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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2실

조선2실은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유교 사회화와 통치 체제 정비가 마무리되었던

15세기 말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때 공을 세운 훈구(勳舊) 대신 세력이 더욱 커져갔다

이들을 견제하고자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성리학과 윤리 규범을 중시하는 사림(士林)을 등용했다

주로 언론직을 맡았던 사림은 훈구파와 대립하다가 물러났으나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 다시 정계에 등장하여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켰다

사림은 군주도 신하처럼 ‘치인(治人)’을 위한 ‘수기(修己)’에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군주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대의와 명분을 내세우며 여론을 활용한 사림 정치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즉위 후 학문과 정치 견해에 따라 무리를 지어 토론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전개되었다

 

 

조선(朝鮮) 1392 - 1897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1910

 

 

 

 

조선(朝鮮) 1392 - 1897

14세기 말 고려(高麗 · 918 - 1392)는 내적으로는 왕권이 흔들리고

외적으로는 원(元 · 1271 - 1368)에서 명(明 · 1368 - 1644)으로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대부(士大夫)와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로 대표되는 무인세력이 1392년 7월 18일 조선을 세웠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斥佛) · 존명사대(尊明事大) · 중농주의(重農主義)를 국가경영 원칙으로 삼고 이를 지키며 500여 년 존속했다

이는 왕과 사대부가 성리학(性理學)을 기반으로 어진 마음과 바른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왕도(王道)정치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선은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제도의 변화를 모색하여 유교 질서 체제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조선의 역사는 세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

15세기에는 성리학 이념을 반영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했고, 16세기에는 사림(士林)이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고 성리학 이론이 정교해졌다

1592년 일본과, 1636년 청과 전쟁을 치른 후 17세기는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노력한 시기였다

17세기 후반에는 개혁적인 조세 제도인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화폐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된다

18세기는 탕평 정책을 펼쳤고 문예가 부흥한 시기이다

그러나 19세기는 동서 문명이 충돌하는 전환기로 조선은 서양의 개방 요구에 직면했다

기존 체제의 유지와 서구 문물의 수용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개항과 변화의 길을 선택했다

 

 

 

 

조선의 국호

동방의 해뜨는 나라, 조선(居東表日出之地 故名 朝鮮)

1392년 7월 새 왕조를 개창할 때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겠다고 했으나 11월 29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 국호를 올렸다

고려 공민왕 (恭愍王 재위 1351 - 1374) 이래로 외교 문서에 조선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 올린 이유는 새 나라가 고조선(古朝鮮)의 계승자라는 위상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듬해 2월 국호가 조선으로 정해졌다

 

 

 

 

조선 연표

 

 

 

 

조선의 왕

조선시대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약 19년이다

재위 기간이 제일 긴 조선의 왕은 제 21대 영조로 재위 기간은 51년 7개월이다

두 번째로 긴 왕은 제19대 숙종으로 재위 기간은 45년 10개월이다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은 제12대 인종으로 재위기간  8개월이다

 

 

 

 

16세기(연산군 - 중종 - 인종 - 명종 - 선조) 사림의 성장과 유교 사회화

통치 체제 정비가 마무리되었던 15세기 말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때 공을 세운 훈구(勳舊) 대신 세력이 더욱 커져갔다

이들을 견제하고자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성리학과 윤리 규범을 중시하는 사림(士林)을 등용했다

주로 언론직을 맡았던 사림은 훈구파와 대립하다가 물러났으나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 다시 정계에 등장하여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켰다

사림은 군주도 신하처럼 ‘치인(治人)’을 위한 ‘수기(修己)’에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군주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대의와 명분을 내세우며 여론을 활용한 사림 정치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즉위 후 학문과 정치 견해에 따라 무리를 지어 토론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전개되었다

 

 

 

 

중국과의 외교

중국이 조공(朝貢)을 바치는 주변국에 그 나라와 왕가의 정통성을 인정해주는 책봉(冊封) 체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간이었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사대(事大) 외교 질서 아래에서 외교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국가 통치의 자율권을 행사했다

