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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청계천박물관 1존

청계천박물관 1존 · 개천시대

조선의 수도 한양의 중심을 가로지르던 개천(청계천)이 도심의 하천으로서의 역사를 시작하는 내용을 다룬다

한양 정도(定道) 과정과 도성 안 물길을 다스리는 개천 관리 연표를 비롯해

개천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한양의 생활공간적 범위인 북촌 · 남촌 · 웃대 · 중촌 · 아랫대에 이르는 천변지역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살펴볼 수 있다

 

 

프롤로그 서울 · 청계천

현재의 시공간에서 조선시대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전이공간이다

현재 서울의 발전상과 서울의 새로운 명소가 된 청계천의 역사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주는 대형 영상을 통해

앞으로 관람하게 될 청계천의 전체 역사를 미리 살펴볼 수 있다

 

 

 

 

서울의 확장 · 서울, 청계천

1394년 조선의 도읍지가 된 이래 600여 년간, 서울은 모든 면에서 한반도의 중심이었다

도성 안과 성밖 10리까지였던 한성부의 행정권역은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으나 1914년 축소되었다가 1936년 이후 팽창을 거듭하였다

현재의 서울의 인구는 1천여 만 명, 면적 605.4㎢, 25개 행정구로 이루어진 세계 유수의 거대도시다

청계천은 옛 도성 한복판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하천이다

이 하천은 서울 도시구조의 원형을 정한 뼈대였으며, 시민들의 일상과 깊이 관련 맺은 생활하천이었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인구가 늘어나고 생활양식이 변화함에 따라 청계천은 도시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부터 지천들은 하나 둘 복개되었고, 1977년에는 본류가 전부 복개되었다

복개도로 좌우에는 시장과 공장이 들어서서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활을 했다

21세기에 접어들 무렵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가운데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태도가 확산되면서 청계천에 대한 시민의 시선도 달라졌다

이에 다시 지상으로 나온 청계천은 6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면면히 흐르고 있다

 

 

 

 

산과 물, 서울의 바탕

대형 영상 속의 한 장면이다

 

 

 

 

1존 · 개천시대

조선왕조가 새 도읍지로 정한 한양의 한복판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하천은

도성민에게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하수를 처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연물이었다

또 풍수상으로도 도성 안 공간을 명당으로 만든 명당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산으로 둘러싸인 도성 안의 지형과 집중호우가 자주 내리는 기후, 물이 잘 스미는 모래하천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이 하천은 수시로 범람하여 도성민의 생활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하천을 자연 상태로 유지한 채로는 도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1411년(태종 11) 태종은 개거도감을 설치하여 자연하천을 정비하고 축대를 쌓게했다. 개거도감은 후에 개천도감으로 바뀌었다

개천이란 자연하천의 바닥을 파고 물길을 넓히는 일, 또는 그렇게 만들어진 하천을 말한다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에서 올라온 52,800명이 두 달 남짓 땀을 흘려 자연하천을 개천으로 바꾸었다

이후 개천은 도성민의 일상생활과 깊이 관련 맺으며 600여 년간을 흘러왔다

 

 

 

 

물길 다스리기 개천의 역사

태종 때의 공사로 범람의 위험은 크게 줄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개천 바닥에 토사가 쌓였고 축대가 무너지기도 했다

성종 때에는 개천 양안에 버드나무를 심어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예방하고자 했으나 근본적인 처방이 되지는 못했다

개천에 토사가 쌓이는 속도는 17~18세기에 특히 빨랐다

도성의 인구가 급증하여 생활하수가 늘어났고, 사산(四山)에서는 법으로 금지된 개간과 벌목까지 행해졌다

도성 밖 목장지대가 농지로 개간되면서 하류에도 토석이 쌓였다

1760년 영조는 준천사를 설치하고 대대적인 개천 준설공사를 단행했다

이후 준천사는 개천을 관리하는 상설기관이 되었고, 2~3년 마다 주기적으로 개천 준설공사를 하였다

준천사의 업무는 신설된 주교사(舟橋司)로 이관되었다가 순조 이후에는 한성부와 군문(軍門) 관활이 되었다

 

 

 

 

