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유명해진 것은 고려 우왕 2년(1376년)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입적하면서부터다
나옹선사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로 시작해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如水如風) 살다가 가라하네"로 마치는 〈청산은 나를 보고 · 靑山兮要我〉를 지은 고려시대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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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의 원찰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 해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鳳尾山神勒寺一柱門)
여주 신륵사사적비(驪州神勒寺事蹟碑)
인류화합공생기원비와 공적비 등이 옆에 있다
판돈령 김병기 송덕비(判敦寧 金公炳箕 頌德碑)
1858년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의 발원에 의하여 호조판서 김병기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하고 그 공덕으로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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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구룡루 앞쪽에 있었다
아띠다원
차와 불교용품 판매점이다
불이문(不二門)
불이문(不二門) 현판
남한강 황포돛배를 볼 수 있는 정자다
범종각(梵鐘閣)
신륵사 다층석탑이 왼쪽 언덕에 있다
세심정(洗心亭)
신륵사 다층석탑 · 강월헌(江月軒)이 오른쪽에 있다
세심정(洗心亭)
신륵사 은행나무 보호수
신륵사 다층석탑 · 강월헌(江月軒)이 오른쪽에 있다
신륵사 다층석탑 · 강월헌(江月軒)
강월헌(江月軒)
달이 밝게 차올랐을 때 달빛에 물든 강과 건너편 은빛 백사장이 한 폭의 그림을 이뤘다고 한다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간 이후 지금의 자리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1974년 재건축한 것이다
나옹의 당호를 따서 지었다
강월헌(江月軒) 편액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驪州 神勒寺 三層石塔)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삼층탑으로 신륵사 다층전탑 근처 강변 암반에 세워져 있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양식에서 기원한 것이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넓적한 한 장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상대중석과 갑석을 올려 놓았다
상대중석의 각 면에는 기둥모양의 우주(隅柱)와 탱주를 새겼고, 그 위를 덮는 갑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 위 탑신부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과 2층 탑신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의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나 심하게 닳은 편이다
그 위에는 건축물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는데,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그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이나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도 모두 없어졌다
고려 말 나옹 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 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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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의 기록을 볼 때 나옹 스님을 다비한 장소가 바로 전탑과 석탑이 있는 지역이고
당시 수습된 사리로 부도를 조성하고, 화장한 장소에 나옹의 자취를 기념하고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일종의 기념탑이다
남한강썬밸리호텔
은빛 백사장 앞에 황포돛배 타는 곳이 있다
구룡루(九龍樓)
신라 진평왕 시절, 원효대사의 꿈에 한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한 장소를 보여주며 그곳에 절을 세우면 대대로 흥할 것이라 일러주었다
꿈에서 일러준 곳은 마을의 연못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말하길 그곳엔 용이 살고 있어서 쉽사리 절을 짓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사람의 말대로 연못을 메우는 일이 어려워지자 원효대사는 그 앞에서 기도와 정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기도를 드린지 7일째가 되자 연못에서 9마리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고, 그 후 연못을 메워 세운 사찰이 신륵사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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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의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지지만 그 이름의 유래에도 신비한 이야기가 서려있다
어느날 마암(馬巖)에서 재앙을 끼치는 여마(麗馬)가 나타나 인근 마을엔 난리가 났다
그때 나옹선사가 나타나 신기한(神) 굴레(勒)로 그 여마를 다스리고 물리쳤다
이 일화로 신륵(神勒)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와 건넛마을에 나타난 사나운 여마를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아 순하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다른 절 등은 산속에 있는데 반해 신륵사는 남한강을 옆에 끼고 봉미산 기슭에 자리하니 그 풍광이 예로부터 자자하였다
조선시대 학자 김수온은 "여주는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불리는데 신륵사가 이 낙토 한복판에 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철종 9년(1858)에 중수되었다
구룡루(九龍樓) 현판
봉미산 신륵사(鳳尾山神勒寺) 현판
오세창의 제자 동창 원충희(東滄 元忠喜 1912-1976)의 현판으로 구룡루 뒤편에 붙어 있다
신륵사 은행나무 보호수
나옹선사께서 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 났다는 신륵사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와 부부라고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소헌왕후의 원찰이어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 암나무인데 세종대왕 원찰인 신륵사 은행나무는 오늘날까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며
이상하게도 나라의 큰 변이 있으면 나무가 땀을 흘리고 이상한 울음소리를 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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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높이 22m · 둘레 3.1, 2.7m · 나이 약 600년 · 지정일자 1982. 10. 15
신륵사 다층석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 보물 제226호
한강이 아래로 보이고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다
이 탑은 2단으로 기단을 쌓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탑이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몸돌 하나가 더 올라가 있어 7층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1~3층이 2단 · 4층 이상은 1단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 장식은 얇다
지금 탑의 형태를 원래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 오는데, 그 비에 1726년(영조 2)에 고쳐지었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 탑이 세워진 연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을 근거로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각(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閣) / 보물 제230호
고려 말 신륵사에 대장각을 만든 후 그 내력을 새긴 것이다
