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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종주이야기 1

문경읍~수안보

여름휴가 때 문경읍에서 팔랑소 · 송계계곡을 거쳐 청풍단지로 가려던 계획을
휴가철 피서로 숙소가 문제될 것이란 생각에 계획을 앞당겨 가려고 하니 1박 2일로는 문경에서 수안보 · 충주 코스가 무난하다
6월 19일 7시 35분 문경행 시외버스를 탔다

 

 

청운각(靑雲閣)
1937년 대구사범대학을 졸업한 박정희 대통령이 그 해 4월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2년 9개월간 거처하던 곳이다

 

 

 

 

문경초등학교(예전 문경 서부심상소학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이 교사로 재직했다

 

 

 

 

영남요(중요무형 문화제 105호 사기장) 빗돌
밤꽃이 한창이다

 

 

 

 

영남요

 

 

 

 

가마에서 작품을 꺼내는 중이다

 

 

 

 

문경새재
조선 태종 때 개척한 길로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영남대로상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 문화 ·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 이름의 유래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 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 재」 등의 의미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암튼 새재의 높이는 642m로 주흘산과 조령산의 사이에 있다

 

 

 

 

약돌한우타운

 

 

 

 

윤씨 일심각(尹氏 一心閣)
병자호란 당시 의병으로 참가했던 조막룡이 쌍령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의 처 윤씨는 6년 동안 소복차림으로 애통해 한다
이를 본 친정 부모가 재혼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이에 따르지 않고 목을 메어 죽음으로서 절개를 지켰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효종 8년(1654년) 윤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졍려를 내리고 일심각을 세웠다

 

 

 

 

선비의 상
전통사회의 구심점을 이루었던 지성과 인격의 상징일 뿐 아니라
우리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미래를 창조하는 아름다운 한국인을 상징한다

 

 

 

 

신길원 현감 충렬비(申吉元 縣監 忠烈碑) /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신국량의 아들로 45세에 벼슬길에 올라
1590년(선조 23)에 문경현감으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다가, 1592년(임진년) 4월 27일 문경을 사수하다가 순국하였다
임란 때 지방관으로 순국한 이가 많지 않았으며 나라에서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하여 그의 충렬을 기렸으며
1706년(숙종 32)에 비를 세워 충절을 표창하였다
*
임란 당시 소서행장이 상주를 거쳐 문경을 침공하자 현감은 피신하지 않고 문경을 사수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왜적에게 잡히어 항복을 거절하고 관인도 주지 않으니 왜적이 현감의 몸을 수색하자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주지 않으므로 적은 비수로 오른손을 자르니 왼손으로 관인을 쥐자 왼손을 자르므로
현감은 입에다 관인을 넣으려 할때 적은 장검으로 목을 쳐서 순국하였다
*
1706년 3월에 나라에서 비를 세워 충절을 표창하니 비문은
 선무랑 전수사간원 정언지제교(宣務郞 前守司諫院 正言知製敎)인 채팽윤이 지었으며

통훈부대전행성균관전적(通訓夫大前行成均館典籍)인 남도익이 쓴 글씨이다
이 비는 1981년 4월 25일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었고
「신길원」은 달성군 공산면의 표충사에 배향되었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도 실려 있다

 

 

 

 

옛길박물관
고모산성 고분의 출토물 등과 문경의 삶
그리고 영남대로와 아름다운 길 · 우리의 옛길 · 우리가 걷는 길 등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돌칼
이삭을 딸때 사용했다

 

 

 

 

고모산성 출토 유물

 

 

 

 

복식유물

400여 년이 지난 복식유물로 2004년 3월 12일, 문경시 산양면 연소리 소재 분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굴됐다

 

 

 

 

2층 전시관
문경의 옛 지도들과 현재의 위성사진을 나란히 비교해 볼 수 있다

 

 

 

 

기리고차
조선시대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하던 수레로 1리(里)를 갈 때마다 나무로 만든 인형이 북을 쳐서 거리를 알리게 만든 수레다

 

 

 

 