산과 물길의 도시 · 한양

북한산 · 덕양산 · 관악산 · 아차산 등의 외사산(外四山)으로 둘러싸인 한강 이북의 넓은 분지가 한양 땅이다

조선 왕조는 이 한양 땅 가운데에 연이어 솟아 있는 백악산 · 인왕산 · 목멱산 · 타락산의 내사산을 잇는 성곽을 쌓아 도성을 완성했다

내사산의 여러 계곡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들이 도성 안 한가운데로 모여 개천을 이루었다

백운동천 발원지에서 중량천 합류부까지 길이는 약 11km, 광통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본류의 하천 너비는 10~60m 정도였다

개천은 동쪽으로 흘러 오간수문을 지나 중량천과 만난 뒤 남행하여 다시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에 합류했다

개천과 한강이 만나는 형상이 마치 태극과 같아 옛 사람들은 한양이 개천으로 인해 명당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여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한양도

「여지승람」에 백악산 · 인왕산 · 목멱산의 여러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흐르며 도성 중심을 가로질러 세 개의 수문을 빠져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우리나라는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나 한양의 개천은 동쪽으로 흐르므로 수세(水勢)가 정도(正道)를 얻었다고 한다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

 

 

 

 

웃대 · 진경과 풍류의 명승지

웃대 또는 상촌이란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을 포함하는 광통교 윗쪽 상류 일대를 말한다

이 지역은 관청거리인 육조거리와 가까워 서리(書吏) · 녹사(錄事) 등 아전(衙前)들이 많이 살았다

웃대의 북쪽, 개천의 발원지와 가까운 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시인 묵객들이 많이 모였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중인 계층의 문학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웃대는 이들의 주된 창작 무대였다

또한 인왕산 일대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독자적인 화풍으로 담아낸 겸재 정선이 살았던 곳으로 진경산수 화풍의 산실이기도 했다

 

 

 

 

천변 한양사람들의 삶

모든 하천은 유역별로 구분되는 생태적 특성을 갖는다. 도시의 생활하천도 유역별로 서로 다른 사회 생태적 특성을 만들어낸다

조선시대에는 광통교 이북의 상류지역을 웃대 또는 상촌(上寸) · 광통교에서 종묘 앞 효경교에 이르는 개천 양안 지역을 중촌(中村)

효경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개천 하류 지역을 아랫대 또는 하촌(下村)이라 했다

또 백악산 남쪽 기슭을 북촌(北村) · 목멱산 북쪽 기슭을 남촌 · 낙산 서쪽 기슭을 동촌(東村), 서대문과 서소문 사이를 서촌이라 했다

이 7개 촌은 한성부 산하의 공식 행정구역인 5개 부(部)와는 별도로 도성 안의 지역을 구분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지역마다 자연 경관과 입지 특성이 달랐던 만큼 주민 구성과 지역 문화에도 각각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물소리를 벗 삼아 시를 짓고

인왕산 필운대에서도 시화가 자주 열렸는데 이를 필운대풍원이라 했다

옥류동천 물줄기 주변에는 곳곳에 중인들이 시화를 열던 장소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결성된 송석원시사였다

옥계시사라고도 불린 이 모임은 1786년 결성된 이후 30여 년간 지속된 조선 후기 최대의 중인시사였다

이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한양의 대표적인 중인문학이 발달했다

 

 

 

 

등고상화《옥게십이승첩》(燈高常花《玉溪十二勝帖 · 1786년 복제)

 

 

 

 

부귀와 권력의 중심 북촌 · 고고한 선비들의 마을 남촌

개천은 도성의 중심을 흐르며 백악산 아래 북촌과 목멱산(남산) 아래 남촌을 공간적으로 나누었다

개천 이북 백악산 아래 북촌에는 궁궐과 주요 관청들이 자리 잡았고, 권세있는 양반들의 저택도 많았다

반면 남산 기슭의 남촌에는 군영과 창고 외에 변변한 국가 시설이 없어 양반 중에서도 무반과 벼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조선 후기에 북촌과 남촌을 상징하는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있었다

넉넉한 북촌은 떡이 유명하고 물이 맑은 남촌은 술을 잘 빗는다는 의미로 개천을 기준으로 나뉘는 한양의 지역적 생활문화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수표(水標 · 보물 제838호)

수표는 1441년(세종 23) 하천의 수위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개천과 한강에 각각 설치한 기구이다

