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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강화산성

강화산성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도성으로 쌓은 것이다
1232년에 최초로 축성돼 39년간 몽골의 침략에 대항한 강화의 상징이다
이후 훼손과 복원이 반복되다 조선 숙종 37년 현재의 산성으로 확장 · 축조됐다
성 둘레 길이는 약 7.2km로 북장대와 남장대를 오르면 강화 원도심의 전경과 북한의 모습도 한눈에 볼 수 있다

남산
강화산성을 돌려면 남산으로 올라야 하지만
용흥궁 · 강화성공회성당 · 강화문학관 · 고려궁지 · 향교 등을 거처 진송루로 가기로 했다

 

 

선원 김선생 순의비(仙源金先生殉義碑)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했으나 청군이 이곳마저 함락하자
남문루 위에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한 선원 김상용선생의 위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때 유수로 부임한 공의 7대손 김매순이 건립한 비다
*
당초 순절비는 예전 남문지에 있던 것을
1976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화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비각을 옮겨 세우던 중
숙종 26년(1700), 당시 강화유수인 선생의 종증손 김창집이 세운 구비가 발견되어 신 · 구비를 나란히 세웠다

 

 

선원김선생순의비(仙源金先生殉義碑) 편액

 

 

거울 앞에 서다
1866년 병인양요 · 1871년 신미양요 · 1875년 운요호사건 ·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1919년 독립만세운동 · 1960년~1970년 강화의 번성기 방직산업의 메카 등의 설명이 있다
*
김상용 순의비 앞에 있다

 

 

심도직물 기념물(직조기 · 굴뚝)
1947년 고 김재소(7대 국회의원)씨가 설립한 심도직물이 자리 잡았던 곳으로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던 국내 굴지의 섬유회사다
1960~70년대에는 직원 1,200명 정도였고 거쳐간 사람들 수만해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주 생산품으로 커텐지, 카페트 특히 웸부리넥타이로 유명했다
*
현재 심도직물이 자리 잡았던 곳에 용흥동공원을 조성하였고
30미터에 달했던 거대한 굴뚝 끝부분을 따로 남겨 심도직물을 기념하고 있다

 

 

심도직물 포토존

 

 

전 국회의원 창송 김재소 송덕비(前國會議員蒼松金在紹頌德碑)

 

 

용흥궁(龍興宮)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조선 제25대 왕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였던 곳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 · 강화유수 정기세가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 불렀다
고종 광무 7년(1903) 이재순에 의해 중건되고, 1974년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원용 불망비 · 정기세 생묘비
문충공 정원용(1783~1873)과 정기세(1814~1884)의 청렴한 덕행과 백성들을 아껴 준 공로와 은혜를 기리고자
1864년 3월에 강화유수부의 18개 면민들의 뜻을 모아 세웠다
*
용흥궁 대문 옆에 있다

 

 

용흥궁 내전
안채로 정면 7칸 · 맞배지붕이다

 

 

외전
사랑채로 정면 6칸 · 팔작지붕이다

 

 

철종잠저구기 비각(哲宗潛邸舊基碑閣)
철종의 잠저였음을 기록한 철종잠저구기 빗돌이 있다

 

 

철종잠저구기비(哲宗潛邸舊基碑)
철종의 잠저 빗돌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 사적 제424호
1893년 갑곶이 나루터(성 니콜라회당)에서 선교를 시작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사적 제424호)은
1897년 조선왕실 해군사관학교(통제영학당)의 영국인 교관(Callwell대위)으로부터
관사와 대지 3천여 평을 매입하여 성바우로회당이라 축복함으로서 선교본부를 강화 성내로 이전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마가(제3대주교, M. N Trollope) 신부와 김희준(초대 한인 사제)교우 등은 선교본부라는 이름에 걸맞는 성당을 건축하고
이를 고요한(초대 주교, C. J. Corfe)주교가 1900년 11월 15일 성베드로와 바우로의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천주성전(天主聖殿)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으로 건물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고려하여
목재는 수령 백 년 이상의 백두산 적송을 조마가 신부가 직접 신의주에서 구하여 뗏목으로 운반하여 왔고
석재와 기와는 강화산을 사용하였다
도목수는 경복궁 중수에 참여했던 도편수였으며 중국인 석공과 강화지역 교우들이 참가하여 1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
현관 기둥에 주련 5개가 있다
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으신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다
*
선인선의율조증제대권형(宣仁宣義聿昭拯濟大権衡)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니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
삼위일체천주만유지진원(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삼위일체 하느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
*
신화주류유서물동포지락(神化周流囿庶物同胞之樂)
하느님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 것이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이다
*
복음선파계중민영생지방(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250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게 지어진 정면 4칸 · 측면 10칸의 중층 건물로
서양 바실리카식교회 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외래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강화성당은 서쪽에 출입문을 배치하여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로
배 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뒷쪽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예전 사제관 · 라브린스 걷기
라브린스는 고대 때부터 전해져 오는 것으로 그리스나 켈틱문화, 마야 문명의 여러 신전에서도 남아 있고 또 오래된 성당 등에도 남아 있다
주로 둥글게 만들어진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서 조용히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며 천천히 걸어 중앙에까지 다다랐다가 다시 돌아서 나오는 방식이다
*
성당과 사제관 사이 원형의 미로 길이 있다

