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은 평일걷기로 동인천역에서 도원역까지 마음 닿는대로 걸었다
걷기 후 확인하니 용동 · 신포동 · 창영동 등을 걸었다
동인천역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할 때는 청과물시장에 「축현역」이 생겼다
1926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역명이 상인천역 · 1955년 동인천역으로 개명했고 · 1957년에 역사를 새로 준공한 후
1989년 오랫동안 정들었던 역사를 허물고 민자 역사를 지으면서 인천백화점이 자리했다
인천백화점이 운영난에 문을 닫고 「엔조이쇼핑」이 다시 재기를 노렸으나 다시 문을 닫고 지금은 새로 리모델링 중이다
노점상
시계밧데리 교환 · 면도기 수리 안내문이 있다
하루 몇 명이나 고치고 교환할지...
동인천역에서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기념관으로 가는 입구에 있다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
1958년, 모두가 전란의 상처를 안고 절대빈곤에 허덕이던 그 시절
열악한 의료환경 속에서 〈이길여 산부인과〉를 열어 인술을 펼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역사의 자리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1층 진료실
기념관은 3층으로 되어있다
용동(龍洞) 큰우물
1883년 인천 개항 무렵 조성된것으로 전해지는 지름 2.15m · 깊이 10m의 우물로
원래는 자연 연못으로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여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인천 시민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광복 후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인천시민의 생활용수로 활용되었다
1996년 6월 12일 인천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우현 고유섭 생가 터 빗돌
우리나라 최초로 철학과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한 고유섭은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별해
어린시절 조부모와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말이 없는 의기소침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3 · 1운동 때는 태극기를 만들어 동네 아이들에게 돌리고
용동 일대에서 만세를 부르며 돌다가 붙잡혀 3일간 구류를 당한 적도 있을 만큼 강한 성격도 있었다
인천학생 6 · 25참전관
1951년 6월 7일 공립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지금의 인천고등학교) 3학년(16세)으로
자원 입대하여 참전한 이경종의 아들 이규원(치과원장)이 세운 인천 학생 · 스승 6 . 25 참전역사기록관이다
학도병 사망자 명단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참전했다 사망한 학생들의 사진과 약력이다
용동권번(龍洞券番)
1901년 5월에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다
인천 출신 기생 중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기생들
대중가요 가수로 스타가 된 이화자와 같은 레코드사 소속의 김일타홍
일본인보다도 일본 노래를 잘 불러 일본 요정으로 단골 출장을 다닌 이화중선
아리랑의 나운규와 사랑에 빠진 영화배우 오향선
중국 군함 함장의 마음을 빼앗아 출항 일정을 수 일 넘기게 한 박미향 등이 있다
*
아래 계단 맨 윗 돌에 '용동권번'이라 새겨져 있다
용동권번(龍洞券番)
일본 유학까지한 인텔리 여배우 복혜숙도 토월회 활동 때 인연을 맺었다
당시 토월회가 인천 공연에 나섰다가 흥행에 실패하자 남자 단원들이 밀린 여관비와 식비를 마련하겠다고
서울로 떠나면서 그를 남겨놓으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이후 복혜숙은 용동권번에서 3년간 생활하며 기생의 권익과 권번 개혁에 앞장섰다
인천흥업주식회사
가천길대학 부속 동인천길병원도 보인다
인천흥업주식회사
건축 연도가 1910년대라는 설과 건축양식이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신청사 · 인천미두취인소 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1930년이라는 설이 있다
인천흥업은 일종의 대부업체였다
천운부동산중개사무소
경인간 최초의 전화 개통지이다
1898년 1월 28일, 인천~한성간 최초로 전화선을 가설하여 1900년 경인간 시외전화가 개통되었다
또 1902년 3월 30일 인천전화소를 설치해 시내전화 업무를 총괄하고 6월 1일에는 인천~한성간 자석식 전화 12회선을 설치해 교환 업무를 개시했다
*
이곳 사거리가 지금은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예전에는 경사가 가팔라서 1913년과 1917년 두 차례 언덕을 깎은 싸리재(丑峴)다
동서대약국
인천기독병원 주변은 한 때 인천의 의료타운이라 할 만큼 십수 개의 개인의원들이 있었다
그 덕에 약국들도 덩달아 문턱이 닳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사람들과 인근 김포 · 강화 · 옹진 섬 주민들이 시내를 방문한 김에 약을 박스로 사가곤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약국이 동서대약국이다
신포시장
개항기 당시 일본인과 중국인 · 서양인에게 고급 채소를 파는 푸성귀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는 쫄면 · 신포우리만두 · 닭강정 등이 생각나는 시장이다
명월집
