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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야기

상당산성

상당산성(사적 제212호)은 둘레 4,2km · 내부면적 727,276㎡에 달하는 포곡식 석성이다
상당이라는 명칭은 백제 때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남문 밖에서 발견된 옛 기와의 명문을 통해 통일신라의 서원경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충청도 군사책임자인 병마절도사는 청주읍성에 있었으며 그 배후인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대략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속되어 산성의 유지와 보수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부터 영조 23년(1747)까지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이 때 성벽 축조는 물론 성내에 구룡사 및 남악사와 장대사의 3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어 있으며
관아 건물과 장대 · 포루 · 창고 등이 완성되어 면모를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보수되었다
현재 상당산성은 동문 · 서문 · 남문의 3개 문과 동암문 · 남암문의 2개 암문 · 치성 3개소 · 수구 3개소가 남아 있다

상당산성 저수지 수문이 보인다

 

 

상당산성 저수지

 

 

보화정(輔和亭 동장대)
조선시대 후기에는 상당산성을 수축하여 충청도 병마우후가 항상 주둔하여 지키는 곳이 되었는데
지휘소는 장대는 서장대와 동장대가 있어 서로 마주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이 건물과 관련된 1747년(영조 23)에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필구가 지은 보화정기의 글이 남아있다

 

 

보화정(輔和亭) 현판

 

 

선도산
성곽을 걸으며 봤다

 

 

상당산성
성벽의 높이는 약 3~4m로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네모지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았고
그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쌓아 다지는 내탁 공법을 사용했다

 

 

진동문으로 가는 길이다

 

 

진동문(鎭東門)
상당산성 동문이다

 

 

진동문(鎭東門)
동북암문으로 가다 돌아봤다

 

 

동북암문으로 가는 길이다

 

 

상당산성 동북암문
상당산성에는 서남암문과 이곳 동북암문이 있다
상당산성 북쪽 성벽에는 성문이 없고 동쪽 성벽에는 수문과 동문이 비교적 낮은 위치에 있다
성의 안쪽과 바깥으로 통하는 능선이 남쪽으로 이어진 곳에 서남암문이 있듯이 동북쪽의 능선으로 이어진 위치에 동북암문을 만들었다
이 암문은 동북 방향의 산줄기를 따라 드나드는 곳일 뿐만 아니라
동문 밖 골짜기로 모여드는 적군의 뒤로 나가서 적을 에워쌀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마련되었다
규모는 정면의 너비 약 137cm · 높이 162cm이고 안쪽에서 문짝을 닫고 빗장을 질러 막는 구조다

 

 

청주국제공항
가운데 긴 활주로가 보인다

 

 

두타산
청주국제공항 오른쪽이다

 

 

동림산
청주국제공항 왼쪽이다

 

 

상당산성 북쪽 수구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거나 내보내는 시설을 수문이라고 하며, 규모가 작은 것을 수구라고 한다
상당산성에는 물을 내보내기 위한 배수 장치로 남문과 동문 사이에 수문이 설치되어 성 안의 많은 물을 내보냈으나
수문으로 몰려들지 않는 곳의 물을 내보내기 위해 서쪽 성벽 두 곳과 북쪽 성벽 한 곳에 수구를 만들었다
북쪽 성벽의 수구는 북쪽 성벽이 작은 계곡물을 모아 내보낼 위치에 성벽 중간을 통과하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성벽 안쪽으로 모여든 물이 모아져 나가는 물길을 만들고 물이 성벽 바깥으로 나가는 배수로는 성벽 속으로 도랑을 낸 것이다
*
북쪽 수구 안내판이 왼쪽에 보인다

 

 

포루 터로 오르는 길이다

 

 

상당산성 포루 터
포루는 성벽 안쪽에서 밖을 향하여 화포를 발사하기 위해 방어하기 좋은 곳에 만든 군사시설이다
건물을 지어 만든 집 모양을 한 것을 포루라 하고 성벽에 포혈을 만들고 화포를 배치한 것을 포대라 한다
상당산성에는 15곳에 포루를 만들었는데, 평균 대략 240m 간격으로 하나씩 둔 셈이었다
그림으로 그려진 「상당산성도」에는 대략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만큼 2칸 혹은 3칸 규모의 작은 기와지붕의 건물로 표시되어 있다
승려 영휴가 지은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1725년(영조 1)에 포루를 지었다고 하였다
지금 성벽을 따라 돌다보면 밖의 계곡을 향한 관찰이 쉬운 곳 여러 곳에서 기와조각이 발견되는 곳이 있어 포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북쪽 성벽에서 발굴 조사가 확인된 포루는 정면 2칸 · 측면 1칸 규모의 건물 기초가 남아 있다

 

 

상당산성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미호문으로 가는 길이다

 

 

청주시 방향이다

 

 

