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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야기

망우산

중랑구 망우동 · 면목동과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망우산(忘憂山 · 281.7m)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토지정리사업을 펼치면서 묘지를 조성해

1933년부터 서울시 안에 있는 유일한 공동묘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망우역사공원에는 망우산숲나들이길이라 명명된의 5.5km의 순환 산책로가 있다

 

 

양원역 2번출구

길 건너 서울둘레길 · 중랑캠핑숲이 있다

시점이다

 

 

 

 

양원숲속도서관

송림길에 있다

 

 

 

 

경의 · 중앙선 터널

 

 

 

송림길 초가 창고

중랑구립잔디운동장을 지난 곳이다

 

 

 

 

망우산 극락사 극락보전

1968년 건립되었다

 

 

 

 

구리둘레길

망우리공원 정류소 개통 안내판이 있다

 

 

 

 

구리둘레길 안내판

4개 코스가 설명되어 있다

 

 

 

망우리고개

서울특별시 · 경기도 경계지점이다

 

 

 

 

소통의 문 · 봉화산

소통의 문은 대문(大門)의 한자인 문(門) 자(字)를 형상화하였다

 

 

 

 

망우역사문화공원 교육전시관

 

 

 

 

권진규 자소상(청동 / 1990년경 사후제작)

이중섭 ·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미술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권진규는 1922년 4월 7일 함흥에서 태어났다

1953년 일본 무사시미술대학 조각과를 졸업하던 해

일본 이과전(二科展)에 석조 〈기사〉를 출품, 특대의 상을 수상하였다

1959년 귀국, 성북구 동선동에 아틀리에를 손수 설계해 짓고 1973년 5월 4일 떠나는 날까지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소상을 만든 예술가이며  〈손〉 · 〈지원의 얼굴〉 · 〈십자가 위 그리스도〉 · 〈불상〉 등이 대표작이다

*

자소상(自塑像)은 본디 1969년 테라코타로 제작되었으며 그의 사후 청동으로 복제되어

2022년 그의 탄생 100주년 및 중랑망우공간의 개소를 기념하여(사)권진규기념사업회가 기증한 작품이다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간

격동적인 근현대사를 살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유명인사 50여 명의 사진과 약력 등이 적혀있다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 ·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

경성부는 1933년 경기도 구리면 망우리에 공동묘지를 개설하고 부내의 공동묘지를 순차적으로 없앴다

이태원공동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이장이 개시되어 1936년 4월 8일 완료되었는데

경성부 위생과는 무연고 묘로 판명된 28,000여 기를 화장하여 망우리공동묘지에 합장 후 위령비를 세웠다

한편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여 일제의 삼엄한 경비 하에

이태원공동묘지에 매장되어 묘비도 없이 지내다가 이태원묘지가 없어지면서 아무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하니

이 합장비는 유관순 열사를 가장 가깝게 추모할 수 있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유관순 열사에게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다시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승격 추서하였다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梨泰院墓地 無緣墳墓合葬碑)

앞면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 · 뒷면 1936년 12월 경성부(京城府)

 

 

 

 

영령(英靈)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1993년 4월 29일 복원공사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 ·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京西老姑山遷骨聚葬碑)

1938년 서울 서쪽 노고산(서강대 뒷산) 공동묘지의 무연고 묘를 합장하고 세운 비석이다

오세창의 글씨다

 

 

 

 

망우리공원 무궁화동산(길)

무궁화는 세계적으로 약 250종, 우리나라에서는 200여 종이 있다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 · 1855~1935)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서 출생

일찍이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읽으며 우두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9년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에서 두 달간 우두법을 배운 후

처갓집인 충주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우두 시술에 성공하고 이후 종두법 보급에 힘썼다

종두법의 도입으로 최초의 서양의학 도입자가 되었으며

1899년에는 관립의학교(서울 의대 전신)의 초대 교장을 지낸 의학계의 선구자이다

의학 외에도 한글과 농학 연구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1883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 대구판관 · 동래부 관찰사 등의 관직도 지냈다

