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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몽양 여운형 생가 · 기념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큰 스승이자 양심적인 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선생의 삶을 올바로 알리고 뜻을 널리 선양하고자 2011년 11월 27일 개관하였다

*

몽양기념관 개관7주년특별전 〈만장, 한반도 슬픔을 담다〉가 열리고 있다

 

 

1층 몽양기념관 · 2층 생가

 

 

 

 

몽양기념관 개관7주년특별전 〈만장, 한반도 슬픔을 담다〉 포스터

 

 

 

 

전시관 왼쪽

유년시절 에피소드 · 광동학교 설립 · 국채보상운동 · 노비해방 · 기독교활동 등으로 나누어 설명해 놓았다

 

 

 

 

전시관 오른쪽

1886년 4월 22일 신원리 묘골 출생부터 몽양의 약력이 있다

 

 

 

 

여운영 유년시절

어머니 이씨가 치마폭에 태양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훗날 몽양(夢陽)이라는 호를 지었다 한다

 

 

 

 

몽양의 설명을 듣는 빅터

 

 

 

 

3 · 1운동 발단의 중심

 

 

 

 

1919년 9월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사진

 

 

 

 

민족의 웅변가

안창호의 연설도 유명했지만 여운영이야말로 당대의 웅변가였다

 

 

 

 

1919년 11월 27일 오후3시 도쿄제국호텔의 연설

3 · 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그 배후 핵심인물인 몽양을 회유하기 위해 같은 해 11월 도쿄로 불러 들인다

하지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밝힌 몽양 여운영의 웅변을 듣고 감동한 일본사람들의 박수갈채가 끊이질 않았다 한다

 

 

 

 

공립 인성소학교 교장이었던 시절 김인옥 학생에게 준 졸업증서다

여운형은 시국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없이 「의(義)」 하나만으로 의병활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연못에 가서 고기를 탐내는 것은 물러가서 그물을 뜨는 것만 같이 못하다는 옛말을 좇아 청년들을 계몽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사랑방에 인근 청년들을 모아놓고 지리 · 역사 · 산술 등 이른바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07년 고향 마을 양평에 「광동학교」를 설립하였다

 

 

 

 

수형생활

 

 

 

 

1930년 수인과 수형기록

 

 

 

 

여운형 선생에 대한 판결서(1946년)

조선사상운동연구자료 출판부에서 발행한 책자이다

여운형 선생에 대한 심문서 · 조서 및 판결문 등을 초역하여 수록하고 있다

 

 

 

 

1922년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조선중앙일보사장 시절

 

 

 

 

스포츠맨으로써의 여운영선생의 근영(48세)

평소 스포츠를 통해 청년들의 전투정신을 고취 · 독립운동을 도모하려했던 몽양은

1934년 출간된 「현대철봉운동법」에 철봉훈련으로 단련된 자신의 맨몸을 공개했다

「장래의 조선은 청년의 조선이다」며 청년들의 기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몽양은 권세나 돈이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아도 청년들을 보면 두려웠다고 한다

혹시 자신이 나쁜 본이라도 보일까 조심했던 것이다

 

 

 

 

몽양의 피격 당시 입고 있던 옷 · 수첩 · 은단 · 장례 때 신문

 

 

 

 

건국훈장 1급

자기 세력의 증식보다는 대의를 앞세웠던 몽양 그래서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고 결국 몰락해 이제야 복권되었다

 

 

 

 

몽양기념관

몽양에 대한 책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SECTION 1 / 1886 ~ 1929

 

 

 

 

SECTION 2 / 1929 ~1945

 

 

 

 

SECTION 3 / 1946 ~ 1947

 

 

 

 

대한민국 8년 3월 8일 공립인성소학교 제64회 졸업기념

SECTION 1 사진 중 하나다

 

 

 

 

전시를 열며

몽양기념관 개관7주년특별전 〈만장, 한반도 슬픔을 담다〉

 

 

 

 

만장 · 만가 · 만사 · 만시

여운형 장례식에 사용된 수 천의 만장 중 현재 전해지는 117점이 양평군에서 기탁 받아 전시 보관 중이다

 

 

 

 

1947년 7월 19일 서거

 

 

 

 

〈만장, 한반도 슬픔을 담다〉가 열리고 있는 매진홀

 

 

 

 

상여(喪轝)를 쫓으며 (여운영 선생 장례날) / 김광균(金光均)

 

 

 

 

몽양의 기사가 있는 만세보 · 조선중앙일보 · 우리신문 · 독립신문

 

 

 

 

여운형의 장례식은 최초의 인민장으로 거행되었다

 

 

 

 

몽양의 만장들

 

 

 

 

몽양에 관한 신문기사들

 

 

 

 

데드마스크(1947년)

서거 후 얼굴을 본떠 석고로 제작한 것이다

 

 

 

 

나의 최후를 비탄 말고 민족의 내일을 노래하라

 

 

 

 

크로마키실

무료로 몽양 선생과 기념촬영하는 곳이다

 

 

 

 

몽양 여운형선생 생가지 비문(夢陽 呂運亨先生 生家址 碑文)

생가는 6 · 25 때 소실됐다가 2001년 양평군민들의 노력으로 생가터가 정비되었고 이듬해 이 터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영회암(永懷庵)
용문산 부용봉 아래 강과 산이 휘감아 따뜻하고 완만한 곳 묘골에 조선 숙종 41년(1715) 함양 이씨가 이곳에 집을 지었다
택호를 영회암이라 하고, 자손들로 하여금 「영원히 이름과 명예를 지켜라」는 선조의 유훈을 실천케 했다

 

 

 

 

영회암(永懷庵) 내부

 

 

 

 

생가 안채 · 사랑채
생가는 함양 여씨가 입향한 조선 숙종 41년(1715년) 최초로 건립되었다
몽양 선생이 1886년 출생해 부모 탈상을 끝낸 뒤 서울로 이사를 간 1908년(22세)까지 사신 곳이며
해방 전후인 1940년대 초 · 중반에 종종 내려와서 지내시던 곳이다

 

 

 

 

생가 안채

 

 

 

 

면도하는 몽양

 

 

 

 

몽양 가족사진

생가 마루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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