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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 3존

유서깊은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서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심화하는 한편

서울시민 및 서울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박물관이다

*

상설전시 3존 / 일제 강점기의 서울(1910~1945)

1910년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이후 암울했던 식민도시 경성을 돌아보는 공간으로서

일제에 저항하면서도 근대 문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였던 당시 서울사람들의 삶을 전시하고 있다

 

 

3존 / 일제강점기의 서울(근대 도시화의 그늘)

1910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조선이라 칭하고 일본 왕의 직속기관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총독은 조선 안에서 행정 · 군사 · 입법 · 사법의 모든 권한을 쥐었다

대한제국의 수도로서 정치와 경제 · 문화의 중심이던 서울은 인천 · 개성 등과 함께 경기도 소속의 여러 부 중 하나인 경성부로 격하되었다

서울은 명목상 일본의 지방도시였지만 식민통치의 중추기관과 주요기업 · 교육기관 · 문화시설이 모여있어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조선의 수도였다

일제강점기 서울 인구의 20% 정도는 일본인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청계천 이남의 남촌에 거주하였다

민족차별은 일상적이었다. 모든 행정은 일본인 위주였고 대부분의 경제적 문화적 자원이 남촌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차별에 반발하면서도 남촌의 건물과 시설은 한국인들의 발길을 끌었고 한국인들은 그곳에서 근대를 체험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위주로 만들어진 그 시설들에서 한국인들은 이방인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서울은 빠르게 근대 도시로 변하였지만 식민지 도시의 근대성은 한국인을 유혹하였을 뿐 포용하지 않았다

 

 

 

 

빼앗긴 서울 경성

일본은 한국을 자국 영토에 편입시켜 영구히 지배하는 한편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상징을 동원하였으며, 자국의 필요에 따라 식민지 개발의 방향과 순위를 정하였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 구상은 서울 공간에 표현되었다

도로 체계는 일본의 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요구에 따라 변화하였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대 국권을 상징하던 건조물은 대부분 파괴되어 다른 용도로 쓰이거나 가까이에 대규모 공공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도시 행정과 도시 관리는 언제나 일본인의 편익을 우선하였다

총독부는 중일전쟁 직전인 1936년에 경성부의 영역을 확대하여 전쟁물자 생산시설을 배치하였다

한국인들도 식민 통치에 적응하면서 도시 공간 곳곳을 변화시켰다

오랜 전통과 식민지 조시계획, 도시민의 자율적 변경이 함께 어울어지면서 식민 도시 경성은 나름의 특징을 만들었다

 

 

 

 

경성 파노라마

1920년대 중반 경성에는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주요한 건물들이 잇달아 완공되었다

그리하여 그 무렵 경성의 방문자라면 누구나 현관격인 경성역에 내려 태평로를 따라 경성부청을 지나 조선총독부에 도달하게 되었다

본래 서울의 주산 중 하나인 남산에 일본 건국신화의 주인공을 모시는 조선신궁이 완공된 것도 이때였다

한편 정동에는 한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도 세워졌으며, 식민지 최고재판소인 경성고등법원도 새로 지어졌다

물론 경성에는 이와 더불어 19세기 말부터 밀려온 근대화의 물결을 상징하는 명동성당 · 세브란스병원 · 이화학당 등의 양식 건축물이나

500년 왕도의 상징인 경복궁 · 창덕궁 · 덕수궁 같은 궁궐 등도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1929년 경성에는 식민지와 근대 그리고 전통이 공존하고 있었다

 

 

 

 

성벽은 무너지고 새 길이 뚫리다

일본은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유교적 왕정 이념을 구현한 도성 안의 공간구조를 식민통치에 적합한 형태로 개조 · 훼손하고자 했다

1907년 일본 황태자의 방문에 앞서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하여 콜레라 방역과 위생상의 이유로 남대문 북쪽 성벽을 허물었다

