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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1실

조선 창업 후 100여 년 동안, 조선은 건국의 정당성과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성리학 이념에 따라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조선은 행정 · 의례 · 군사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태종(太宗 · 재위 1400-1418) 때 이룩한 강력한 왕권과 정치 · 사회적 안정에 힘입어

세종(世宗 재위 1418-1450)부터 성종(成宗 재위 1469-1494)까지 통치의 근거가 되는 법전 · 의례서 · 지리서 · 역사서 등을 편찬할 수 있었다

이는 오랜 시간 동안 국왕과 신하가 함께 이루어낸 성과였다

 

 

조선(朝鮮) 1392 - 1897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1910

 

 

 

 

조선 · 대한제국실

 

 

 

 

조선(朝鮮) 1392 - 1897

14세기 말 고려(高麗 · 918 - 1392)는 내적으로는 왕권이 흔들리고

외적으로는 원(元 · 1271 - 1368)에서 명(明 · 1368 - 1644)으로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대부(士大夫)와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로 대표되는 무인세력이 1392년 7월 18일 조선을 세웠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斥佛) · 존명사대(尊明事大) · 중농주의(重農主義)를 국가경영 원칙으로 삼고 이를 지키며 500여 년 존속했다

이는 왕과 사대부가 성리학(性理學)을 기반으로 어진 마음과 바른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왕도(王道)정치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선은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제도의 변화를 모색하여 유교 질서 체제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조선의 역사는 세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

15세기에는 성리학 이념을 반영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했고, 16세기에는 사림(士林)이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고 성리학 이론이 정교해졌다

1592년 일본과, 1636년 청과 전쟁을 치른 후 17세기는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노력한 시기였다

17세기 후반에는 개혁적인 조세 제도인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화폐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된다

18세기는 탕평 정책을 펼쳤고 문예가 부흥한 시기이다

그러나 19세기는 동서 문명이 충돌하는 전환기로 조선은 서양의 개방 요구에 직면했다

기존 체제의 유지와 서구 문물의 수용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개항과 변화의 길을 선택했다

 

 

 

 

조선의 국호

동방의 해뜨는 나라, 조선(居東表日出之地 故名 朝鮮)

1392년 7월 새 왕조를 개창할 때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겠다고 했으나 11월 29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 국호를 올렸다

고려 공민왕 (恭愍王 재위 1351 - 1374) 이래로 외교 문서에 조선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 올린 이유는 새 나라가 고조선(古朝鮮)의 계승자라는 위상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듬해 2월 국호가 조선으로 정해졌다

 

 

 

 

조선 연표

 

 

 

 

조선의 왕

조선시대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약 19년이다

재위 기간이 제일 긴 조선의 왕은 제 21대 영조로 재위 기간은 51년 7개월이다

두 번째로 긴 왕은 제19대 숙종으로 재위 기간은 45년 10개월이다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은 제12대 인종으로 재위기간  8개월이다

 

 

 

 

태조 어진(太祖 御眞 · 조중묵(趙重默 19세기 활동 등) · 조선 1872년(고종 9) 원본 복제품

태조 어진은 익선관(翼善冠)과 아청색 곤룡포(袞龍袍) 차림이다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는 붉은 색이 일반적이나 붉은 색 곤룡포는 세종(世宗 재위 1418 - 1450) 때 명나라에서 사여받은 후에 착용했다

세종 이전의 왕들은 고려의 유습에 따라 〈태조 어진〉처럼 아청색 곤룡포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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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왕이나 황제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황제는 다섯 발톱 용 문양을, 왕은 네 발톱 용 문양을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태조 어진〉처럼 왕의 지위에 있던 조선의 왕과 관련된 문양으로 다섯 발톱의 용을 사용한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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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의 초상화를 조선시대에는 모두 26차례 제작하여 보존에 힘썼으나 현재 전주시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던 초상화만 전하고 있다

경기전 초상화는 1409년(태종 9) 경주 집경전(集慶殿)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1410년 전주에 봉안했는데

