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병자호란으로 기억되어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던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축성하고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日長城)이라 불렀다
제1회 대한민국 희극인의 날 핸드프린팅
2009년 11월 11일 성남시 남한산성 유원지 놀이마당 입구에서 핸드프린팅 제막식이 열렸다
*
남한산성입구역이 시점이다
배삼룡 핸드프린팅
남보원 · 백남봉 핸드프린팅
백련사계곡
돌탑
백련사 계단
남한산성 남문 지화문(至和門)
성곽 사면의 토양 유실 방지 및 차폐 목적으로 느티나무(나이 380여 년)를 심었다
지화문(至和門)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4대문 중 제일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
지화문 동쪽 방향이다
영춘정으로 오르다 본 지화문 방향이다
영춘정이 있는 462고지 방향이다
영춘정(迎春亭)
일명 팔각정(八角亭)이라고도 하는 데 지화문(남문) 아래 있던 것을 옮겨으며
현 위치에서 서울 경기지방 일대를 관망할 수 있다
영춘정(迎春亭) 빗돌
수어장대를 오르며 본 성곽 바깥과 안길이다
성곽 안쪽 아랫 길이다
연무의식
일요일 11시 30분 · 12시 30분 · 13시 30분에 지화문에서 출발 수어장대까지 행진한다
암문
수어장대 바로 밑이다
암문
바깥 쪽이 안쪽보다 좁다
안에선 못 팔게 하는지 바로 옆에 막걸리 장사가 있다
성곽
성곽 높이 3~7.5m · 둘레가 11.76km이다
암문으로 나와 봤다
연무의식
수어장대 연무의식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있는 수어장대는 지휘 및 관측을 위해 지은 누각으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 군대와 45일 간 대항하고 싸운 곳으로 성내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탁지부 측량소 삼각점( 度支部 測量所 三角點) /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7호
대한제국 말기(1908~1910년 초) 탁지부에서 토지 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건국 이래 최초로 경기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지적세부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일제히 삼각점을 설치하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하여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을 「구소삼각점(舊小三角點」이라고 불렀다
탁지부 측량소 삼각점(구 소삼각점) 탁지부 각자(度支部 刻字)
이곳 남한산성 도립공원의 수어장대에 설치되어 있는 구소삼각점은 「장대(將坮」라고 불리며
머리 부분에 「+」자가 새겨져 있고 모서리에는 탁지부(度支部)라고 음각되어 있다
탁지부에서 설치한 구소삼각점은 현재 전국에 10여 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적사(地籍史)적 측면으로 볼 때 매우 귀중한 유물로써
삼각점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귀중하면 작은 울타리라도 만들었으면 한다
청량당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부분을 책임지고 공사를 하다가 공사 경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이회(李晦)와 이 소식을 듣고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부인 송씨와 소실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이회는 누명을 쓰고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회가 죽으려는 순간 과연 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사형 당하는 장면을 쳐다 보았다 한다
이회가 죽은 후 공사비 횡령사건이 다시 조사되었는데 조사 결과 그가 한 공사는 모두 충실하게 축조되었고
공사비를 횡령한 사실도 없음이 밝혀지자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뜻으로 초상을 안치해 두었는데
6 · 25전쟁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 이후에 만든 것이다
사당은 정면 3칸 · 측면 2칸으로 홑처마에 팔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산성소락(山城小樂)
숲을 걷는데 들리는 "He is my destiny. I will follow him"
다가갔다
수어장대에서 우익문으로 가다 만난 귀여운 호랑이 깃발
용맹하고 신령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는 데 무얼 의미 하는진 모르겠다
남한산성
성곽 안 길은 평탄하지만 밖은 구불구불하고 높낮이도 있다
병암(屛岩)
정조 때 산성 우익문(서문) 근처가 파괴된 것을 이 곳 주민들이 자진하여 보수하였으므로
당시 부윤이 찬양하는 글을 이 암석에 기록하였으며 이 글을 지은 이는 서명응이다
우익문(서문)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항복할 때 통과했던 문이다
성 안에서 보니 밖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걷는다
우익문(서문)
매탄처(埋炭處)
병자년 추위 속에 혹독한 전쟁을 치른 후 유사시 쓰기 위해 숯을 묻어 두었던 곳이다
남한지에는 숯을 가마니에 담아서 묻은 곳이 94개소에 24,192석이라 하였고
전주사부터 북장대까지 94개소의 위치와 묻은 숯의 양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매탄처(埋炭處) 빗돌
연주봉 옹성(連珠峰甕城)
이 옹성은 원성(元城)과 연주봉을 연결하고 있는데 둘레는 274m에 73개의 여장(女墻)이 있었다
이 옹성은 암문을 통하여 성내를 출입할 수 있으며 봉수(烽燧)나 망루의 소임을 한 듯한 원형의 석축인 시설물의 잔해가 4~5단 정조 남아있다
연주봉 옹성(連珠峰甕城) 빗돌
전승문(북문)으로 가다 만난 노송지대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군락지답게 오래된 소나무가 많다
북장대지(北將臺址)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북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장대라 불린다
북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 단층 누각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남한산성의 장대는 18세기 초에 붕괴되었고 18세기 중엽에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수축하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노송지대 진달래
전승문(북문)
남한산성에는 동 · 서 · 남 · 북 4개의 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전승문이라 한 것은 그 때의 전투를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내에 동문 · 남문 · 수구문 총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만해기념관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것을 믿습니다"
계단 중간 쯤에 있는 게시판에 써있다
입장료 2,000원이다
당신이 아니라면 / 한용운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 뜻대로 하세요
저는 곧 당신이어요
남한산성 비석군
역대 광주유수 및 수어사 · 부윤 · 군수의 비로서 재직시 백성을 정성스레 돌봐 치정을 잘했거나 사랑을 베풀어 선정한 분들에게
백성들이 그들을 추념하여 세운 비로서 광주유수 ·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의 비를 포함 30기의 비가 있다
*
만해기념관에서 지화문으로 가다 있다
남한산성 남문 지화문(至和門)
지화문에서 성곽을 끼고 전승문(북문)까지 천천히 걸었다
다시 전승문에서 자하문으로 올 때는 중앙 도로로 오며 만해기념관과 비석군을 보고 왔다
*
덧글
산성을 돌아 보고 의문이 생겼다
지하문(남문) 앞 게시판
인조임금이 47일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라 써있다
또 성남 보호수인 느티나무는 5주라 써있고...?
불과 몇 미터 옆 게시판엔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그리고 수어장대 게시판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45일간 항전했다고...???
*
1636년 12월 15일부터 항전하여
1637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항전은 45일간 · 보호수는 4주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