고려시대에 대장각이 이곳에 있었는데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이곳에 보관중이던 대장경판을 일본에 주었다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각(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閣) 현판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 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비는 고려 말 신륵사에 대장각을 만든 후 그 내력을 새긴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 화상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고려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관 제학이었던 이숭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 제학이었던 권주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했던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 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의 몸체를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형태로 되어 있으며
몸체의 양옆에 있는 돌기둥이 몸체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다
이렇게 몸체 양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나타나는 양식이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1383년(고려 우왕 9)이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유행했던 거북 모양의 비받침과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는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었는데
이 비가 그러한 변화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려 말 비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여주 봉미산 신륵사 구룡루 중수비(驪州 鳳尾山 神勒寺 九龍樓 重修碑)
보제존자석종으로 가는 솔숲이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神勒寺 普濟尊者石鐘) / 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가 옆에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神勒寺 普濟尊者石鐘) / 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높이 190cm)은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는 보제존자 나옹의 승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 위에 받침 2단을 쌓은 후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되어 있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어져 있으며, 계단 양 옆에는 계단이 있다
탑신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불꽃 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가 솟아 있다
이 탑은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1376년(고려 우왕 2)에 입적하게 되면서 우왕 5년(1379)에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세운 것이다
이 작품은 고려 후기 석종 형태의 승탑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보물 제231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은 보제존자 나옹의 사리탑을 밝히기 위해 세운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 볼 때 팔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불을 맑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이 있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이 있다
받침의 표면 전체에는 꽃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다
화사석 각 면에는 무지개 모양의 창이 나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가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가 경쾌하게 추켜 올라가 있어 무거운 느낌이 덜하다
이 석등은 1379년(고려 우왕 5)에 보제존자 석종 및 석종비와 함께 세워진 것으로 세워진 연대가 확실하며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 양식을 갖춘 귀중한 작품이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 普濟尊者石鐘碑) / 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는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석종형 승탑 옆에 세워진 비석이다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승려로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절 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모신 석종을 세웠고 그 옆에 석비도 세웠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 부분의 윗면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몸체의 양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이 비는 1379년(고려 우왕 5) 세워진 비로, 비문의 내용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한편,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글의 맨 앞이 아닌 끝부분에 적은 것은 드문 예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비의 형식이 잘 드러난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神勒寺 普濟尊者石鐘)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 普濟尊者石鐘碑)
조사당(祖師堂) / 보물 제180호 · 향나무 보호수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정방향에 가까운 정면 1칸 · 측면 1칸의 아담한 건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한 조선 초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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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5m · 둘레 1.3m · 나이 약 600년 · 지정일자 1982. 10. 15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驪州神勒寺 三和尙眞影) /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67호
신륵사 조사당에 보존되어 있는 세 폭의 초상화로 지공화상(?~1363) · 나옹화상(1320~1376) · 무학대사(1327~1405)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가운데는 지공화상을, 그 오른쪽에 나옹화상을, 왼쪽에는 무학대사를 그렸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 화상이다
이 삼화상진영은 신륵사의 중요한 인물인 나옹 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이다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 점의 진영 가운데 심화상을 그린 진영은 매우 드물어 희귀한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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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나옹화상의 상
나옹선사의 은사 스님이신 지공 · 제자이신 무학대사의 영정이 조사당 안에 모셔져 있다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驪州 神勒寺 乾隆三十八年銘 銅鐘) /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277호
1773년(영조 49)에 만든 동종으로 높이 93.6cm · 폭 66.2cm이다
용뉴가 쌍룡으로 되어 있고 조선 후기 범종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원형 범자를 연곽과 보살상 사이에 배치하거나 하대의 연화 덩굴무늬를 중간에 배치하는 등 신륵사 범종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종에 새긴 기록을 통해 종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 범종 형식과는 다른 다양성이 나타나므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명부전(冥府殿)