신문과 텔레비전 등에 맛집으로 많이 소개된 김치찌개백반집이다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각국조계지계단
근대 개항기 인천에 정착하려는 외국인들을 위해 인천항 주변에는 조계지가 들어섰고 응봉산 정상에는 각국공원(지금 자유공원)이 조성되었다
인천제일교회
1946년 10월 19일 14명의 월남한 장로교인들이 서울 영락교회에서 파송한 한병혁 목사를 모시고 창립예배를 드렸고
1950년 2월 1일 신축교회 70평을 기공하여 건축 도중 6 · 25전쟁으로 중단하였다가 수복 후 완공하였다
답동성당 · 인천감리서 터(지금 한진 SKY TOWER)
인천제일교회에서 본 동쪽 방향으로 바로 앞 건물이 인성초등학교다
멀리 송도신도시 빌딩들이 보인다
동남쪽 방향이다
남쪽 인천항 방향이다
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
먼저 「인천학생6 · 25참전관」을 들렸기에 더 느낌이 온다
예전 점집들이 많던 거리로 지금도 여러 곳 남아있다
자유공원에서 제물포고등학교로 내려가는 길이다
오래된 벽돌 굴뚝 근처가 일제강점기에 「후까미양조장」 자리다
광복 후에 「소성주」라는 인천막걸리의 토대가 된 《대화주조》라는 양조장이 있었다
전동떡집
60년 가까이 찹쌀떡만을 만들어온 전통 떡집이다
7~80년대만 하더라도 국회의원 선거 때나 명절 때면 찹쌀떡을 사방으로 퍼날랐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고
찹쌀떡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달렸을 정도였다
지금도 서울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주문이 줄을 잇고 있을 정도라 한다
전동떡집 안내문
미리 주문해야 살 수 있다
빠른 쾌유를 빕니다~!!
동인천 삼치거리
전국구 명성을 얻고 있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뒷길 삼치거리다
이 골목길이 삼치거리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인하의 집」이 지금의 자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삼치와 막걸리를 팔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일명 「똥골」이라 불린 사창가 골목이 넓게 바꿨다
7, 80년대에는 낮이고 밤이고 역 광장에 포주들이 나와 있었다
이 사창가는 그 옛날 용동 기생집에서 일하던 여자들이 흘러 들어오면서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직도 몇 집은 남아있다
한미서점
60년 역사의 배다리 헌책방거리의 책방으로 TVN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다
헌책방 거리는 6 · 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거리에 이동식 리어카 책방이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서울 청계천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헌책방 거리가 형성되었다
스페이스 빔
1920년대 소성주를 만들던 인천양조장 자리다
1920년대 인천에는 한국인 소유 양조장이 14개 · 일본인 소유가 7개가 있었다
1926년에 설립한 인천양조장은 인천 최초의 양조장으로 70여 년간 소성주를 빚었으나
1996년 술맛을 좌우하는 이 일대의 지하수 수질 저하로 청천동으로 이전하고
2003년부터 아벨서점이 전시관으로 활용하다 2007년 스페이스 빔이 자리잡았다
오래 역사의 개코막걸리 · 지성문구사 · 박의상실 · 동성한의원이 있는 길이다
인천 성냥공장
문화극장이 있었던 왼쪽 큰 건물 주위에 조선인촌(주)라는 성냥공장이 있었다
남녀 직공 500여 명이 우록표 · 쌍원표 등 연간 7만 상자의 성냥을 만들어 당시 국내 성냥 소비량의 20%를 점유한 국내 최대 성냥공장이었다
지방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이기도 했다
*
송림산에 터널을 뚫고 길을 낸다고 건물을 철거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농사를 짓는다
마을사진관 다행 · 한점갤러리
예전엔 창에 사진도 많이 붙여 놓았었는데 ...
인천기독사회복지관(유형문화재 제18호)
미국 감리교회가 보낸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이용하기 위하여 1894년에 지어진 건물로
건물의 외형은 간소한 상자형으로 지붕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당시 북유럽양식의 건물이다
또한 조선시대 서원이나 사찰의 승방에서 사용했던 용자(用字)살 창호를 원용하고 가장자리는 교살 등의 문양으로 되어있다
1949년 4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헬렌 보일즈에 의하여 인천기독교사회관으로 다시 창설되었으나
1956년부터는 여자선교사들의 숙소였던 이 건물을 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창영떡집
6 · 25전쟁 후부터 할머니부터 아버지 · 손자까지 이어온 3대 떡집이다
강화 교동에서 생산된 쌀과 찹쌀로 떡을 만든다
콩가루 찹쌀떡
빅터와 1박스씩 사며 하나씩 맛보기로 먹었다
마침점을 도원역으로 한 이유다
도원역
1896년 3월22일, 인천 우각현이란 이름으로 경인철도의 첫 삽을 뜬 곳이다
실제 한국 철도 최초 노선인 《경인선 철도 기공식》을 한 곳은 박문로터리 부근이다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2.6km, 소요시간 3시간 42분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학생 6 · 25참전관 (0) | 2018.01.09 |
---|---|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 (0) | 2018.01.09 |
단원미술관 (0) | 2018.01.08 |
이익 선생 묘 (0) | 2018.01.08 |
알라딘중고서점 연수점 (0) | 2017.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