1763년(영조 39) 한 차례 수리를 거친 후 1872년(고종 9)에 다시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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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국초부터 창업자 태조의 위상에 맞게 서울을 비롯하여

이성계와 관련이 있는 영흥 · 평양 · 개성 · 경주 · 전주 지역에 전각을 세우고 태조 어진을 모셨다

어진을 봉안하여 통치 영역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있다

 

 

 

 

근정전 어좌(勤政殿 御座)

경복궁 근정전 내부 중앙에 화려하게 장식된 닫집과 왕이 앉는 어좌가 놓여 있다

어좌 뒤에는 태양, 달, 다섯 개의 산 봉우리, 소나무를 그린 일월오봉(日月五峯) 병풍을 설치했다

왕이 공식적으로 머무는 공간에 이 병풍을 설치하여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권을 상징했다

근정전과 닫집 천장은 용 문양으로 장식하여 왕의 위엄을 높였다

 

 

 

 

15세기(태종 - 세종 - 문종 - 단종 - 세조 - 예종 - 성종 - 연산군) 통치 체제의 정비

조선 창업 후 100여 년 동안, 건국의 정당성과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성리학 이념에 따라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조선은 행정 · 의례 · 군사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태종(太宗 재위 1400 - 1418) 때 이룩한 강력한 왕권과 정치 · 사회적 안정에 힘입어 세종(世宗 재위 1418 - 1450)부터

성종(成宗 재위 1469 - 1494)까지 통치의 근거가 되는 법전 · 의례서 · 지리서 · 역사서 등을 편찬할 수 있었다

이는 오랜 시간 동안 국왕과 신하가 함께 이루어낸 성과였다

이처럼 국가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데에는 전문가들이 모여 충분히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 조선 1402년(태종 2)

김사형(金士衡 · 1341-1407) · 이무(李茂 · 1355-1409) · 이회(李薈 · ?-?) / 조선 1402년(태종 2) 원본의 15세기 사본을 복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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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元) 나라 때 제작된 세계 지도에 조선과 일본을 덧붙여 만든 것으로 동아시아에서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다

조선과 중국을 실제 크기보다 크게 표현했다. 중국과 함께 조선도 문화대국임을 표방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삼봉 선생집(三峰先生集) / 정도전 · 조선 1465년(세조 11)

개국공신 삼봉 정조전은 성리학을 유일한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

권근(權近 · 1352-1409)과 더불어 조선 초기의 문물 · 제도를 정비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사상가로서 중요한 인물이므로 이 문집은 조선의 건국이념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진충귀 개국원종공신녹권(陳忠貴開國原從功臣錄券) / 조선 1395년(태조 4)

이 녹권은 의주목사를 지낸 진충귀(陳忠貴 · ?-1412)에게 발급한 것으로 가로 634cm에 이른다

진충귀에게 논밭과 노비를 하사하고 그의 부모와 처에게 작위를 내리며

자손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에 오를 수 있게 해주고, 비를 세워 공로를 기록하는 등의 예우를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끝머리에는 공신도감 · 이조 등 녹권을 발급하는데 관련된 임원 15명의 직위와 이름이 적혀 있고, 10명의 이름 및 수결(서명)이 있다

공신에게는 각각 밭 30결 · 노비 3명을 상으로 주고, 부모와 처에게 작위를 내리도록 하며

그 자손들에게는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벼슬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교시를 내렸다

 

 

 

 

경국대전(經國大典) / 조선 1485년(성종 16) 초간 · 1661년(현종 2) 재간행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명으로 편찬하기 시작하여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때 완성된 법전으로

조선의 정치 · 경제 · 문화 · 군사 등 여러 분야의 법규를 포괄적으로 수록했다

의정부와 6조가 중심이 되고 전국 8도에 수령을 파견하는 통치체제와 성리학적 종법 질서에 관한 규정들이 명시되어 있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조선 1474년 초간

통치 이념을 반영하여 국가 의례를 정비하는 작업이 통치 체제 정비의 완성 단계이다

다섯 가지 국가 의례의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를 간행했고 이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참고 사항을 정리하여 도판도 수록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