정기적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문화 교류와 함께 공적인 무역을 했다

*

명나라 사행

조선은 지속적으로 명(明)에 사신을 파견했다

1392년(태조 원년)부터 1494년(성종 25)까지 평균 6-7차례 사행을 갔다사행단의 주요 임무는 외교문제 해결과 조공품의 진상이다

사행단은 정사 · 부사 · 서장관과 역관 · 의원 · 화원 등의 인원 30명과 수행원을 포함해서 대략 70-250명으로 구성되었다

*

청나라 사행

사행단 구성과 사행로는 명나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규모가 조금 늘어났다

사행 인원은 정식 인원 30-40명을 포함해서 200-300명 정도였다. 사행 기간은 총 5개월로 북경에서는 1-2개원 정조 체류했다

청나라 때는 사신들이 북경에서 보다 자요롭게 다닐 수 있어서

공식 일정이 없으면 만리장성 · 국자감 · 천주당 그리고 서적과 물화가 집결되어 있던 유리창(琉璃窓)에도 가 볼 수 있었다

청 학자와는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행단 숙소에서 무역이 이루어져서 17세기 역관들은 인삼 8포(2,400근)씩을 무역자금으로 가져갔고

이후 은 2,000냥을 가져갈 수 있었다

*

육로와 해로 사행

중국에 갈 때는 육로와 해로를 모두 이용했다

육로로 북경에 갈 때는 한성에서부터 약 3천 1백리(약 1,217km)였고 오가는 데 50~60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명의 수도가 남경에 있었던 14세기 말과 요동과 요서 지역에 분쟁이 있었던 17세기 전반에는 배를 타고 가야 했다

바다를 건너갈 때는 1천여 석의 식량 · 4백여 명의 노를 젓는 군사가 필요할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들고 이동 거리도 5천 6백 60리(약 2,223km)에 달했다

 

 

 

 

육로사행 · 해로사행

 

 

 

 

소화외사(小華外史) / 오경원(吳慶元 · 1764-?) · 조선 1830년(순조 30) 간행

고려 말부터 1824년(순조 24)까지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기록한 책이다

범례에서 조선을 「소중화(小中華 · 작은 중국)」로 보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태도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본편은 명나라와의 대외관계에 대한 내용으로 사신 파견을 비롯해 임진왜란 · 병자호란 때의 외교관계 등을 자세히 서술했고

속편에는 왜란 때 온 명나라 지휘관의 명단이 있다

별편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가 이미 멸망한 지 60년이 되는 1주갑(一周甲) 기념일에 제례를 지내기 위해

숙종이 대보단(大報壇)을 만들고 행했던 제례와 각종 행사의 절차를 기록했다

 

 

 

 

동의보감(東醫寶鑑) / 허준(1539-1615) · 조선 1610년(광해군 2)

임진왜란으로 많은 의서사 사라지자 선조(재위 1567-1608)가 허준에게 의서를 짓도록 명했다

이 책은 병의 치료보다 예방에 우선을 두고 편찬되었으며, 중국과 조선 의학의 핵심 정리와 도설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중국과의 외교

중국이 조공(朝貢)을 바치는 주변국에 그 나라와 왕가의 정통성을 인정해주는 책봉(冊封) 체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간이었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사대(事大) 외교 질서 아래에서 외교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국가 통치의 자율권을 행사했다

정기적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문화 교류와 함께 공적인 무역을 했다

*

명나라 사행

조선은 지속적으로 명(明)에 사신을 파견했다

1392년(태조 원년)부터 1494년(성종 25)까지 평균 6-7차례 사행을 갔다사행단의 주요 임무는 외교문제 해결과 조공품의 진상이다

사행단은 정사 · 부사 · 서장관과 역관 · 의원 · 화원 등의 인원 30명과 수행원을 포함해서 대략 70-250명으로 구성되었다

*

청나라 사행

사행단 구성과 사행로는 명나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규모가 조금 늘어났다

사행 인원은 정식 인원 30-40명을 포함해서 200-300명 정도였다. 사행 기간은 총 5개월로 북경에서는 1-2개원 정조 체류했다

청나라 때는 사신들이 북경에서 보다 자요롭게 다닐 수 있어서

공식 일정이 없으면 만리장성 · 국자감 · 천주당 그리고 서적과 물화가 집결되어 있던 유리창(琉璃窓)에도 가 볼 수 있었다

청 학자와는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행단 숙소에서 무역이 이루어져서 17세기 역관들은 인삼 8포(2,400근)씩을 무역자금으로 가져갔고