 

 

강화삼일독립운동기념비
용흥궁공원에 있다

 

 

강화군 독립유공자

 

 

강화문학관
강화 출신의 수필가 고(故) 조경희 선생의 유지에 의한 것으로
선생께서 2005년 8월 타계하시며 강화군에 사전 기증하신 소장품 8,287점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아울러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신 고인의 수필문학에 끼친 업적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강화읍 용흥궁공원에 있는 강화문학관 1층에는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규보와 정철 · 정제두 등
강화도와 관련이 있는 옛 문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으며
2층에는 조경희 선생의 육필원고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안경 등과 미술품 40여 점의 유품을 교환 · 전시하고 있다
세미나실은 문화강좌를 개설 · 운용하고 있으며, 북카페 월당을 만들어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민족의 대문호 이규보
시 · 술 · 거문고 3가지를 즐겨 스스로를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호를 지었다

 

 

함허 · 이색 · 이제헌 · 최자
함허(涵虛 · 1376~1433)는 고려 말 · 조선 초의 승려로 속성은 유씨(劉氏)이고 당호는 함허이다
21세 때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하던 벗의 죽음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과 허망함을 느껴 출가했다
무학(無學)을 만나 가르침을 받아 지공(指空) · 나옹(懶翁) · 무학의 법통을 이었다
*
이색(李穡 · 1328~1396)은 고려 말기의 유학자이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정권을 잡자 이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조선이 건국된 이후 재야에 은둔하였다
*
이제현(李齊賢 · 1287~1367)은 고려 말기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백이정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했고
같은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 · 조맹부 · 원명선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9년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나오게 했다
1357년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
최자(崔滋 · 1188~1260)는 고려 말기 학자로 시문으로 이규보에게 인정받아 요직에서 활약하였고
1258년 최씨무인정권이 몰락하자 수상이 되어 난국을 수습하였다

 

 

그리운 금강산 · 정인보의 문학과 생애 · 100년 전 강화마을 답사기
그리운 금강산은 1962년 6 · 25기념식에서 처음 선보인 가곡이다
발표될 당시부터 지금까지 60년 가까이 전 국민이 가장 사랑하고 애창하는 국민가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작사자인 한상억과 작곡자 최영섭은 모두 강화 출신이다
*
정인보(1893~ ?)는 한문학의 대가로서 서지학 · 국사학 · 국문학에 두루 관여했다
양명학자인 이건방 문하에서 경학과 양명학을 공부했다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노래(삼일절 · 광복절 · 제헌절 · 개천절) 모두를 강화학파의 마지막 계승자라 할 수 있는 위당 정인보 선생께서 작사하였다
8 · 15광복 후 1947년 국학대학 학장 · 1948년 초대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6 · 25전쟁 때 납북되어 얼마 되지않아 사망하였다고 한다
*
화남집(華南集)
1906년 봄, 강화에 살던 고재형(高在亨 · 1846~1916)이라는 선비가 여행길을 떠났다
돌아와서 심도기행(沁都記行)이라는 한 권의 책을 썼는데 '심도'는 강화의 별칭이다
심도기행이란 곧 강화기행이니 고향을 여행하고서 쓴 기행문이다
강화의 거의 모든 마을이라 할 수 있는 200여 곳을 직접 가서 살펴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 마을들을 주제로 모두 256수의 한시(漢詩)를 지었고
거기에 덧붙여 마을 유래와 자연경관 · 풍습 · 주민들의 생활 모습 등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여 지은 기행시문집이다
당시는 일제에 의해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였는데 이 책은 저자가 현지를 직접 가서 보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기행시문집이지만 강화의 민속지이며 지리지로도 손색이 없다