숭례문(남대문) · 소의문(서소문) · 흥인지문(동대문) 부근의 성벽과

오간수문(1908~1911) · 소의문(1914) · 돈의문(1915) · 혜화문(1928) 등 성문과 성벽들을 차례로 철거하였다

한편 한일합병 전후 조선 초기 형성된 서울 도성의 상징적 공간구조 및 대한제국 정부의 도시개조사업의 성과에 반하여

식민도시 경성을 근대적인 도시로 만든다는 명목 아래 도심부를 격자형으로 재편하려는 시구개수사업을 추진하는 등

노골적으로 서울의 전통적인 도시조직을 파괴해 갔다

 

 

 

 

쌀 17가마에 팔린 서대문

 

 

 

 

부서지는 대한제국의 상징들

궁궐은 일본의 한국 강점 직전부터 집중적인 파괴와 개조의 대상이 되었다

창경궁은 동물원 · 식물원 · 박물관이 마련된 공원이 되어 1909년에 일반에 공개되었고 1911년에는 명칭마저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벚꽃놀이 장소가 되었다

경복궁은 1915년에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되면서 전각 대부분이 헐렸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

경희궁은 일본인 중학교로 바뀌었고 · 숭정전과 홍화문은 사찰과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로 팔려갔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기념물들도 훼손되었는데 환구단에는 철도호텔 · 사직단에는 사직공원 · 독립문 옆에는 서대문형무소가 들어섰다

항일의 상징이던 장충단 맞은 편에는 박문사가 지어졌다

급기야 국사당이 있던 남산자락에는 일본의 신인 천조대신과 명치천왕의 위패가 있는 조선신궁이 세워졌다

 

 

 

 

조선박람회

조선총독부는 자신들의 식민총치 업적을 자랑하고 위세를 과시하고자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 이어 또 다시 조선박람회를 열었다

이 조선박람회는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 동안 같은 장소인 경복궁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두 박람회로 인하여 경복궁은 완전히 훼손되었다

 

 

 

 

격하된 경성부 · 넓어진 행정구역

일제는 강점과 더불어 수도 한성부를 경기도청 소재지 경성부로 격하하였다

뒤이어 1914년에는 도성 내외를 포괄하는 5부, 면제의 행정구역을 도성과 일본군 기지가 위치한 용산으로 축소하고 동 ·  · 통으로 개편하였다

1936년 4월에는 도시개획을 시행하기 위해 인근의 고양군 숭인면 · 한지면 · 연희면 · 은평면

시흥군 영등포읍 동면 · 북면, 김포군 양동면 일부를 편입하여 부역을 3.5배 가까이 확장하였다

새롭게 편입한 지역 중 동북부 지역은 주로 주택지대 및 경공업지대로 개발하였으며 서남부의 영등포 지역은 대공업지대로 개발하였다

이어서 1943년에는 넓어진 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구제를 실시하여

종로구 · 중구 · 용산구 · 서대문구 · 동대문구 · 성동구 · 영등포구 등 7개구를 설치하였다

1944년 10월에는 서대문구 인근 연희면의 일부를 다시 편입하여 마포구를 신설하였다

 

 

 

 

넓어진 경성부 · 경성부 서울의 인구 추세

 

 

 

 

분단된 경성 · 남촌과 북촌

1885년 남산 북쪽 기슭에 지정되었던 일본인 거류지는 계속 확대되어

일본의 한국 강점 무렵에는 도성 안 청계천 남쪽 토지 거의 전부가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충무로와 남대문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1890년대 말부터 일본영사관 · 거류민 총대역장 · 경성우편국 · 조선은행이 차례로 들어서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이 되었다

이 무렵 일본인이 많이 사는 청계천 이남을 남촌 · 그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는 관행이 생겼다

일본인들이 경제적으로 우세하였던 데다가 행정 자원도 편중하여 배분되었기 때문에 남촌은 상대적으로 쾌적하고 문명적인 공간이 되었다

일본인이 남촌에 밀려들자, 이곳에 살던 한국인들은 다른 곳으로 밀려났다

북촌의 인구밀도가 높아졌고 주거환경도 악화되어 "북촌의 하늘은 어둡고 남촌의 하늘은 밝다"는 말이 유행하였다

 

 

 

 

북촌 전경

 

 

 

 

남촌 전경

 

 

 

 