 

 

 

 

상준(象尊) / 분청사기 · 조선 15-16세기 · 희준(犧尊) / 백자 · 조선 15-16세기

준(尊)은 제사 때 술이나 물을 담았던 제기(祭器)이다

조선 초 상준과 희준은 코끼리와 소 문양이 있는 그릇 형태였으나 성종(成宗) 때 「국조오례의서례」가 간행된 이후

수록된 도판의 모습대로 코끼리와 소의 형상을 본뜬 제기가 제작되었다

국가의례에서는 금속제기를 사용했으나 지방 향교에서 지내는 소규모 제례에서는 점차 도자기를 사용하였다

 

 

 

 

통치 체제 기반 마련

법전 · 의례서 · 지리서 · 역사서를 편찬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선 1485년(성종 16) 초간 · 1661년(현종 2) 재간행

1481년(성종 12)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전국을 양경(兩京) 8도로 나누고

각 도의 역사 · 지리와 풍속 · 물산 · 인물 정보에 문사(文士)들의 시문(詩文)을 첨가한 인문 지리서이다

1530년(중종 25)에 「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하여 책을 간행했는데

기존 내용을 기술한 뒤 새로 증보된 내용을 각 항목의 끝에 「신증(新增)」이라고 밝히며 덧붙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 / 조선 1485년(성종 16) 초간 · 재간행 시기 미상

조선왕조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최초의 통사(通史)이다. 1458년(세조 4)에 편찬을 시작하여 1485년(성종 16)에 완성하였다

세조(재위 1455-1468)는 조선 이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목적으로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역사 전체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 통사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세조대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1484년(성종 15)에 완성했다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이듬해인 1485년에 편찬자들의 사론(史論)을 붙여 새롭게 편찬한 것이다

 

 

 

 

효령대군 수막새 · 천순경진 암막새 · 천순경진 수막새

회암사 보광전 터에서 출토된 기와 중에 「옴마니반메훔」의 옴자가 있고

주변에 효령대군(孝寧大君) 아래에 「선덕갑인오월(宣德甲寅五月)」 글자가 있는 수막새다

효령대군(1396-1486)은 세종의 둘째 형으로 대표적인 친불교적 왕실 인사이다

이 수막새의 글자로 인해 그가 선덕 연간(1426-1435) 갑인년인 1434년(세종 16) 5월에 기와 제작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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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국가의 친불교 정책

조선은 국초부터 불교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쳤으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불교 신앙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왕실도 계속 불교를 후원했다

태조 · 세조 등은 친불교 성향의 군주였고, 특히 세종은 배불(排佛) 정책과 호불(好佛) 정책을 적절히 시행하며

불교의 인적 · 물적 자원을 국가 사업에 활용하였다

16세기에는 사림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면서 불교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의병으로 활약하고 전란 이후 사회적인 요구가 커지면서 불교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조선 국왕(朝鮮國王)〉 글자가 있는 금탁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은 회암사(檜巖寺) 보광전에 매달았던 전체 높이가 31.7cm나 되는 규모가 큰 풍경으로 회암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풍경에는 13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에서 풍경을 「금탁(金鐸)」으로 지칭했기에 이 풍경을 금탁으로 부른다

금탁 상단 표면에 「왕사 묘엄존자」 · 조선국왕 · 왕현비 · 세자(妙嚴尊者 · 朝鮮國王 · 王顯妃 · 世子)라는 글자가 테두리에

조선이 만세토록 전해질 것을 발원한 내용과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조선 왕실과 사찰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국왕은 태조 이성계 · 왕현비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 · 세자는 이방석(李芳碩)이다

왕사(王師) 묘엄존자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이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도 승려를 임금의 스승으로 두는 고려의 왕사 제도를 유지했고 왕실 인사들이 불교 관련 활동을 지속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한글 창제 원리