문경새재 과거길 빗돌

영남 제1관(주흘관)이 되에 있다

 

 

 

영남 제1관(주흘관 主屹關)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관문 양쪽에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영남제1관(嶺南第一關)

 

 

 

 

선정비군(善政碑群)

 

 

 

 

현감 홍로영 영세불망비(縣監 洪侯魯榮 永世不忘碑)
중앙에 있는 무쇠로 만든 보기 드문 비석이 있다
1824년에서 1827년까지 문경현감을 역임한 홍로영의 비석으로 1826년(순조 26)에 건립한 것이다
바닥돌 위에 비몸과 지붕을 함께 주물기법으로 제작하였으며 도드라진 글씨로 새겨놓았다

 

 

 

 

영화 포스터

KBS촬영장 앞에 있는 포스터로 이곳에서 촬영된 드라마인가 보다

 

 

 

 

제중원(濟衆院) 촬영장

 

 

 

 

평시서(平市署)
고문틀이 있는 걸로 봐서 예나 지금이나 장사꾼들이 죄를 많이 짓나보다

 

 

 

 

광화문(光化門)
실제 크기의 70%로 만들어졌다

 

 

 

 

근정전(勤政殿)
맨발걷기대회가 열려서인지 도립공원 입장료도 안받고 KBS 촬영장 입장료도 안받더니
근정전 앞에선 커피와 둥굴레차를 무료로 준다

 

 

 

 

기와집 거리

 

 

 

 

근대의 모습이 담긴 세트장

 

 

 

 

드라마 추노 세트장

 

 

 

 

KBS촬영장 전경

 

 

 

 

드라마 왕건 촬영장

 

 

 

 

지름털(기름틀) 바위
기름을 짜던 틀처럼 생긴 바위

 

 

 

 

조령원 터(鳥嶺院址) / 향토유적
조령원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관리들이 출장을 나오면 숙식을 제공하는 공익시설이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 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새재내에만 동화원 · 신혜원 · 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래지고 있다

*
돌담을 쌓고 그 안에 옛날 모형을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 초가지붕의 초라한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대충 가린 판자 사이로 멀리서도 안이 들여다 보인다

 

 

 

 

무주암(無主岩)

누구든지 올라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로
예전에는 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을 위한 무인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 두었다 하며
길손들이 이 바위에 올라 주변 경치를 즐기며 목을 축인 후 마신만큼 주대를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다 한다
바위에 앉으면 조령산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도 앞에 주점이 있다

 

 

 

 

조령산
무주암에서 봤다

 

 

 

 

옛 과거 길
소로(小路)로서 현재 3개소 850m가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사람마다 시험에 대한 징크스는 다양하고 흥미롭다
영남에서 한양을 가는 길은 문경새재와 죽령 · 추풍령이 대표적인 고개였다
그러나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유독 문경새재만을 고집했다
문경은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고, 예전에 문희(聞喜)도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였기 때문이다
반면 죽령은 '죽죽 미끌어 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 처럼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관방시설로 군사들이 지키고 있어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었으며
동래에서 한양까지 문경새재 길은 열나흘 · 죽령은 보름 · 추풍령은 열엿새가 걸렸다 한다

 

 

 

 

주막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도로로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을 오르던 선비들과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 등
여러 계층의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의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 풀며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다
*
산수가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은 1983년 11월 조국순례자연보도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를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기고 있다
*
이왕이면 옛 모습의 주모가 문경 막걸리와 부침개도 팔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
주막 앞마당엔 고용후(高用厚 1577년(선조10)~1652년(효종3)의 문경주막에서 월사선생에게 드리다(聞慶酒幕 奉寄月沙先生)와
징비록의 류성룡이 쓴 宿鳥嶺村店(새재에서 묵다 )란 글이 앞마당 돌에 새겨져 있다


