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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이야기

박열

인생이 어차피 죽음을 향해 홀로 걸어가는 길이라면

그 길에서 자신의 뜻을 펴보고, 그 뜻을 함께 할 사람이 있다면 죽음을 향한 길이라도 웃으며 갈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박열을 보고 느낀 생각이다

*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때문에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도 좋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재판관에게도 말한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한다

설령 재판관들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결코 혼자 죽게 하지는 않겠다" 

*

1926년 2월 27일

박열과 함께 대역죄 및 폭발물단속벌칙 위반혐의로 재판정에 섰던 가네코 후미코가 낭독한 《26일 밤》이라는 수기의 한 구절이다

 

 

영화 《박열》은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열과 그의 애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가네코 후미코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도쿄의 인력거꾼으로 일하며 핍박 속에 살아가던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이제훈 분)은

다른 조선 동지들과 함께 이른바 '사회주의 오뎅집'이라는 아지트에서 폭탄테러 투쟁계획을 벌이고 있었다

 

 

 

 

박열의 시 「개새끼」

그는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체의 당위와 가치를 부정하고 오직 자신의 이해에 의해서만 행동한다

그리고 서로의 안전과 상호 부조를 위해 이웃과 결성한 자발적 연합이 정부조직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단체를 결성하여 위험한 투쟁을 계속한다

그렇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일본인의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여 민중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조선청년」지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로소이다》를 읽고 감명받은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그를 직접 찾아가 같이 동거하며 투쟁하자는 제안을 하고 둘은 동거 계약을 맺게 된다

 

 

 

 

'동지로서 동거한다'라는 동거서약

동거서약서에 지장 찍은 손을 들어보이고 있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1923년 9월 1일, 간토 전역을 뒤흔드는 대지진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일본 내각은 흉흉한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조선인의 폭동사건을 조작한다

당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는 일본 정부의 내부 결속을 위해 외부에 적을 만드는 정책을 쓰게 된다

그 일환으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을 퍼트린다

 

 

 

 

그리고 국가 주요시설에 폭탄을 던지려 한다는 소문을 알게 된 정부가 표적이 될만한 인물로 박열을 선정한다

물론 박열은 폭탄 밀반입을 계획하긴 했었다

 

 

 

 

결국 박열은 치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다

박열은 영웅이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시나리오의 희생자다

하지만 박열은 권력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사용하는 사법체계를 이용해

역으로 숨겨진 조선인 학살사건을 공론화하는 발언무대로 삼아 권력을 공격하기로 계획한다

 

 

 

 

박열과 후미코는 형무소로 연행되어 검사의 취조를 받다가 폭탄 입수 계획이 발각되자

이를 두고 미치노미야 황태자에게 폭탄을 날리려 했다고 고의로 자백한다

반역죄로 기소된 두 사람은 황당한 조건을 내세우며 당당한 태도로 재판에 임한다

 

 

 

 

박열은 공판에 앞서 4가지를 요구한다

1. 죄인 취급하지 말것

2.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3. 조선 관복을 입을 것

4. 법정에서 조선어를 사용한다

 

 

 

 

박열은 자신은 민족을 대표해서 나왔으며 일본 판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재판 받기를 원한다며

우리 조선의 관복을 입고 재판을 받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신문보도

법정에서 태연 포옹, 감방에서 양인 동거 등이 실려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영화 재현 장면이다

실제 박열과 후미코가 사형 당하기 전 부모님께 전달하기 위한 마지막 사진을 찍는다며 일본인 검사에게 부탁해 만든 사진이다

검사의 배려로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가족이여야만 상대 시신을 받을 수 있어 감방 안에서 결혼한다

그후 감방에서 의문사한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고향 문경에 묻혔다

영화에선 박열의 애를 갖어 죽임을 당했다는 일설도 소개된다

 

 

 

 

 

1926년 2월 27일, 「26일 밤」이라는 수기의 한 구절을 낭독하는 가네코 후미코

이처럼 일본인 아내로부터 강철 같은 믿음과 사랑을 받았던 박열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독특한 빛깔을 띠고 있는 인물이다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둘은 사형을 선고 받지만 1주일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법정에서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둘은 각각 치바형무소와 도치키형무소로 옮겨졌으며

가네코는 옥중에서 자신의 생각과 수기를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으로 펴냈다

하지만 돌연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박열의 형이 가네코의 유골을 인수하여 박열 고향 문경에 안장했다. 그녀의 나이 23세였다

이후 박열은 광복 이후 10월 27일, 22년 2개월만에 석방되었고, 1950년 한국동란 중 납북되어, 1974년 평양에서 72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이후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당시 법정 사진

 

 

 

 

이준익 감독은 지난 2000년 영화 '아나키스트'를 제작하면서 진행한 자료 조사에서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열이라는 인물을 처음 접하고 큰 매력을 느꼈다고 언급했다

 이후 야마다 쇼지가 쓴 '가네코 후미코 평전'을 기반으로, 아사히신문 · 산케이신문 등 일본 주요 언론사에

실제 박열과 후미코가 받았던 재판 관련 기사들을 요청해가며 자료조사를 진행했다

이준익 감독은 이처럼 고증에 신경을 쓴 이유에 대해서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오락적 재미를 더하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가치관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관객들이 이 영화를 봤을 때 신빙성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며

"고증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과 부당성을 이성과 논리를 통해 돌파해내는 인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열의 순제작비 총 26억 원으로 저예산영화다

 그러나 이는 이준익 감독이 의도한 것으로 박열과 후미코의 이야기가 화려한 볼거리를 자랑하는 작품이 아니라 인물 각각의 진정성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지진이 일어나는 모습을 규모있게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주인공 내면에 접근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영화 촬영은 6주 동안 총 24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영화의 주된 배경은 일본 도쿄이지만 로케이션 촬영은 단 한차례도 진행되지 않았다

*

7월 장마로 걷기를 여러 번 쉬는 바람에 영화 두 편을 봤다

그 중 한 편을 뜸한 포스팅이 미안해 올려본다

이곳 사진과 글은 인터넷에서 얻어온 것들로 난 배열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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