세종은 1443년(세종 25) 한글을 창제했다

우리의 말이 중국과 다르다고 인식하여 우리에게 맞는 문자를 만든 것이다

한글은 획기적인 발명품이며 세계 문자 중 만든 사람과 반포 시기 · 창제 원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글자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조선 1447년(세종 29)

태조(太祖)의 4대조와 태조 · 태종(太宗)까지 6대의 행적과 조선의 건국 과정 및 관련 설화 등을 담은 장편 서사시이다

총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글로 지은 본문 뒤에 한문으로 주석을 달았다

한글을 사용하여 처음으로 지은 글로, 15세기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세종(재위 1418-1450)의 명으로 간행했으며 권제(權踶 1387-1445) 등이 편찬에 참여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조선 1849년(헌종 15)

본받을 만한 역대 왕의 선정을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 세종 편에 세종(재위 1418-1450)의 업적으로 훈민정음 창제 관련 내용을 수록했다

세종은 일반 백성이 글자를 몰라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훈민정음을 1443년 만들어서 1446년 반포하였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고유어의 표기 수단을 만든다는 실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바른 소리를 가르친다는 목적도 있었다

훈민정음은 유교와 불교 서적의 번역 · 「농사직설(農事直說)」과 같은 실용서 · 「내훈(內訓)」 같은 교화서(敎化書) 등의 편찬에 활용되었다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 조선 1461년(세조 7)

세조(재위 1455-1468)가 번역하고 1461년(세조 7)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했다

온전한 불교 경전 중 가장 먼저 언해(諺解)한 것으로 15세기 국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자로 된 본문은 1455년(세조 1)에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글씨체로 만든 을해자(乙亥字)로 찍었다

함께 사용한 한글활자는 「을해자와 함께 쓴 한글활자」 또는 「을해자 병용(竝用) 한글활자」라고 하며 「능엄경언해」에 처음 사용하여 「능엄한글자」라고도 한다

이 활자는 「능엄경언해」를 간행한 1461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30여 자가 남아 있다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이다

 

 

 

 

편경(編磬) · 궁중 음악 아악의 기준음

국가 제례 음악인 아악(雅樂)을 정리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게 악기를 제작하는 일은 국가 권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아악에 사용하는 편경은 돌로 만든 악기로 온도에 따라 형태가 변하지 않으므로 음의 기준이 된다

건국 초기에는 편경을 쇠나 흙으로 만들었기에 음을 제대로 조율할 수 없었다

1430년(세종 12) 경기 남양(南陽 지금의 화성 남양동)에서 발견한 경석(磬石)으로 편경을 제작했다

 

 

 

 

앙부일구(仰釜日晷 · 해시계) / 조선 19세기 말

세종 때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앙부일구는 모두 1654년 시헌력(時憲曆) 시행 이후에 제작된 해시계이다

이 앙부일구 테두리에 「북극고삼십칠도삼십구분일십오초(北極高三十七度三十九分一十五秒)」라고 적혀 있어서

1713년(숙종 39) 한양의 북극 고도가 37도 39분 15초임을 실측으로 알게 된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휴대용 앙부일구(携帶用 仰釜日晷) / 강건(姜湕 1843-1909) · 조선 1871년(고종 8)

소형 해시계와 나침반

이 앙부일구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사용할 수 있도록 작게 제작된 것이다

지남침을 활용해 방향을 맞추고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앙부일구에는 24절기를 나타내는 13개의 계절선과 30분 간격의 시각선이 새겨져 있다

바닥면에 「동치 신미년(1871) 맹하(4월) 하순에 진산인 강건이 만들었다(同治辛未孟夏下澣 晉山人 姜湕製)」라고 적혀 있다

 

 

 

 

조선통보(조선 최초의 동전) · 저울추(저울 정비 및 보급)

건국 초에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를 사용했으나 가치가 떨어지자 만든 동전이 조선통보(朝鮮通寶)이다

조선통보 10푼의 무게는 1냥(兩 · 약 40g)이었다. 구리 1근을 조선통보 1백 60푼으로 교환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한시적으로 유통되는 데 그쳤다