미호문(弭虎門)
서문으로 조선 후기에 새로 다시 쌓아졌다
동문처럼 서문은 아래 위 2개의 무사석 위에 장대석을 올려 평문 구조로 만들어졌다
상당산성의 3개 문 중에 가장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성 밖으로 좌우에 성벽을 돌출 시켜 방어에 유리하도록 옹벽을 만들고 문안에서 왼쪽으로 휘어 돌아 문루에 오르게 하였다
이런 형식은 암문에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서문에 활용된 까닭은 비용을 줄이고 전술 효과를 늘리는 것에 있다
1978년 복원된 이후, 문루여담 · 육축구간 면석 · 선단석이 이완 또는 기울어짐에 따라
문화재 전문가의 자문과 고증을 거쳐 성벽 · 자연석 미석 · 여장하부 1단 등을 2014년 10월부터 2015년 6월까지 해체하여 보수공사했다
옛 서문의 위치는 미호문 밖 38m 떨어진 곳에 있다

 

 

미호문(弭虎門) 현판

 

 

상당산성 미호문(서문 弭虎門)
서문은 조선 후기 대대적으로 고쳐쌓으면서 새로 만들어졌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땅 모양이 호랑이가 뛰기 전 움추린 모양으로
호랑이가 떠나면 땅기운이 다하므로 호랑이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성문을 세우고 미호문이라 하였다
이는 서문의 위치가 산성을 기준으로 우백호에 해당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상당산성 서남암문으로 가는 길이다

 

 

청주시 방향이다

 

 

청주시내로 갈 수 있는 계단이다

 

 

망산 · 우암산
청주시내에서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있다

 

 

상당산성 서남암문 위쪽이다

 

 

상당산성 서남암문
암문이란 몰래 드나드는 작은 사잇문이다
성벽의 바깥 산 아래에서 드나드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는 곳에 만든다
암문의 응급적인 방어력을 높여 위급하다고 판단되면 곧장 폐쇄할 수 있도록 문의 안쪽에 흙더미와 돌을 쌓아두기도 하였다
암문의 규모는 너비 약 166cm · 높이 약 172cm이고, 구조로 보아 문짝을 닫고 빗장을 질러 문을 닫도록 되어 있다
*
한남금북정맥 안내판이 옆에 있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갈라져 나와 충청북도 북부를 동서로 가르며 안성의 칠장산까지 이어져 한강과 금강의 분수산맥을 이루며
서북쪽으로 감포 문수산까지의 한남정맥과 서남쪽으로 태안반도 안흥까지의 금북정맥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상당산성 치성
치성의 치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본다는 뜻에서 이런 명칭이 생겼다
치성은 전술상 평지 성문의 좌우 혹은 성벽이 곧게 뻗은 부분에 주로 설치되었다

 

 

무장간첩 김동식이 공작장비를 발굴했던 자리 안내판
상당산성 치성 옆이다

 

 

공남문(남문 控南門)
청주가 백제시대 상당현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는 원래 삼국시대부터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 성을 신라 김유신의 전적지인 낭비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치성
공남문(남문) 윗쪽에 있다

 

 

공남문(남문 控南門)
남문의 문루는 1977년 복원되었다

 

 

남문 천정 주작(朱雀)
동방의 동서남북 각 방위 및 4계절을 상징하는 사방신(四方神 · 四神)의 하나다

 

 

공남문(남문) 아래 잔디밭

 

 

공남문(남문 控南門)
홍예문 좌우에 공사관계자 각자가 있다

 

 

남문 성문 왼쪽 성벽
당시의 공사관계자들의 이름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다

 

 

남문 성문 오른쪽 성벽에도 있다

 

 

구룡사 사적비
상당산성 안에 있었던 구룡사의 역사를 알리기 위하여 조선 영조 40년(1764)에 은재거사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써서 세운 사적비다
비문에는 숙종 46년(1720)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태망과 우후 홍서일이 군영의 건물을 신축하고 연못을 축조할 때
도천 스님이 구룡사를 창건하였으며 영조 19년(1743)에 극락보전을 완성하였다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숙종 42년(1716)에 절도사 유성추가 상당산성을 개축하고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다는 등의
산성 관련 내용들이 보여 상당산성과 구룡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구룡사는 이미 없어지고 그 터에 남아 있던 사적비만 남문 앞에 옮겨져 있다
비의 형태는 낮은 받침돌 위에 높이 133cm · 폭 56cm의 비석 위에 한옥 모양의 지붕돌을 얹었다

 

 

상당산성 저수지
성안에는 전통주와 빈대떡 · 묵밥 등을 파는 전통한옥마을이 있다

 

 

상당산성 수문지 발굴유구
상당산성 수문을 구성했던 석재들이다
수문 자리에서는 석축유구 · 측벽시설 · 배수유도 석축과 다수의 수문을 구성했던 다듬은 석재와 성돌이 확인되었다
이 일대에 상당산성의 수문은 있었지만 이미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만들어진 수구는 특별히 고안된 구조로 축조되었다 하며 남은 석재들로 보아 2층 구조의 수문이었다고 추측된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4.1km, 2시간 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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