이후 은 2,000냥을 가져갈 수 있었다

*

육로와 해로 사행

중국에 갈 때는 육로와 해로를 모두 이용했다

육로로 북경에 갈 때는 한성에서부터 약 3천1백리(약 1,217km)였고 오가는 데 50~60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명의 수도가 남경에 있었던 14세기 말과 요동과 요서 지역에 분쟁이 있었던 17세기 전반에는 배를 타고 가야 했다

바다를 건너갈 때는 1천여 석의 식량 · 4백여 명의 노를 젓는 군사가 필요할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들고 이동 거리도 5천6백 60리(약 2,223km)에 달했다

 

 

 

 

일본과의 외교

조선은 일본 류큐(琉球) 등과의 외교를 교린(交隣)이라 했다

조선은 이들에 대해 강격책과 회유책을 병행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후 복잡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일본을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 포로를 조선으로 데려오고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했다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여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문화 교류를 이어갔다

 

 

 

 

임진왜란 / 1592-1598

1592년(선조 24) 4월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일본이 명을 정벌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음에도 조선 조정은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군은 실전 경험이 많고 신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을 저지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전란을 대비했던 이순신(1545-1598)과 수군은 해전에서 승리했고, 의병이 곳곳에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1593년 명이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1596년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고 1598년에서야 전쟁이 끝났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인구가 크게 줄고 농지가 감소하는 국가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 · 정유재란 연표

 

 

 

 

주요전투 · 군사력 비교

 

 

 

 

청군이 한성 도착까지 걸린 시간 6일

 

 

 

 

병자호란 / 1636-1637

임진왜란으로 명의 요동 지역 통제가 약화되자 여진족은 힘을 키워 청(淸)을 세웠다

청은 스스로 황제국이라 칭하며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은 오랑캐와 화의할 수 없다며 그 요구를 묵살했다

1636년(인조 14) 12월 청 태종(太宗)은 12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쳐들어왔다

인조(재위 1623-1649)는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그곳에서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당시 조선 관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청과 화의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斥和派)로 나뉘어 논쟁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청에 항복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사대(事大)의 대상을 명에서 청으로 바꾸어야 했다

 

 

 

 

삼학사전(三學士傳) / 조선 17세기 이후 · 송시열

삼학사전은 1671년(현종 12)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이 편찬한 삼학사의 전기이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이듬해 심양(瀋陽)으로 잡혀가 죽은

홍익한(洪翼漢 1586-1637) · 윤집(尹集 1606-1637) · 오달제(吳達濟 1609-1637)를 말한다

이 책에는 삼학사가 보인 불굴의 저항 정신과 비극적 최후가 묘사되어 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재위 1649-1659)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추진하는 한편

순절한 인물을 현창하고 그 후손을 등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척화신과 순절자에 대한 추모와 현창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전쟁의 기억을 재생산하였다

 

 

 

 

삼학사(三學士)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이듬해 심양(瀋陽)으로 잡혀가 죽은

홍익한(洪翼漢 1586-1637) · 윤집(尹集 1606-1637) · 오달제(吳達濟 1609-1637)를 말한다

 

 

 

 

조총 · 비격진천 · 삼안총 · 승자총통 · 현자총통 · 화살

 

 

 

 

조총 · 비격진천뢰

조총(鳥銃)은 포르투칼 사람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화승총(火繩銃)의 일종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한 주력화기이다

날아가는 새도 맞출 수 있다고 하여 조총이라고 이름 지었을 만큼 매우 우수한 개인 화기였다

임진왜란으로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이후 조총의 제조기술을 확보하고 개량하여 부력무기화하였다

*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임진왜란 직전에 화포장 이장손(火砲匠 李長孫)이 발명한 폭탄이다

폭발할 때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난다고 해서 진천뢰라고도 불렀다

폭탄 안에 뇌관에 해당하는 목곡(木斛)을 넣어 화약을 터뜨려 안에 있던 쇳조각이 사방으로 퍼지는 원리이다

목곡에 감는 도화선의 길이에 따라 폭파 시간 조절이 가능한 일종의 시한 폭탄이다1592년 9월 경주읍성 탈환에 처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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