항일 민족운동의 중심

서울은 일제강점기 내내 항일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

1919년 거족적인 3 · 1운동이 첫 봉화를 올린 곳도 서울이었고 의열단원을 비롯한 항일의사들이 의거를 단행한 장소들도 대부분 서울에 있었다

종로 YMCA와 낙원동 천도교대교당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지식을 전파하며 새로운 대중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심 무대였다

서울에서는 조선물산장려회 · 조선민립대학기성회 · 조선노동공제회 · 조선노동총연맹 등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단체들이 설립되어 전국 운동의 지도부 구실을 하였다

1927년 서울에서 설립된 신간회는 명실상부한 민간운동의 중추였다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 기간 중 일본은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운동을 탄압하였으나

서울의 지식인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민족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서대문형무소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지에서 항일운동이 거세게 불타오르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체포되자 일제는 이들을 감금할 형무소가 필요했다

1908년 독립문 바로 옆에 3,200명을 수감할 수 있는 경성감옥을 지었는데

19만 8348㎡ 부지에 적은 인원으로 다수의 수형자를 감시할 수 있도록 T자형 부채꼴로 만들었다

이후 경성감옥은 1912년 서대문감옥 ·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다

시설은 근대적이었으나 수감자에 대한 처우는 아주 야만적이었다

모진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어 수감된 사람들은 감옥에서도 학대와 고문을 면하지 못하였다

3 · 1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형무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경성사람들의 생활 모형

 

 

 

 

한양구락부

 

 

 

 

평화카페

 

 

 

 

빨래터

 

 

 

 

조선총독부 원형주두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조선이라고 칭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일제는 처음 남산에 있던 통감부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다가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고 신청사를 건립하였다

지상 4층에 총건평 9,600여 평 규모로 지어진 신청사는 1916년 7월 10일 착공하여 10년 후인 1926년 10월 1일(시정기념일)에 낙성식을 가졌다

675만 엔이라는 막대한 예산으로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건립된 이 건물은 최고 식민지지배기구로서의 고압적인 권위를 최대한 느낄 수 있도록 지어졌다

광복 이후 이 건물은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96년(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차원에서 철거되었고

철거된 중앙돔 랜턴과 건축부재 등은 독립기념관의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본정

1885년 조선 정부는 남산 아래 진고개(지금의 충무로)를 일본인 거류지로 지정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원칙적으로 진고개에서만 장사할 수 있었으나 일본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남대문로 일대까지 침투하였다

1897년 남대문로와 충무로가 만나는 지점에 일본영사관과 거류민 총대역장 · 상업회의소가 건립되었는데 이후 이곳은 일본 상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자기들 마음대로 진고개의 이름을 본정(혼마치)으로 바꾸었다

이후 본정은 「경성의 긴자」로 불리며 최고급 소비 상가로 번성하였다

그리고 삼월(미쓰코시) · 삼중정(미나카이) · 평전(히라타) 등의 대형 백화점이 모두 이곳에 자리 잡아 한국인을 유혹했던 바

본정은 일본제 상품뿐 아니라 문화까지 확산시키는 중심 거점이 되었다

 

 

 

 

종로

종로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한 때부터였다

1895년 좌우에 들어찬 가가(假家)를 철거하여 도로의 폭을 회복하였고, 1899년에는 전차를 놓았다

옛 원각사 터에는 근대적 시민공원이 생겼고 보신각 맞은 편에는 시계탑이 달린 한성전기회사 사옥이 건립되었다

이로써 종로는 근대 국가 수도의 중심대로다운 면모를 갖췄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일본인 거류지인 남촌이 경제적 · 문화적 중심지로 떠오르자 종로 거리는 방치되었고 점차 퇴락해갔다

이후 1926년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선 뒤

종로에도 서양식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나 남촌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하였다

 

 

 

 

광화문통~태평통

경복궁 앞 너른 길은 좌우에 육조가 나란히 늘어서 있었던 까닭에 육조거리라 불렸다

이 길은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황궁이 됨에 따라 한동안 방치되었으나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다시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는 육조거리에 광화문통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다

그리고 1912년에는 광화문통을 정비하고 남대문까지 새 길을 내었다

새 길에는 인근에 중국 사신의 숙소였던 태평관이 있었다 하여 태평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광화문통에는 경기도청 · 경찰관강습소 · 체신국 등 관청들이 차례로 들어섰고

