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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부평향교

고려 인종 5년(1127) 건물 6동으로 부평향교(富平鄕校 인천 유형문화재 제12호)가 처음 설치됐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으로 건물이 소실되자 난 후에 재건하였다
애초에는 전사청 · 공수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또 1921년 명륜당을 중수하는 등 여러 차례 개 ·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한국향교에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대성전과 동 · 서무, 동 · 서재는 맞배지붕 형식 · 명륜당은 팔작지붕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부평향교 외삼문(富平鄕校 外三門)

 

 

 

 

명륜당(明倫堂)
관학교육을 위한 건물로 대성전 앞편에 자리잡고 있다
개 · 보수 중이다

 

 

 

 

동재(東齋)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기숙사 공간이다

 

 

 

 

서재(西齋)
한옥 건물의 작은 방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당시 유생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당시에도 엄격한 규율이 있어 소정의 점수를 획득하여야지만 과거 응시 자격을 주었으며
유생들의 출석과 식사 횟수도 출석점수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내삼문(內三門)

 

 

 

 

대성전(大成殿)
공자를 비롯해 안자 · 증자 · 자사 · 맹자 등의 성인들과 송조 2현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위패가 소실될 것을 염려한 교생 박무영 · 이언복 · 박대충 3명이 위패를 계양산 동굴에 숨겨 안전하게 다시 봉안하였지만
인근의 다른 향교들은 위패가 소실되어 부평향교 것을 본받아 만들어 봉안하였다
이러한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참봉 벼슬을 제수하였다고 전한다
두 번째는 병자호란때 청군이 부평을 통과하면서 도호부와 향교에 불을 질렀다
이에 동지사(同知事) 송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위패를 모시고 나와 공촌동 사저에 보관하였다
난이 끝난 후 숙종 14년(1688) 현 위치에 향교를 재건하면서 위패를 옮겨와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세위(盥洗位)
제향 때 제관이 손을 씻는 자리다

 

 

 

 

동무(東廡)
1949년 전국유림대회의 결정으로 당시 성균관과 각 향교 동 · 서무에 봉안되어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봉양하고 현재 동 · 서무는 비어 있다

 

 

 

 

서무(西廡)
대성전 좌우, 동 · 서무가 마주하고 있다

 

 

 

 

향나무
망료위가 앞에 있다

 

 

 

 

망료위(望燎位)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동재(東齋) · 동무(東廡)
부평향교 밖 동쪽에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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