다

 

 

 

 

역시 다리 명판이 없다

 

 

 

 

고양일고등학교

벽제천변을 깨끗하게 꾸미고 있다

 

 

 

 

호국로 꽃농장

벽제천을 따라 걷다 고양일고등학교 앞에서 호국로로 나온 곳이다

 

 

 

 

고양1교

호국로를 따라 걷다 왼쪽 방향이다

 

 

 

 

버즘나무(플라타너스)

나무껍질(수피)의 모양이 얼룩덜룩 큰 조각으로 떨어져 버즘과 같아 버즘나무라 부른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가로수로 쓰이는 나무로서 의주길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걷기여행자의 친구이다

북한에서는 열매의 모양을 따 방울나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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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동종합복지회관 앞이다

 

 

 

 

고양초등학교

1909년 5월 1일 사립 명륜학교(明倫學校)로 처음 설립되었다

1911년 4년제 고양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가 이듬해 공립으로 전환되어 고양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51년 10월 고양국민학교로 개칭하였고, 1981년에는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2017년에는 105회 졸업식을 거치면서 총 1만 1,719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고양 벽제관 육각정 터 / 일제에 의해 약탈된 고양 벽제관 육각정

일제강점기인 1918년 조선총독부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과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명나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벽제관전투를 기념하고자

벽제관 앞 연지터(이곳)에 있던 육각정을 반출하여 자신의 고향인 이와쿠니시 모미지다니 공원에 기증하였다

고양시는 고양 600년의 해를 맞이하여 육각정 등의 문화재 환수운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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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사진으로 보면 사각정이다

 

 

 

 

느티나무 보호수 4본(경기-고양-13)

품격 도나무 · 높이 20m · 둘레 3.4m · 나이 500년 · 지정일자 198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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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티나무들은 성종 7년(1476)에 새로운 벽제관을 증축하면서 그 위용을 자랑키 위해 연못을 만들고 그 주위에 심은 것이라 한다

나무 안쪽에 위치한 공덕비들과 함께 고양의 옛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나무다

 

 

 

 

고양동 송덕비군

고양동 송덕비군은 벽제관지 부근 도로 옆에 위치한다

이 비들은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군수 및 관찰사 · 면장의 선정(善政)과 치적을 기리기 위한 송덕비들이다

주요 재료는 화강암이나 오석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 비신 · 옥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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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비마다 앞에 명판이 있다

 

 

 

 

고양 벽제관지(사적 제144호)

조선 성종 7년(1476) 11월에 세운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 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 사신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예를 갖추어 한양으로 들어갔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들도 여기서 머물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한편 벽제관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군대와 왜군과의 벽제관전투가 있었던 자리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일부 헐렀고,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려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8km, 소요시간 7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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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길 1 · 2길을 같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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