명부란 사람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세계를 상징하고
명부전에는 사후세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지장보살이 주불로 봉안되어 있어 지장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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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송각(奉送閣) · 소대(燒臺)
이곳은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시는 영가님들을 극락세계에서 태어나시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이다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驪州 神勒寺 圓球形石造僧塔)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 있으며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 승탑 중 하나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흔히 부도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승탑은 둥근 공 모양을 한 탑신(塔身)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기 때문에 원구형 승탑이라 부른다
보통 탑신에 명문(銘文)을 새겨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지만 이 승탑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의 승탑인지 알 수 없다
승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이 올려져 있다
상대석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팔각의 모서리에 세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킨 모양의 연주문형 기둥이 새겨져 있다
탑신 위의 옥개석은 기왓골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용머리 4개가 사방으로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의 상륜부는 가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하여 만든 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에 2단의 보륜과 그 위에 1개의 보주가 올려져 있다
승탑의 형식으로 볼 때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문양이 비교적 세밀하게 새겨져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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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승탑(驪州 神勒寺 八角圓堂形石造僧塔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워내 신륵사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는데, 1966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이 탑의 탑신부 안쪽에서 사리를 모신 사리함이 발견되었지만, 탑신에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서 승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그 대신 각 면에 문비형(門扉形)과 범자(梵字)를 도드라지게 새긴 점이 특이하다
이 승탑은 통일신라시대 유행한 팔각형의 탑신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을 얹었기 때문에 팔각 원당형 승탑이라고 부른다
승탑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 · 중대석 · 상대석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고, 중대석은 무늬가 없는 둥근 모양이며,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위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탑신 위에 옥개석 용머리 끝에는 8개의 큼직한 귀꽃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위의 상륜부에는 복발 · 보륜 · 보주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원형석이 차례로 올라가 있다
이 승탑은 탑의 형식으로 볼 때 고려 말 ·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승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사당(祖師堂) / 보물 제180호 · 극락보전(極樂寶殿)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 범종각(梵鐘閣)
원구형석조승탑을 보고 내려오며 봤다
삼성각(三聖閣)
독성(獨聖) · 산신(山神) · 칠성(七聖)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다
이러한 삼신신앙은 한국불교의 특색에 맞게 발전, 융화된 한국 불교 신앙이라 볼 수 있다
심검당(尋劍堂)
사찰에서 승려들이 좌선하는 건물에 많이 붙이는 이름이며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 하여 심검당이라고 한다
심검당(尋劍堂) 현판
심검당 안채
봉미산 신륵사(鳳尾山神勒寺) 현판이 걸려 있다
적묵당(寂默堂)
신륵사 사무실이다
신륵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절 안의 중심부에 자리해 있다
1678년(숙종 4)에 지어진 후 1797년(정조 21)에 수리하기 시작하여 1800년(정조 24)에 완공되었다
극락보전은 앞면 3칸 ·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라 한다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정토의 주불이자 모든 중생들에게 안락과 수명장수를 서원하시는 대자대비 부처님이다
여주 신륵사다층석탑(驪州神勒寺多層石塔) / 보물 제225호
조선 성종 3년(1472)에 건립된 높이 300cm의 이 석탑은 2층의 기단부 위에 다층의 탑신부가 있어
기본적인 구조는 신라나 고려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각 부재의 세부조형은 전혀 다르다
탑의 몸면 4면에는 구름무늬와 용무늬가 조각되어 하얀 대리석의 질감으로 인해 탑의 우아함이 더욱 돋보인다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 삼존상(驪州 神勒寺 木造阿彌陀如來 三尊像) / 보물 제1791호
극락보전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 삼존여래좌상으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대세지보살 ·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가운데 여래는 앉아 있고, 여래 양옆의 보살은 서 있는데
유난히 높은 육계 · 이국적인 얼굴 · 옷 주름 표현의 독창성 등의 조형적 특징은 다른 불상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특징이다
불상 내부에서 복장(伏藏) 원문이 발견되어, 1610년(광해 2)에 승려와 일반 백성 백여 명이 마음을 모아 삼존상을 만든 것임이 밝혀졌다
특히 인일(仁日)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이 확인되어 17세기 초기 조선시대 불교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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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驪州 神勒寺 極樂寶殿 三藏菩薩圖)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8호
신륵사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으며, 천장보살 · 지지보살 ·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해당 권속들의 모임이 통일감 있고 안정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주된 인물을 비롯하여 각 인물의 개별 묘사도 뛰어날 뿐 아니라 적색과 녹색, 2가지 색을 주로 사용하면서도
많은 인물들도 잘 드러나게 표현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경기도에 전하는 삼장보살도 가운데 제작 연대가 가장 앞선 작품이다
18세기 경기도를 대표하는 화승 각총(覺聰)이 주도하여 그린 불화답게 전체적인 구성 · 인물의 묘사 등이 뛰어나
18세기 중엽 탱화의 화풍과 형식 변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관음전(觀音殿)
범종각(梵鐘閣)
범종각(梵鐘閣) 현판
범종(梵鐘)
불교에서 말하는 사물을 조성하여 둔 곳으로 아침 · 저녁 예불 때 법고 · 목어 · 운판 · 범종 순으로 치게된다
범종은 그 소리로 인하여 일체중생이 번뇌로부터 벗어나 지혜와 깨달음을 얻게하는데 의미가 있다
심검당(尋劍堂)
사찰에서 승려들이 좌선하는 건물에 많이 붙이는 이름이며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 하여 심검당이라고 한다
걸은 거리 1.9km, 소요시간 1시간 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