처음에는 네모난 나무기둥 형태였으나 성종 때 돌기둥 형태로 바꾸었다

돌기둥 앞 · 뒷면에는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고, 3 · 6 · 9척이 되는 곳에 'O'표시를 새겨

각각 갈수(渴水 · 가뭄), 평수(平水 · 보통), 대수(大水 · 홍수)의 기준으로 삼았다

 

 

 

 

중촌 · 백성의 삶을 품은 저잣거리

광통교에서 효경교에 이르는 개천 구간의 남북 지역을 중촌(中村)이라 했다

이 일대는 시전행랑과 의금부 · 포도청 · 도화서 · 혜민서 등의 관청들이 밀집해 있었다

조선 후기 개천변은 상업이 발달하고 온갖 문물이 넘쳐나는 활기찬 곳이었다

시전 상인들과 뒷골목 색주가(色酒家), 세시 때마다 펼쳐지는 놀이행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생동감 넘치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냈다

특히 이곳에는 의관 · 역관 · 화원 · 악공 · 산원 · 율사 등 기술직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양반 문화와 구별되는 중인 문화의 산실이었고 조선 말기에는 개화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업의 중심 · 운종가 시전과 개천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흩어진다고 하여 운종가라 부른 종로 일대는

시전행랑이 설치되어 한양사람들의 일상생활용품을 공급하던 상업의 중심지였다

운종가 중심에 있는 종루 양 옆에는 여섯 곳의 큰 시전인 육의전이 있었는데

비단을 취급했던 면전(綿廛)을 비롯하여 면주전(명주) · 면포전(무명) · 저포전(모시) · 지전(종이), ·물전(생선) 등 이었다

운종가와 이웃한 개천변에는 시전의 상품을 제작해 파는 수공업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는데

주로 생산되는 상품과 직업에 따라 관자동(貫子洞) · 입정동(笠井洞)과 같은 지명이 생겼다

 

 

 

 

황현 매천야록 권1 북촌남촌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하는데 이곳은 노론이 살았다

그 남쪽은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당이 살고 있었다

 

 

 

 

개천변 사람들

조선 후기 개천변은 상업이 발달하고 온갖 문물이 넘쳐나는 활기찬 곳이었다

각양각색의 상업종사자들과 뒷골목의 유흥 · 색주가 · 개천 다리 밑 깍정이 거지패 세시 때마다 펼쳐지는 놀이행사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여 생동감 넘치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특히 시전행랑과 의금부 · 포도청 · 도화서 · 혜민서 등의 관청들이 밀집한 중촌은 한양의 대표적인 상업중심지이자 대중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개천변 대중문학

도시가 경제적으로 번성하면서 서적의 유통은 서민계층으로까지 광범위해졌다

18세기가 되면 한양을 중심으로 상업적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도서가 발간되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이 유행한다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수요자와 판매자를 연결해주는 서적중개상 및 책을 필사해주고 돈을 받는 필사자도 많아진다

특히 운종가와 개천은 서책과 서화의 주요 유통공간으로

운종가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즉 전기수(傳奇叟)가 인기가 많았다

한편 통속소설류가 사대부 남녀노소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행하면서 위정자들은 음란하고 무익하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개천변 대중놀이

조선시대 한양의 개천변은 명절이 되면 도성민의 유희와 오락 활동이 펼쳐지는 중심 무대 역활을 했다. 개천변이 가장 붐빌 때는 정월 대보름이었다

대보름 전후에서는 개천 북안에 매일같이 연 날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대보름날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아이들의 돌싸움이 벌어졌으며 광통교 · 장통교 · 수표교 등 돌다리들은 다리밟기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사월 초파일에는 개천가 집집마다 형형색색의 등을 내걸었다

 

 

 

 

상업도시, 한양의 시전(시장)

조선을 건국한 새 왕조는 가장 먼저 궁궐, 종묘 · 사직, 관청과 함께 시전을 정비하였다

수도의 중심인 종루(운종가)는 궁궐과 관아 그리고 민가가 밀집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소비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규모의 시전이 건설되었다

시전은 국가에서 행랑(점포)을 건설하여 상인들에게 임대해주고 세금을 받는 관설시장을 말한다

태종 때인 1412년부터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에서 종로5가에 이르는 도로변 좌우에 2천여 칸이 넘게 조성되었다