한의사인 부친에 이어 장남 지성주(오른쪽 묘)는 경성의전을 나온 유명한 내과의사였고

손자 지홍창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를 지냈으며

증손자 또한 서울 성내동에서 내과를 경영하고 있어 5대째 의사 가문이기도 하다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 1891~ 1931)

일본 야마나시현 출생. 한국에 먼저 건너온 그의 형 노리다카를 따라

1914년 건너와 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며 한국의 산림녹화에 힘썼고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민예를 수집하고 연구해 「조선의 소반」 · 「조선도자명고」를 출간했다

아사카와 형제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관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들과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 중 급성폐렴으로 타계했는데

당시 이 땅에서 그들만의 사회 속에서 살다 돌아간 대다수의 일본인과는 달리

그는 기독교정신에 근거한 코즈모폴리턴으로 한국말을 하고 한복을 입고

한국인의 이웃으로 살며 진정으로 한국의 마음 속에 살다간 사람이었기에 죽어서도 이 땅에 흙이 됐다

오른쪽의 항아리(청자백자추초문각호) 조각품은 노리다카가 조각하여 1주기 때 세웠다

산림과학원 퇴직자 모임인 홍림회가 당시 선배의 뜻을 이어 묘를 돌보고 있고

최근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크게 부각되어 매해 기일 전후로 한일 양국민이 참석한 추도회가 열리고 있으며

2015년 설립된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는 시대와 민족 · 국경을 초월한 그의 인류애적 삶을 기리고 교육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 1878~1938) 선생 묘역

평남 강서 출생. 평생을 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지도자로 건국훈장 최고의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1895년 구세학당(경신고)에 들어가 기독교인이 되고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평양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약관의 명연설가로 이름을 떨쳤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 향상에 진력하다 을사조약 후 귀국하여

1907년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105인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을 조직했다

3 · 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 · 국무총리서리를 지내며

1919년 9월의 통합임시정부 출범에 크게 공헌했다

1924년 도미하여 흥사단 조직을 강화한 후 1926년 다시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전력하다

1932년 일경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사건으로 재투옥

1938년 병보석 휴양 중 서거했다

유언에 의해 아들처럼 아끼던 유상규 옆에 잠드시고 조카사위 김봉성도 1943년 오른쪽에 묻혀 도산을 모셨으나

도산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이 비석은 원래 1955년에 세워져 이장시에 함께 옮겨졌으나

2005년 도산공원 부인과의 합장 묘 앞에 새 비석이 세워졌기에

서울시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도산기념사업회는 2016년 3월 1일 다시 이곳으로 옮겨 왔다

 

 

 

 

유상규(劉相奎 · 1897~1936)

평북 강계 출생. 경신중학을 거쳐 1916년 경성의전 1기로 입학

1919년 3 · 1운동 때 경성의전문학교 학생으로 학생을 동원하는 등 3 · 1운동의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독립운동 자료조사 및 수집 등 활동을 하였다

1920년에는 안창호의 비서로 근무하였으며, 흥사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권고로 1924년 귀국 후 복학하고 수양동맹회 · 동우회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이후 교육과 치료 및 국민 보건위생 계몽을 하다가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강사로 근무 중 순직했다

 

 

 

 

김봉성(金鳳性 · 1900~1943)

도산의 조카사위(도산의 형인 안치호의 사위)

안치호의 딸 안맥결은 해방 후 경찰관이 되어 서울여자경찰서장(1952)을 지냈다

김봉성은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2년 주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27년에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 수학, 1930년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 1934년 3월 안맥결과 결혼했고

부부는 함께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의 교사로 복무하다 1938년 동우회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김봉성은 1943년 12월 18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딸 자영과 함께 사망해 도산의 오른쪽에 잠들었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2016년 4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했다)

 

 

 

 

이인성(李仁星 · 1912~1950) 묘

대구 출생. 보통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드러낸 그는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하여 비로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제국미술전람회에 불과 19세의 나이에 수채화 〈여름의 어느 날〉로 입선해