조선통보(조선 1423년(세종 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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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을 통일하는 일은 국가를 통치하는 데 중요하다

세종 때 새 저울을 만들어 보급하고 정비했다

1427년(세종 9) 공조(工曹)에서 제작한 이 저울추에 '근'과 '냥'이라는 무게 단위가 표시되어 있다

1근(약 641g)은 16냥이다

 

 

 

 

삼총통 / 조선 15세기

세종은 화약 무기를 개량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이 시기에 여러 총통을 새로 만들어 실전에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총통은 탄환이 아니라 화살을 발사했다

당시 화포 내부에 강선이 없어서 포탄은 포 안에서 자유운동을 하면서 날아가기 때문에 정확성이 매우 떨어졌다

반면에 화살을 재워 쏘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삼총통의 사정거리는 약 960m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무기를 개량하여 4군 6진을 설치했다. 4군과 6진의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북쪽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조선 전기 조세 제도

조선 전기 조세 제도는 조 · 용 · 조이다

조(租)는 토지에 부과하여 쌀과 콩을 거두는 방식 · 용(庸)은 성인 남자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이며 · 조(調)는 고을에 따라 특산물을 거두는 제도이다

세종은 공평한 토지세 정책 수립을 위해 1430년 5개월 동안 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71,806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찬성이 57%로 나왔으나 반대도 많았다는 이유에서 꾸준히 세법을 가다듬어

1444년에 토지 비옥도와 풍흉에 따라 구분하는 전분6등제와 연분9등제를 시행하였다

 

 

 

 

장흥고 · 인수부 글자가 있는 분청사기 / 15세기 공납용 자기

조 · 용 · 조 제도에 따라 각 지역에서는 특산물을 왕실과 관청에 납품했다

15세기 중반까지 지방에서 도자기를 납품했다. 지역과 관청 이름이 새겨져 있는 분청사기가 그러한 예이다

특히 지역으로는 경주 · 군위 · 영천 · 밀양 등 경상도가, 관청으로는 장흥고(長興庫)와 인수부(仁壽府)가 많다

그릇에 관청 이름을 새긴 이유는 장흥고에서 다른 관청에서 사용할 그릇을 나누어 주고

행사가 끝난 뒤 다시 거둬들이는 일을 담당했는데 반납 비율이 1/5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1417년(태종 17)에 관청에 납품할 사기와 나무 그릇에 관청 이름을 새기도록 명을 내렸다

 

 

 

 

세종의 민본 정치

세종(재위 1418-1450)은 조선시대에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의 업적에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民本) 사상과 우리 풍토에 맞는 문물을 만들겠다는 현실 인식이 담겨 있다

세종은 백성이 쉽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측우기 · 물시계 · 해시계를 고안했다

또한 우리나라에 맞는 역법서를 만들고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수합했다

그리고 여론을 조사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조세 정책을 만들었다

세종은 신분에 관계 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신권(臣權)과 왕권(王權)의 조화를 중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업적을 세울 수 있었다

세종은 인사와 군사분야에서는 이조와 병조의 직계(直啓)를 용인하고

나머지는 신하들에게 맡기는 의정부 서사제(暑事制)를 실시하여 신하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 진정으로 힘이 있는 왕이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조선 1849년(헌종 15)

역대 왕의 본받을 만한 업적을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에는 세종대왕의 업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왕실 연구기관인 집현전을 개편하여 유능한 학자를 육성하였고 우리말을 과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또한 과학기술이 나라의 기틀이라 생각하여 측우기 · 해시계 ·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국토 확장에도 힘써 남쪽으로는 왜구를 격퇴하고 북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백성들의 교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소학(小學) / 조선 1876년(고종 16)

1187년 주희의 제자 유자징에 의해 편찬되었다

이후 어린 학동이 성리학 기초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가 된 소학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 격언 · 충신이나 효자의 이야기 등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유학의 도덕규범을 담고 있다

특히 조광조(趙光祖 · 1482-1519) · 김안국(金安國 · 1478-1543) 등의 사림은 소학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김안국은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小學諺解)」를 간행하기도 했다