관설시장인 운종가(특히 종로 부근의 육의전)를 비롯하여 사설시장인 이현(배오개)과 칠패 그리고 한강변 포구마다 생겨난 경강시장이 대표적이다

 

 

 

 

국가가 관리한 운종가 시전(雲從街 市廛)

왕실과 여러 관아 그리고 도성 주민들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종루를 중심으로 지금의 종로와 남대문로 주변에 관설시장인 시전을 설치하였다

이 일대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진다 해서 운종가라고 불렸다

시전에서는 한 가게에서 한 가지 물건만 전문적으로 팔았기 때문에 시전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으며 가게 이름은 파는 물건으로 결정되었다

 

 

 

 

육의전(六矣廛)

운종가 중에서도 종루를 중심으로 설치된 시전 중 그 규모가 크고 국가에 지불하는 부역이 큰 곳을 특별히 육의전이라 하였다

선전(線廛 · 중국산 비단) · 면포전(무명) · 면주전(국산 비단) · 어물전(생선, 건어물) · 저포전(모시) · 지전(종이) 등이 육의전에 속했다

시대에 따라 육의전에 포함되는 시전이 조금씩 달랐고 반드시 6개의 시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전상인(市廛商人)과 금난전권(禁亂廛權)

원래 한양에서는 공인된 상인, 즉 시전상인들만이 영업을 할 수 있었다

시전상인들은 국가의 허락을 받아 장사하는 대신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바치고 세금을 냈으며

궁궐이나 관청의 수리 등 각종 의무를 다해야 했다

그러나 그만큼 국가의 보호와 독점판매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았다

즉 '금난전권'이라 불리는 권한을 부여받아 나라의 허락을 받지않고 시전의 물품을 마음대로 파는 난전(亂廛 · 개인의 상업활동)을 단속할 수 있었다

 

 

 

시전의 거래물품과 천변 수공업

입공(立工 · 갓 만들기), 망건공(網巾工 · 망건 만들기, 금은공(金銀工 · 장식공예 만들기)

목혜공(木鞋工 · 나무신 만들기), 적초리(績草履 · 짚신 만들기), 혁화공(革靴工 · 가죽신 만들기) 등이 있었다

 

 

 

 

이현(梨峴)시장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서울의 인구가 더욱 증가하면서 시장 또한 확대되었다

이현시장은 운종가, 칠패와 함께 서울 안 3대 시장으로, 종루의 상가가 동대문쪽으로 확장되면서 형성된 사설시장이다

현재의 종로 4가와 5가 사이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에는 지금도 이현시장에서 변화된 광장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이현에서는 동대문이나 광희문을 통해 들어오는 서울 근교에서 재배된 나물이나 채소류가 특히 유명했으며

그 밖에도 어물과 의류 · 목면 · 미곡 · 과실 등도 많이 거래되었다

 

 

 

 

칠패(七牌)시장

칠패시장은 숭례문(남대문)과 소의문(서소문) 사이에 형성된 시장이다

칠패라는 명칭은 어영청의 7패 순찰대의 초소가 있었던데서 유래하였다

동부채(東部菜) 칠패어(七牌魚)라고 할 정도로 이현의 채소거래만큼이나 칠패의 어물매매는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에도 대규모 수산시장이 열렸던 곳이다

 

 

 

 

경강(京江)시장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흐르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는데

'경강'이란 한강 중에서도 지금의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서울지역을 흐르는 부분을 가리킨다

경강은 전국의 세금과 물건들을 배에 싣고 서울로 들러오는 입구이기도 했다

특히 한강진 · 용산 · 마포 · 서강 · 양화진 등을 중심으로 물품 운송업과 상업이 발달하였다

 

 

 

 

한강나루터

 

 

 

 

마포나루터

 

 

 

 

개화의 선구자들, 광통교 육교시사

1876년 육교시사가 결성된 뒤 중인문학의 중심지는 중촌으로 이동했다

「육교」는 오간수문에서 서쪽으로 6번째 다리인 광통교의 별칭이다

기술직 중인들이 중심이었던 육교시사는 세계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나누면서 시대의 변화를 모색한 모임이었다