24세 때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1935)을 수상했으며

1937년 제16회 선전에서는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나

1950년 불과 38세의 나이로 화려한 일생을 마감했다

《월간미술》(1998년 2월호)은 고인을 근대 유화가 1위로 꼽고

작품 〈경주의 산곡에서〉 · 〈가을 어느 날〉을 각각 공동 1위와 7위로 선정했다

묘 앞의 상석은 무슨 모양일까

 

 

 

 

망우리공원 사잇길 구리(한강)전망대

풍수적으로 이곳 망우리가 배산임수의 명당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고구려 보루 유적이 말해 주듯 한강 유역은 중국과의 교역로이며

땅은 비옥하고 전쟁에 유리한 지형으로 삼국시대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외사산의 좌청룡의 자리로 한양을 병풍처럼 크게 둘러싸며 조선 500년을 지켜왔다

 

 

 

 

망우리의 유래 안내판 · 구리둘레길 안내판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사직을 마려한 뒤

선왕들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현재의 동구릉을 답사하였다

그런데 무학대사는 그 자리가 선왕의 능지보다는 태조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더 적합하고 권고하였다

태조는 그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능지로 결정한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고개 위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자신의 능지로 결정한 곳을 바라보니 과연 명당이었다

이에 태조가 "이제 근심을 잊게 됐다"라고 경탄한 데서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망우산 2보루 유적지 · (망우리공원 사잇길 망우전망대)

망우산 · 용마산 및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고구려 5세기 후반에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기까지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둘레 100~300m 정도의 21개 소규모 보루가 용마산 · 아차산 일대와

3번국도변 남 · 북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 중 17개의 보루(홍련봉 1 · 2보루, 아차산 1 · 2 · 3 · 4 · 5보루, 용마산 1 · 2 · 3 · 4 · 5 · 6 · 7보루, 시루봉보루

망우산 1보루, 수락산보루)는 2004년 10월 27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었으며

구의동 보루 · 망우산 3보루 · 봉화산 보루는 훼손이 심하여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이곳 망우산 2보루는 민묘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현 상태에서는 시굴 및 발굴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며

추후 민묘가 어느 정도 이장되어진 상태에서 정비 및 발굴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봉화산

망우리공원 사잇길 망우전망대에서 봤다

 

 

 

 

오세형가대대지묘(吳世炯家代代之墓) · 오기만(吳基萬 · 1905~1937)

오기만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28년 4월 16일 신간회(新幹會) 배천지회(白川支會) 설립대회 당시 준비위원으로서

홍세혁 등과 함께 격문을 배부하려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유호한인독립운동자연맹(留滬韓人獨立運動者同盟)을 결성하여

민족운동 기념일마다 재류 한인들에게 격문을 반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그해 10월에 옥고 여독으로 순국하신 독립운동가이다

 

 

 

 

오세형가대대지묘(吳世炯家代代之墓)

전생다생(前生多生)에 인연(因緣)있는 우리들이 부모처자(父母妻子)로 금생연(今生緣)을 지어

피를 물려가며 고락(苦樂)을 같이하였으나 때가 이르매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을 알면서도 쫓아갔다

본시( 本是)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무상(無常)을 깨달으니 남아서 슬퍼하는 이들도 백세(百歲)가 차기 전에

같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매 살아 한집에 들었듯이 여기 한 무덤을 지어 代代之墓(대대지묘)로 삼았노라

 

명(銘)

세월(歲月)이 얼마되랴 나도 같이 흙일 것을

그래도 정(情)이로다 앞세우기 이대 섧어

무덤에 풀옷 입히며 눈물 다시 새로워라

계미(癸未) 3월 22일

*

제1대(第一代)

부(夫) 세형(世炯)

처(妻) 인의(仁義)

자(子) 기만(基萬)

 

제2대(第二代)

부(夫) 기영(基永)

처(妻) 명복(明福)

*

오세형가대대지묘(吳世炯家代代之墓) 오른쪽 · 왼쪽에 써있는 글이다

 

 

 

 

