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여주 영월공원

영월공원은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리 남한강변에 있다

영월공원은 공원 내에 영월루(迎月樓 · 경기도 문화재자료 37호)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공원에는 여주 창리삼층석탑(보물 제91호) · 여주 하리삼층석탑(보물 제92호) · 현충탑 · 영세불망비군 등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월루에서 내려다 보는 주변 자연 경관이 멋진 곳이다

*

명성황후 생가 · 영릉(英陵) 등이 월요일 휴무라 가까운 영월공원을 찾았다

 

 

감고당(感古堂)

조선 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 속에서 물러났다가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살았다

명성황후(1851~1895)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고종 3) 왕비로 간택 · 책봉되기 전까지 머물렀다

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感古堂)」이란 편액을 하사한 후부터다

원래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던 여주시가 현재 위치로 이전 · 건축했다

여러 차례 수리하고 이전하면서 감고당의 본래 모습이 변형됐지만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구조 형태를 보여준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 사적 제195호)과 제17대 효종대왕의 영릉(寧陵) 앞에 위치하고 있다

2017년 5월 15일 개관하여 3개의 상설전시실 · 영상실 · 카페 ·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여주 하리삼층석탑(驪州 下里 三層石塔) / 보물 92호 · 여주 창리삼층석탑(驪州 倉里 三層石塔) / 보물 91호

왼쪽 여주 하리삼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되며, 본래 여주읍 하리(지금의 하동)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1단의 기단 위에 탑신 3층을 쌓았다

기단은 판석 4장을 세워서 조립한 뒤 그 위에 갑석을 덮어 만들었으며, 기단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갑석 중앙부의 1층 몸돌을 올릴 위치에는 3단의 턱이 있다

옆에 있는 여주창리삼층석탑과 다르게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서로 다른 돌로 되어 있다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얕게 새겨져 있고, 지붕돌 아랫부분에 새겨진 지붕받침은 4단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붕의 경사가 매우 완만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귀퉁이 끝부분이 위로 약하게 솟아 있다

1층 몸돌의 높이가 너비보다 높고, 다른 돌들도 다소 길쭉한 편이어서 탑의 전체적인 형태도 길쭉해 보인다

돌을 짜서 올리는 수법에는 규칙성을 있으나, 전체적인 비율이나 돌의 다듬새는 평범하다

1층 몸돌과 지붕돌 사이에는 독특한 모습의 사리공(舍利孔)이 있다

1층 몸돌 윗면 중앙에 높이 3cm의 얇은 띠가 둘려 있는데, 그 안쪽으로 난 2개의 구멍과 닿는 지붕돌의 밑면을 깊이 파내어 공간을 만든 뒤 덮어 놓았다

일반적으로 몸돌의 윗면에 깊이 홈을 파서 공간을 만든 뒤에 사리를 모시고 지붕돌을 덮는 데 비해

이 석탑은 정반대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여 주목된다

 

 

 

 

여주 창리삼층석탑(驪州 倉里 三層石塔) / 보물 91호

여주 창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되며, 본래 창리(지금의 창동)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2중 기단 위에 탑신 3층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옆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연꽃을 엎어 놓은 듯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서 탑의 기단을 불상을 올려놓는 연꽃대좌와 비슷하게 꾸미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탑신부에서 몸돌의 모서리 기둥은 보이지 않는다

1층의 몸돌은 지붕돌과 분리되어 있으나 그 위 지붕돌부터는 위층의 몸돌과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즉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 ·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 · 3층 지붕돌과 노반(露盤)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또한 지붕돌 아랫부분에 새겨진 지붕받침은 모두 3단씩 표현되어 있다

지붕의 경사가 매우 완만하며, 처마는 두껍고 수평을 이루다가 귀퉁이 끝부분이 살짝 들려 있다

신라시대 석탑에 비해 투박한 점, 지붕돌의 받침이 5단이 아닌 3단인 점

지붕돌과 몸돌을 하나의 돌로 만든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판단된다

 

 

 

 

여주 현충탑(顯忠塔)

조국의 자유 수호와 평화를 위하여 공산 침략자와 싸우다가 전사하신 해군 중령 고 장남섭외 957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9년 6월 6일 여주군민의 뜻을 담은 성금으로 제막되었고, 1981년 4월 탑 기단부를 설치하는 등 보강사업을 실시하였고

2004년 11월 군민의 염원을 모아 재건립에 착공 2005년 5월 준공되었다

 

 

 

 

영세불망비군(永世不忘碑群)

 