1926년 조선총독부와 경성부 신청사가 준공되면서

광화문통에서 태평통으로 이어지는 대로는 식민지 중앙행정부서가 집결한 식민통치의 상징가로가 되었다

 

 

 

 

경성 유람

관광은 철도교통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문화현상이다

경성은 한반도 철도망의 중심이자 조선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자연히 중요한 관광지가 되었다

경성을 소개하는 안내책자 · 엽서 · 지도 등이 수없이 발간되었으며, 다양한 기념품도 제작되었다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대륙 진출이 가속화되면서 경성은 일본 · 조선 · 만주 ·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국제관광 여행 코스 경유지가 되기도 했다

관광 상품으로 대표적인 것은 기념엽서 세트이다

처음에는 조선의 고유한 풍속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엽서의 소재는 점차 도시의 명소와 관광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남대문 · 광화문 · 경복궁 등 고적, 조선총독부 · 경성역 · 조선은행 등 근대건축물과 종로 · 본정통 등 시가지의 풍경이 엽서에 담겼다

 

 

 

 

스포츠와 경성운동장

야구나 축구 · 농구 · 정구 등과 같은 근대적 체육 활동은 1900년대 초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처음 시작하였다

3 · 1운동 이후에는 지식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식이 널리 퍼지면서 체육활동이 활발해졌다

1920년 조선체육회가 창립하여 학생야구대회를 개최했으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같은 민족 언론도 이에 가세했다

경성과 평양 학생들 사이에 정기 축구대회도 시작되었다. 「경평전」이 있는 날이면 온 장안이 떠들썩할 정도였다

1926년에는 경성운동장이 준공하여 경성 체육의 산실이 되었다

한편 능동에는 골프장 · 뚝섬에는 경마장이 들어서 새로운 체육 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1936년 양정고보 학생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여 우승한 것은 경성 체육, 나아가 우리 민족 체육의 쾌거였다

 

 

 

 

경성 사람들의 살림집

1920년대 이후 경성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새로운 주거형태가 등장하였다

전통한옥은 집장사가 지은 도시한옥으로 변화하였는데

이 도시한옥은 목재의 부피를 줄이고 칸의 길이를 작게하여 세를 놓기 좋게 방의 개수를 늘린 것이 특징이다

또한 뾰족한 박공지붕에 평면구조가 거실 중심인 일본식 문화주택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1929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에서도 3채의 문화주택이 전시되었다

1930년대에는 일본회사가 사원용 임대주택인 미쿠니(三國)아파트를 회현동과 내자동에 지으면서 아파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1941년에 설립된 조선주택영단은 대방동과 상도동에 대단위 공동주택을 건설하였다

한편 도시 주변부로 밀려난 가난한 영세민들은 불결한 토막에서 살았는데, 이는 많은 도시빈민 문제를 낳았다

 

 

 

 

경성을 덮은 전쟁의 그늘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을 개시한 일본은 1941년 전선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하였다

군국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던 일본 사회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극단적으로 군사화하였으며 식민지 정책도 군사적 목적에 종속되었다

경성에도 전쟁의 그늘이 짙어갔다

모든 생산 요소가 군수산업에 집중되어 소비재 산업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전쟁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화폐 증발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총독부는 생필품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배급제를 실시하였으나, 배급 물자는 언제나 부족하였다

경성부민들은 극도의 곤궁 속에서도 강제 저축과 공출로 재산을 약탈당하였고 방공 훈련과 사상 교육 · 노력 동원으로 신체를 억압당하였다

전시의 경성은 꿂주린 주민들이 언제 전선에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에 떨면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거대한 수용소였다

 

 

 

 

미국 대통령 해리 투르먼이 명령하여 1945년 8월 6일 월요일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 3일 후 8월 9일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된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군 제2사령부이면서 통신센터이자 병참기지였으므로 일본의 군사상으로 중요한 근거지였다

나가사키 원폭투하 6일 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 2일 항복 문서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다

한편 독일은 이미 5월 7일 유럽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이 원폭투하로 인해 전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겠다"는 비핵 3원칙을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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