사이토 오토사쿠(齊藤音作 · 1866~1936) 빗돌

식목일을 제정하고 미루나무와 아까시나무를 이 땅에 도입하는 등

일제 초기 총독부 산림정책을 담당한 고위 기술관료였다

도쿄대 임학과를 나온 후 농상무성 산림국에 들어가 대만 · 야나마시현을 거쳐

북해도 임정과장으로 재직하던 1909년 대한제국의 농상공부 기사로 부임했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 후 총독부 초대 산림과장이 되었고 1915년 영림창장을 거쳐 1918년 퇴직했으나

한국에 남아 사이토임업사무소를 세워 산림위탁경영 사업을 통한 녹화사업에 전념했다

아직도 그에 대해서는 임업 근대화 및 녹화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함께

산림 수탈의 지휘자라는 비난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그는 칙임관(차관 · 국장급) 이상의 관료로서 이 땅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 되었다

야마나시현 출신의 아사카와 다쿠미는 그의 영향으로 임업계에 투신했고 경성에서도 사제의 정을 이어갔다

이 묘는 봉분없이 비석 아래에 화장된 유골을 묻는 전형적인 일본식 묘의 형태다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 1898~1959)

인천 강화군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여났다

청년 시절 3 · 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다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했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주요 리더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중도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8년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의원으로 활동하고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제 2대 및 3대 대통령 선거에 연이어 2위를 차지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고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다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1959년 7월 31일 사형당하고 이 자리에 묻혔으나

비문이 없는 묘비가 그의 누명을 '침묵의 소리'로 항변하고 있다

마침내 2011년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아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국민의 행복을 앞세우는 이상적인 정치인 상으로 부활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 1879~1944)

충남 홍성 출생. 3 · 1독립선언 불교계 대표로 참가한 후 끝까지 지조를 지킨 최고의 애국자이며 시인이었다

도산 안창호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현재 망우리공원의 유일한 최고훈격인 대한민국장 수여자다

묘비에 적힌 부인 '유씨재우'는 유씨 부인이 만해의 오른쪽에 묻혔다는 의미이다

만해는 불교 진흥을 위해 절은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우리 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며 대처승을 주장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 안타깝게도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미아리 화장장에서 불교식으로 화장된 후 이곳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박희도(朴熙道 · 1889~1951) 묘

황해도 해주 출생.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크게 활약하다

3 · 1운동 때는 기독교계 대표의 영입과 학생들의 참여에 크게 힘쓰고 대표자 중 최연소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 후 최초의 사회주의계 잡지 〈신생활〉을 발간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했으나

러시아혁명 기념 필화사건으로 다시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그 후 중앙보육학교(1928)를 설립, 교장으로 지내는 등

기독교, 교육계의 지도층 인사로 활약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치론의 길을 걸었다

1949년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고 풀려난 후, 육군정훈학교의 출강 외로는 일체의 사회활동을 접고 근신하다

일제 때의 옥고 휴유증으로 1951년 별세해 이곳의 부모님 아래 잠들었다

동생 박희성(1896~1937)은 연희전문 출신으로 광복군 비행장교 1호로서 미국에서 훈련 중 순직했고

2010년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호암 문일평(湖巖 文一平 · 1888~1939) 묘

평북 의주 출생. 1905년 일본 메이지학원에서 공부하고

1908년 귀국하여 대성학교 ·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최남선의 광문회와 안창호 등의 신민회에 참가했다

1911년 정치학 연구를 위해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김성수 · 장덕수 등과 교유하고

1912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동제사에 참여했고

1919년 3월 12일에는 독립청원서를 보신각에서 낭독하며 시위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중동 · 배재 · 중앙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이 되면서부터 언론을 통해

평이한 역사 서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조선심 · 조선학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데 이는 한국학의 대가 이규태 등으로 이어졌다

장남 동표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광복 후에는 편집국장까지 지냈고

조선일보 명예회장 방우영은 호암의 외손서(外孫壻 · 외손녀 남편)이

 

 

 

 

호암 문일평 옛 비석

한문으로 된 옛 비석은 정인보가 짓고 서예사 김승렬이 썼다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 1864~1953)

서울 출신. 부친 오경석은 중국에서 많은 서적을 가져와 개화의 씨앗을 뿌린 역관이었다

위창도 20세에 역관이 되고 1886년 박문국 주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기자를 역임했다