 

 

조경희 수필문학관
전시품은 선생의 생애와 대표작 그리고 생전에 선생이 소중하게 지녔던
미술작품 158점 · 도자기작품 74점 및 서예 · 조각품과 선생이 갖고 있던 8,000권의 책 등이다

 

 

얼굴
"얼굴보다 마음이 고운 미인"
조경희의 대표적 수필이다

 

 

진무영 순교성지(鎭撫營殉敎聖址)
진무영은 숙종 26년(1700)에 해상 방어를 위해 설치된 군영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1866년 5월 22일 최인서, 장치선, 박순집, 조삼봉의 부친 등이 순교하였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로 성직자 12명 중 3명과 신자 10,000여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분인 리델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가 신교(信敎)의 자유, 남은 교우들을 구출
성교(聖敎 · 천주교) 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성직자의 보호와 전교의 자유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강화 고려궁지 승평문(昇平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의 궁궐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 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1270)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 건물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 영역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의 영역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또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 남아있다
이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 / 유형문화재 제 25호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인조 16년(1638)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영조 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하였다
건물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 팔작지붕 겹처마단층집으로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
왼쪽 느티나무 보호수는 조선 인조 9년(1631)에 여러 전각과 행궁을 세울 때 심었던 나무로 추측된다
나무 높이 20m · 둘레 4.3m · 나이 약 400년 · 지정일자 2016

 

 

외규장각(外奎章閣)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했다
어람용 위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으로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草住紙)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병인양요때에도 외규장각에 보관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 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채색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
병인양요때 프랑스군들이 양헌수장군에게 패하자 후퇴하며 불태웠다
이 결과로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儀軌)를 비롯한 340여 책의 문서 및 은궤 수천 량이 약탈되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복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회화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0m · 둘레 6m · 나이 416년 · 지정일자 2001. 8. 6

 

 

강화부동종(江華府銅鐘)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숙종 37년(1711)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했다
높이 198cm, 입지름 138cm로 조선 후기 동종으로는 큰 규모이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줄이 둘러 있고, 그 아래에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다
종각은 당시의 강화산성 남문 주변인 김상용 순절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때 고려궁지로 이전되었다
1999년 10월 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

 

 

강화유수부 이방청(江華留守府 吏房廳) / 유형문화재 제26호
강화유수부 행정 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효종 5년(1654)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정조 7년(1783)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수리하였다
1915년 이후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2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은행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5m · 둘레 7.5m · 나이 688년 · 지정일자 1982. 10. 15

 

 

남산
강화향교로 가며 봤다

 

 

강화여자고등학교

 

 

강화향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
고려 인종 5년(1127) 내가면 고천리에 세워졌다
그 후 여러 차례 옮겨지고 복원되었는데, 지금 있는 위치는 영조 7년(1731) 유수 유척기(兪拓基)가 옮긴 것이다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 서무,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해 여러 부속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 노비 · 책 등을 지원 받아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담당했으나
갑오개혁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대성전(大成殿)
5성(五聖) ·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대성위(大聖位 · 공자)
5성(五聖) ·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아성공(亞聖公 · 맹자) · 종성공(宗聖公 · 증자)
문충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 문정공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등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좌우에 봉안되어 있다

 

 

복성공(復聖公 · 증자) · 술성공(述聖公 · 자사)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 ·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 문경공 김집(文敬公 金集) ·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등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좌우에 봉안되어 있다

 

 

명륜당(明倫堂)

 

 

은수물약수터 · 빨래터

 

 

서문 · 북문 방향안내판
은수물약수터 옆길로 언덕을 오르면 있다
북문 방향으로 간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고
자연을 훼손하면 갈 곳이 없다

 

 

진송루(鎭松樓 · 북문)
고려 고종 19년(1232) 도읍을 옮기고 궁궐을 지을 때 도성도 함께 쌓았는데
개성의 성곽과 비슷하게 내성 · 중성 · 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내성에 해당하는 것이 현재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숙종 3년(1677)에 현재와 같은 석성을 이루었다
성의 길이는 7,122m이며 4개의 대문 · 4개의 암문 · 2개의 수문 · 2개의 성문장청(城門將廳)이 있었다
*
오른쪽 계단이 북장대로 오르는 성곽길이다