주요 동인은 강위 · 백춘배 · 김석준 · 배전 · 김재옥 · 지운영 · 변위 등이 있었다

대부분 의관 · 역관이었던 육교시사 동인들은 직업 특성상 조선 말기 서양세력이 밀려 들어오는 상황에서 발빠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시무상소를 올리거나 직접 우두법을 도입하는 등 북학파와 개화파를 연결하는 가교 역활을 했다

 

 

 

 

우두절목(牛痘節目 · 1886년)

우두 관련 시행규칙이 수록된 문서로 육교시사 동인인 지석영이 충청도 우두교수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랫대와 성저십리 · 아랫사람들이 사는 마을

조선 왕조 정부는 동쪽이 낮은 한양의 지형을 고려하여 동대문 주변에 군영을 여러 군데 배치했고 성 밖 들판에는 말목장을 두었다

효경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개천 하류 양안지역인 아랫대 또는 하촌에는 이런 이유로 군병들이 많이 살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말목장이 대부분 폐쇄되자 그 자리는 도성민의 부식거리를 공급하기 위한 채소밭으로 개간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극심한 재정난으로 군병들에게 충분한 급료를 주지 못하게 된 정부는 군병들의 상업 활동을 허용했다

이로 인해 군병과 상인이 일체화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아랫대의 배오개는 동대문 밖에서 생산된 채소들이 거래되는 큰 시장으로 발전했다

 

 

 

 

훈련원과 배추밭, 왕십리 목마장

동대문 오간수문 주변에는 무과시험과 군사훈련을 주관하는 훈련원을 비롯하여

훈련도감의 부속 관청인 하도감과 염초청 그리고 어영청 · 장용영 등 군사시설이 밀집해 있었다

군병들은 생계를 위해 채소를 재배하거나 각종 수공업품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훈련원 주변에서 생산된 배추와 왕십리 일대의 미나리 등이 특히 유명하여 '동부채 칠패어'라는 말이 생겨났다

조선 전기 동대문 밖 뚝섬과 살곶이벌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말 목장들이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점차 도성에 공급할 채소를 지배하는 근교농업지로 변하였다

현재 마장동 · 자양동 등의 지명에 말목장 유래가 남아 있다

 

 

 

 

속병장도설(1750년)

1742년 간행된 '병장도설'의 체제를 본떠서 중앙군의 집법 · 조련 · 편성 · 기구 등을 설명한 병서이다

 

 

 

 

경복궁대전훈련원동남문외채전양안(1865년) 1865년 10월 모일

경복궁 터의 전과 훈련원 동남문 밖에 소재한 현황을 기재한 토지대장이다

 

 

 

 

가산과 버드나무

1760년(영조 36) 준천공사 때 개천 바닥에서 퍼낸 흙을 오간수문 양편에 쌓아 두었는데 그 크기가 작은 산만 했기 때문에 가산 또는 조산이라 불렀다

개천 남쪽의 가산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북쪽의 가산은 청계5가와 6가 사이 동대문시장 일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개천변에는 홍수로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

특히 경진준천의 대대적인 정비 후 무성해진 버드나무로 인해 오간수문 일대는 도성 안 제일의 물놀이 장소가 되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가공하여 가재도구를 만드는 사람을 '고리백정'이라 했는데 개천변 버드나무는 이들의 생계수단이기도 했다

 

 

 

 

동십자각과 중학천 십자각교(1920년대)

*

이 사진부터는 프로젝터 화면을 찍은 것이다

 

 

 

 

삼청동천과 장생전교(1920년대)

 

 

 

 

이전된 광화문과 삼청동천(1920년대)

 

 

 

 

수표교(1880년대)

 

 

 

 

삼청동천과 건춘문(1886년)

 

 

 

 

백운동천과 신교(1900년대)

 

 

 

 

석교(수표교 · 1904년)

 

 

 

 

개천에서 노는 아이들(1900년대)

 

 

 

 

종로에서 바라본 광통교(1900년대)

 

 

 

 

수표교와 개천변(1920년대)

 

 

 

 

장통교(일제강점기)

 

 

 

 

수표교(일제강점기)

 

 

 

광화문 신교(일제강점기)

 

 

 

 

체부동 금청교(1927년)

 

 

 

 

개천가 빨래터(1927년)

 

 

 

 

수표교와 수표(일제강점기)

 

 

 

 

백운동천(일제강점기)

 

 

 

 

삼청동천과 장생전교(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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