 

 

 

 

가례(嘉禮 ) / 주희(朱熹 · 朱子 · 1130-1200)

송나라 성리학자 주희가 관혼상제(冠婚喪祭) 관련 각종 의례와 실천규범을 정해 놓은 책으로

그림을 넣어서 예의 원리 · 의복 제도 · 기물의 모습을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말 주자 성리학을 신봉한 사대부들이 이 책을 도입하여 유교식 상장례(喪葬禮)를 널리 보급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서는 조상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가묘(家廟)를 세우고 불교적 의식에서 벗어나 유교적 예의범절의 실천을 중시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조선 1726년 이후 간행

삼강(三綱)은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 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綱) ·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세종의 명으로 삼강의 실천에 모범이 될만한 사례를 뽑아 1434년(세종 16)에 「삼강행실도」를 편찬했다

세종대에 분량을 줄인 산정본(刪定本)과 한글 언해본이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보급되어 유교 윤리전파에 활용되었다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 이황(李滉 1501-1570)

기대승이 사단(四端) · 칠정(七情)을 이(理)와 기(氣)로 나누는 것을 그르다고 한 변론에 부기하다

*

퇴계선생 문집 권12 서(書) 수록

다만 자사와 맹자가 입각하여 말한 것이 같이 않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뿐이고, 칠정 밖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만일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므로 선 · 악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와 기가 뚜렸이 두 가지가 되는 것이니, 그러면 칠정은 성(性)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은 기(氣)를 타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말 뜻에 병통이 없지 않아 후학(後學)의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일 "사단이 발하는 것은 순리(純理)이므로 선이 아님이 없고, 칠정을 발하는 것은 기를 겸하므로 선 · 악이 있다"라고 고친다면

비록 전설(前說)보다는 조금 나은 듯하나 나의 의견으로는 역시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대개 성(性)이 발하는 순간에는 기(氣)가 용사(用事)되지 않음으로 본연의 선이 곧장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사단이란 것입니다

 

 

 

 

수표(水標) / 복제

수표는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물의 높이를 재는 측량기구로 조선 세종 때 한강변과 청계천에 처음 만들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쉽게 썩는 단점이 있어서 나중에 돌로 만들었다

현재 남아있는 수표는 영조 때 다시 만든 것으로 청계천 수표교 앞에 세웠다

1960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수표교와 함께 장충단공원에 옮겼다가 1973년 다시 세종대왕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돌기둥에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고, 3 · 6 · 9척이 되는 곳에 'o'을 새겨 각각 갈수(渴水 가뭄) · 평수(平水 보통) · 대수(大水 홍수)의 기준으로 삼았다

 

 

 

 

측우기(測雨器)

비가 온 양을 재는 기구로서 세종 23년(1441)에 당시 세자인 문종에 의해 창안되어 세종 24년(1442)까지 과학기술자들이 제작한 세계 최초의 우량계이다

쇠를 부어 만들었으며, 서울은 서운관에 설치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헌종 3년(1837)에 제작한 측우기(보물 제531호) 1기와 측우대 5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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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측우기인 금영측우기를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금영은 공주에 있던 충청 감영의 다른 이름이다

실제 금영측우기는 1915년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반환받아 현재는 기상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

측우기 가운데 새겨져 있는 〈錦營 · 測雨器 · 高一尺五寸 · 徑七寸 · 道光丁酉製 · 重十一斤〉의 글자 뜻은

금영 · 측우기 · 고일척오촌 / 높이 1척5촌(약 31.05cm) · 경칠촌 / 지름 7촌(약 14.49cm)

도광정유제 / 도광(청나라 연호) 정유년(1837) 제작 · 중십일근 / 무게 11근(6.2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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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바닥에 새겨져 있는 〈入番 · 通引 及唱 · 次知 使令〉의 글자 뜻은

입번(차례로 숙직을 섬) · 통인(지방 관아의 하급관리), 급창(사내 종) · 차지(하인), 사령(관아에서 심부름 하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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