宿鳥嶺村店(숙조령촌점) /  새재에서 묵다
悄林風起(초초림풍기) /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泠泠溪響生(령령계향생) / 졸졸졸 냇물 소리 들려오네
幽懷正迢遞(유회정초체) /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山月自分明(산월자분명) / 산 위에 뜬 달은 밝기도 해라
浮世身如奇(부세신여기) / 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殘年病轉嬰(잔년병전영) / 늘그막 병치레 끊이질 않네
南來還北去(남래환북거) / 고향에 왔다가 서울로 가는 길
簪笏愧虛名(잠홀괴허명) /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구나

 

 

 

 

교귀정(交龜亭)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 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 하는 교인처(交印處)로

1470년 경(성종 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 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 · 정면 3칸 ·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감 이인면 애혈비 · 선정비( 縣監李侯寅冕愛血碑 · 善政碑)

 

 

 

 

예배굴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신부가 경상도 충청도 지방을 순회 전교활동을 위하여 넘나들던 곳으로
새재 길 입구 진안리에서 순교하여 천주교 성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 중턱 절벽 틈새에 있는 이 굴은

조선 말기의 예배장소로 추정되며 길이 7m · 폭 5.5m · 높이 1m로 동굴 내에는 당시 교인들이 쓰던 십자가가 모셔져 있다

 

 

 

 

꾸구리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밑에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바위를 움직였다고 하며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 한다

 

 

 

 

문경새재 돌탑

문경새재를 넘어가던 사람들 중에 이곳에 돌을 하나라도 올린 사람은 나중에 잘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는 급제를 했고 장사를 하던 사람은 돈을 벌었고
아들을 원하던 아낙은 옥동자를 낳았으며 몸이 아픈 사람은 몸이 나았다 한다

 

 

 

 

산불됴심 빗돌 / 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
정조 때 산불조심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세운 한글 표석이다

 

 

 

 

조곡폭포(鳥谷瀑布)
산수 수려한 주흘산 깊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20m의 3단폭포이다
산불됴심비 바로 위에 있다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 조동문(鳥東門) · 주서문(主西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의 안타까운 역사 때문에 이곳에 관방을 설치하였다

 

 

 

 

문경새재 아리랑 민요비
조곡관을 지나 약 500m가면 도로 변에 자연석을 깎아 새긴 비(문경새재 민요비)로

민요의 내용 중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 좋아 큰 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요즘 같으면 외설로 금지지만 사실 표현예술은 무한 자유~!

 

 

 

 

바위굴과 새재우
먼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던 길손이 갑작스런 소나기를 만나 이 바위굴에 들어오니
마침 과년한 처자가 이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어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여졌다
그후 처녀가 아이를 낳아 십수년이 흘러 아이가 성장하니 주변에서 아비없는 자식이라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에게 아비의 내력을 물은즉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여 주고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후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산골에서 세찬 호우를 만나 주막에 들었는데
먼저 들어 있던 중년의 선비가 말하기를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 함으로

이에 아이가 짚이는 바 있어 "새재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은즉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아이가 자신의 내력을 말하고 확인한 즉 부자지간임을 알게 되어 아버지를 모셔와 어머니와 함께 잘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귀틀집
 통나무를 정자형(井字形)으로 양 귀를 맞추어 쌓아올려 벽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집으로 주로 산간지역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이다

 

 

 

 

영남제3관(嶺南第三關) 조령관(鳥嶺關)
문경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제1관문과 함께 쌓았다
이후 비로소 조령산성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조령관 (鳥嶺關)

천천히 사진을 만들며 올라오니 3시간이나 걸렸다

 

 

 

 

백두대간 조령 빗돌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 재」 혹은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 재」라고도 한다

조령은 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영남대로(嶺南大路)라 불렸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조령산 자연휴양림 빗돌

 

 

 

 

어사또가 쉬어간 자리 · 신혜원 마을 유래비
가나안 호텔 앞에 있다

 

 

 

 

느티나무 보호수

 

 

 

 

조령산 방향
대안보교에서 봤다

 

 

 

 

주흘산 · 조령산

 

 

 

 

수안보온천 아치

 

 

 

 

삿갓촌식당

충북 향토음식경연대회에서 대상 수상 식당이다

*

부림온천장모텔이 마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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