 

 

 

영의정 홍순목 만세불망비(領議政 洪淳穆 萬世不忘碑)

조선 고종 9년(1872. 10) 영의정으로 임명된 홍순목(1816~1884)이 고향(금사면)인 여주에 선정을 베풀어 이를 잊지 않기 위하여 1884년 세운 비이다

*

여주목사 홍만식 · 초대 우정국총판 홍영식의 아버지다

 

 

 

 

홍만식 영세불망비(洪萬植 永世不忘碑)

조선 고종 12년(1875. 7) 여주목사로 부임한 홍만식(1842~1905)이 선정을 베풀어 이를 기리기 위하여 1877년에 세운 비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음독자살하여 순국하였다

*

아버지(父) 영의정 홍순목 · 아우(弟) 초대 우정국총판 홍영식이다

 

 

 

 

애민선정비군(愛民善政碑群)

 

 

 

 

마감산 · 여강(驪江)

신륵사 다층석탑이 왼쪽 봉미산 기슭에 있다

선정비에서 영월루로 가는 길에서 봤다

 

 

 

 

영월루(迎月樓)

원래는 군청 정문이였으나, 1925년 당시 군수 신현태가 군청사를 옮기면서 마암으로 옮겼는데 여강과 함께 여주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이곳 영월루 아래에는 깎아 세운듯한 절벽이 있고 그 절벽 끝나는 곳에 마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그곳이 여흥민씨 시조가 태여난 곳이라 한다

 

 

 

 

영월루(迎月樓) 현판

오세창의 제자인 동창 원충희(東滄 元忠喜 · 1912-1976)의 영월루 동편 현판이다

 

 

 

 

영월루(迎月樓) 현판

동창 원충희(東滄 元忠喜)의 영월루 서편 현판이다

 

 

 

 

여주시

영월루에서 봤다

 

 

 

 

여주 마암(麗州 馬巖) / 여주시 향토유적

마암은 여주 지명의 유래가 되는 황마(黃馬)와 여마(麗馬)가 이곳에서 솟아났다 하여 마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고려시대 여주의 지명이 황려(黃麗)라 불렀다고 한다

즉 여주의 지명은 골내근현 - 황효 - 황려 - 여흥 - 여주로 변천되었는데, 황려 지명은 이 마암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주 출신 대문호인 이규보의 한 시 중에

"두 마리의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이 때문에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라고 적은 내용이 있어 그 역사성이 매우 높은 유적이다

또한 여주의 대표적 성씨엔 여흥 민씨의 시조가 탄생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여주시를 대표하는 자연경관 유적이다

그리고 이규보 · 이색 · 서거정 · 최숙정 · 김상현 · 정약용 · 김창협 등 당내의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현재 마암이 시작되는 평평한 바위면에 「馬巖(마암)」이라 큰 글씨가 있고

위쪽에 여주목사를 역임한 이인응(李寅應)과 시월(十月) 일각(日刻)이, 오른쪽에 여주군수를 지낸 신현태(申鉉泰)라는 글씨가 있다

 

 

 

 

여흥민씨관향비(驪興閔氏貫鄕碑)

여주시 상동 영월공원 민씨 시조 출산지에 여흥민씨관향비를 세웠다

여흥 민씨의 시조가 탄생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마암(馬巖) 입구에 있다

 

 

 

 

그리스군참전기념비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 · 여주군 6. 25참전기념

유엔의 회원국인 그리스는 예로부터 문명의 요람으로 문명의 영원한 가치를 수호해 왔으므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요청을 즉각 받아들여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북측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했다

1950년 12월 참전 때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할 때까지 그리스대대는 잠시동안의 휴식을 취했을 뿐 최전방에서 훌륭히 싸웠다

한국전에 참전한 총인원은 5,532명의 군인들과 8명의 여성간호장교들이었다

전사자 수는 186명이었으며 부상자 수는 610명이었다

1974년 10월 3일 여주휴게소 내에 건립하였다가 2021년 12월 9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통합기준점

 

 

 

 

여주 하리삼층석탑(驪州 下里 三層石塔) / 보물 92호 · 여주 창리삼층석탑(驪州 倉里 三層石塔) / 보물 91호

 

 

 

 

걸은 거리 0.9km, 소요시간 37분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중앙박물관 조선2실  (0) 2023.01.24
국립중앙박물관 조선1실  (0) 2023.01.24
여주 신륵사  (0) 2023.01.16
주어임도  (0) 2023.01.15
물소리길 4코스  (0) 2023.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