 

 

북장대지
북한 개풍군이 한강 건너로  보인다

 

 

강화나들길 1코스 · 15코스 이정표
북장대지 아래에 있다

 

 

강화나들길 1코스 방향안내판
진달래꽃길을 지난 곳이다

 

 

강화나들길 1코스 방향안내판을 지난 언덕이다
이곳에서 연미정 · 우도가 보인다

 

 

고려산
넓은 평지가 북장대지다

 

 

남산

 

 

동문 갈림길 방향안내판
이곳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강화산성
동문으로 내려가며 봤다

 

 

성벽

 

 

성산교회

 

 

느티나무 보호수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9m 이상 · 둘레 5.9m · 나이 650년 이상 · 지정일자 1982. 10. 15

 

 

망한루(望漢樓 · 동문)
한양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망한루라 지었다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비해 고종 19년 (1232) 고려궁지를 중심으로 둘러싼 강화산성 동문이다

 

 

망한루(望漢樓 · 동문) 현판

 

 

강도동문(江都東門)
강화산성 동문 바깥쪽 현판이다

 

 

청룡(靑龍)
사신도는 동쪽 청룡(靑龍) · 서쪽 백호(白虎) · 남쪽 주작(朱雀) · 북쪽 현무(玄武)를 이른다
동서남북에서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사신의 개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한(後漢 25~220)대에 이르러 사신은 방위신(方位神)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회화와 공예의 주제로 많이 표현되었다
*
망한루 천장에 있는 그림이다

 

 

 

 

동미이발관

 

 

마법의 빵집
전설의 마녀 드라마 촬영지이다

 

 

현대사진관 SINCE 1973

 

 

중앙목욕탕 · 여관

 

 

신아리랑
젓국갈비를 먹으러 갔으나 5시 이후에 문을 연다고 한다
어제 저녁에 이어 두 번 헛탕이다

 

 

대명헌(大明軒)
과거 독립군을 지원하던 거부 창원황씨 황국현의 한옥으로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곳이다
1928년 백두산 잣나무로 10년의 공사 끝에 지어진 집으로 지금은 근현대문화 한옥체험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파루(晏波樓 · 남문)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1234년부터 본격적 공사에 들어갔다
고려 때 쌓은 성으로 내성(內城) · 중성(中城) · 외성(外城)의 형태를 취했는데, 이 중 내성이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1250년 축조했으며 길이가 약 9㎞의 토성으로 모두 8개의 성문이 있다
외성은 1233년부터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공사를 실시하였다

 

 

안파루(晏波樓 · 남문) 현판
전 국무총리 김종필의 글씨다

 

 

강도남문(江都南門)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 · 암문(暗門) 4개 · 수문(水門) 2개가 있다
문루로는 남쪽 안파루(晏波樓) · 서쪽 첨화루(瞻華樓) · 북쪽 진송루(鎭松樓) · 동쪽 망한루(望漢樓)가 있다

 

 

강도남문(江都南門) 현판
강화산성 동문 바깥쪽 현판으로 전 국무총리 김종필의 글씨다

 

 

강화유수 민진원 선정비(江華留守閔鎭遠善政碑)
민진원은 조선 후기의 척신으로 민유증의 아들이며, 민진후의 남동생, 인현왕후의 작은오빠이다
1691년 과거 급제 후, 인현왕후의 폐출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복귀하여, 사복시정 ·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고 노론에 참여하였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등을 거쳐 좌의정을 역임했다

 

 

강화읍성 남문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이름은 늘 티내는 나무라는 뜻에서 「늘 티나무」로 부르다 느티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오래된 느티나무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마을 경계목과 정자목으로 많이 심었다
마을 어귀나 집 주변 · 성곽 · 고개마루 언덕 등에 서있는 느티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상징으로 여겨 왔다
나무 높이 12m · 둘레 4.8m · 나이 450년 · 지정일자 2019

 

 

강화도행렬도
1849년 6월 헌종의 왕위를 계승하게 될 강화도령 변(조선 25대 철종)을 모시러 오는 행렬을 그린 역사기록화로
현재 조선미술박물관(평양)에 소장되어 있으며 강화도 전경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
남문에서 강화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에 있다

 

 

강화의 역사속 10인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2.9km, 소요시간 7시간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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