우정국 통신국장 등의 관직을 거쳐 1897년 1년간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개혁당 사건으로 다시 1902년 일본으로 망명 이미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손병희의 참모로 활동하고 3 · 1운동에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대표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손병희 사후 천도교 내부 갈등 속에서 위창은 끝내 일제의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을 견지했다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의원 등의 중책을 맡고

1946년 8월 15일에는 민족대표로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 국쇄를 돌려받고

1949년에는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는 등 별세 때까지 민족의 원로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이곳에는 노고산천골취장비 · 방정환 · 설태희 등의 비문에 글씨를 남겼다

 

 

 

 

망우 · 용마산 등산안내도

 

 

 

 

명온공주 · 부마 김현근(明溫公主 · 駙馬 金賢根) 묘

김현근은 안동 김씨 김상용의 8대손으로 어려서부터 말과 글이 똑똑하여 15세에 부마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부마를 간택하기 위해 순조가 하교하기를

부마를 이제 간택하여야겠으니 15세부터 12세까지는 금혼하고 제외 대상자 이외는 단자를 받아들이도록 하라 하여

5월 22일 17명의 후보 중 초간택 8명, 25일 재간택 3명

6월 2일 세 번째 간택에 진사 김한순의 아들 김현근으로 정하였고 동녕위에 봉작한 후 결혼은 7월 17일 거행되었다

그러나 명온공주는 병을 얻어 1832년(순조 32) 2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김현근은 그 후로도 중국 사신 · 판의금부사 등을 지내며 임금을 보필하다가 고종 5년(1868)에 별세했다

고종은 명온공주의 오빠 효명세자(익종 추존)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기에

고종에게 명온공주는 고모요 김현근은 고모부가 된다

이 묘는 원래 종암리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앞쪽에 있다가 1936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조선 후기 양식을 보여주는 장명등의 불탄 모습이나

상석 위에 새겨진 영문 이름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후에 벌어진 〈망우리전투〉의 흔적이다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 1899~1931) 묘

서울 당주동 출생.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소파는 어린이에게 나라의 미래를 걸고 어린이 운동에 온 생애를 바쳤다

죽음을 앞두고도 "어린이를 잘 부탁한다"며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 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라는

말을 마치고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소파 방정환 빗돌

동심여선(童心如仙 · 어린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지묘(小波 方定煥之墓)

기해 10월 7일 생 신미 7월 23일 영면(己亥 十月 七日生 辛未 七月 二三日 永眠)

수 33세(壽 三十三歲)

 

 

 

 

소파 방정환 빗돌 뒷면

동무들이

*

원래 홍제동 화장터에 있던 소파의 유골은 1936년 후배 최신복 등이 나선 모금 운동으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무덤은 쑥돌로 만들어졌고 비석의 글씨는 오세창이 썼다

위창은 손병희를 도와 3 · 1운동 33인에 참여했고 소파는 손병희의 셋째 사위이다

소파와 함께 개벽사에서 〈어린이〉 잡지를 만들었던 최신복은 수원에 선산이 있었음에도

자신의 부모를 소파 바로 밑에 모셨고 자신도 후에 아내와 함께 그 아래에 묻혀 생전의 인연을 지금도 잇고 있다

 

 

 

 

망우묘역의 독립운동가 안내판

이 길은 '구리둘레길' 코스이기도 하다

 

 

 

 

노필(盧泌 · 1927~1966) 묘

서울 화동 출생. 경기중학을 졸업하고 연세대 국문과를 다니다 〈안창남 비행사〉(1949)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40세로 생의 막을 내릴 때까지 17년간 30여 편을 만들었다

비교적 양심적인 작품활동을 고집한 그는 주로 음악영화나 멜로물을 만들었다

감독으로서는 모험과도 같은 제작에 직접 손을 대어 유작이 된 〈밤하늘의 부르스〉(1966)는 

대외적으로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는 세 달 후 많은 빚더미에 몰려

당시 영화계의 구조적인 모순과 불운한 자신의 삶을 향해 마지막 컷을 외쳤다

그를 비롯한 많은 영화계 선배들의 비참한 삶이 지금 세계적 한국 영화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그 누가 의심하리

영화의 마지막에 나온 노래는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되었다

"적막이 스미는 밤하늘에 / 트럼펫 메아리 퍼지네 / 내사랑 그대 고이 잠자라

저 멀리 떨어진 그대 / 포근히 잠들어라..."

 

 

 

 

남파 박찬익(南坡 朴賛翊 · 1884~1949)

경기도 파주 출생.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무오독립선언 39인으로 활동했다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법무부장으로 조완구와 함께 백범 김구의 좌우 측근으로 활동했고

광복 후에도 중국에 남아 주화대표단장으로 활약하다 병을 얻어 1948년 귀국 요양하였으나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동지들이 효창공원에 모시고자 했으나 본인은 '무성입토'를 원해 서민의 묘지인 이곳에 조용히 잠들었다

1993년에 국립묘지로 이장되었으나 남은 비석의 문화재적 가치는 크다

작은 비석은 1949년에 세워진 것이고 큰 비석은 아들 박준영이 세웠는데 시인 조지훈이 짓고 서예가 최중길이 썼다

자신의 이름을 팔며 공을 사로 이용하는 이들이 설치는 세상 속에서 비문의 마지막 문장은

진정한 애국지사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그리고 우리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큰 비석은 2008년 여름에 태풍으로 쓰러져 동강난 상태로 있었던 것을 2014년 관리사무소가 복원했다

 

 

 

 

물탱크실 · 화장실

 

 

 

 

산신제단

면목동 남촌마을(응달말)의 산신제를 지내는 곳으로 사색의 길 삼거리를 조금 지나쳐서 있다

 

 

 

 

용마산자락길 안내판

 

 

 

 

망우리공원 사잇길 중랑전망대

 

 

 

 

봉화산 · 수락산 · 불암산

 

 

 

 

봉화산

 

 

 

 

배봉산 · 봉화산

 

 

 

 

서해 최학송(曙海 崔鶴松 · 1901 ~ 1932)

함북 성진 출신. 극심한 가난으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한때는 북간도지방에서 방랑생활도 했다

1924년 단편 〈고국〉이 《조선문단》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고

 〈탈출기〉(1925) ·  〈홍염〉(1927) 등 실제로 겪은 고난의 체험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썼는데

그 내용은 당시 문인들의 기존 소설과는 차별화되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중외일보 기자와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지냈으나 여전히 가난 속에서 32세의 젊은 나이에 위문협착증으로 사망했다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후 미아리공동묘지에 묻혔으나

그 후 온 가족이 함경도 회령으로 떠났기에 묘를 돌볼 유족이 없었고

1958년 김광섭 등의 문인들에 의해 망우리로 이장되었으나 여전히 돌볼 이 없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정종배 시인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묘를 돌보고 있다

둘레길 길가의 문학비는 우리문학기림회가 2004년 세운 것이고

2015년부터 최학송기념사업회가 7월 9일의 기일 전후에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국민강녕탑

용마산 · 아차산 지킴이로 수십 년간 산속 쓰레기를 주워온

83세 최고학(1927년생) 옹이 국민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쌓은 돌탑이다

 

 

 

 

중랑둘레길 방향안내판

 

 

 

 

이중섭(李仲燮 · 1901~1932)

꽃을 꽂을 수 있는 구멍과 두 아이의 노는 모습이 새겨진 작은 비석이 있다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면 좌측이 동락천약수터고 우측이 묘소다

 

 

 

 

오재영(吳哉泳 · 1897~1948)

부산 출생. 1919년 비밀결사 혈성단에 가입하였다

오재영은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경고문 배포, 중국 상해임시정부와 연락 등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9월 14일 의열단 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중상을 입혔는데

오재영은 박재혁이 상해에서 가져온 폭탄 한 개를 맡아 두었다가 그가 거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8월 3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받았다

묘비에는 본명인 오준영으로 표기되어 있다

 

 

 

 

망우약천

 

 

 

 

중랑둘레길 방향안내판

 

 

 

 

금란교회 버스정류장

마침점이다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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