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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양도성(창의문~숭례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5~8m ·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정책에 의해, 해방 이후에는 도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 행위가 지속되어
1970년대까지 전체 18.6km 가운데 6.7km · 도성의 약 36%가 완전히 사라졌다

광화문(光化門)
1395년(태조 4) 9월 경복궁 정문으로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 문배도((門排圖)
정월 초하루 궁궐 정문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의미로 그림을 붙이는 풍속을 말하며
이때 붙이는 그림을 문배도라고 한다

 

 

경복궁 해치상
불을 잠재우고, 선악과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2010년 광화문 복원과 함께 재차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나, 원래는 광화문 70~80m 전방에 있었다

 

 

창의문(彰義門)
백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속칭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빗돌
윤동주 시인의 언덕 조망지점 안내판이 옆에 있다

 

 

인왕산 들머리

 

 

롯데월드타워
2009년 착공되어 2016년 12월 22일 완공되었으며, 지상 123층 · 지하 6층 · 높이 555m의 규모이다
한국에서는 100층을 넘은 첫 번째 건물이며, 세계에서는 5번째 높이의 건물로 기록되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刻字城石)
가경십일년 병인 십월 일 간역 최일성 감관 이동한 편수 용성휘
(嘉慶十一年 丙寅 十月 日 看役 崔日成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순조 6년(1806) 10월 최일성이 공사를 돌봤고, 이동한이 공사를 감독했으며
전문 석수 용성휘가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이다
*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 축성 책임 관리와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한양도성 부부소나무
뿌리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이어져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을 연리지(連理枝)라 한다
한 나무가 죽어도 다른 나무에서 영양을 공급하여 살아나도록 도와주는 연리지는
예로부터 귀하고 상서로운 것으로 여겼다
연리는 두 몸이 한 몸이 된다하여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비유한다

 

 

북한산 보현봉
왼쪽 끝 비봉 · 오른쪽 형제봉까지의 마루금이다

 

 

북한산 보현봉 · 백악산(白岳山)
청렴을 뜻하는 백(白)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도망을 뜻하는 북(北)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산이라 흔적을 남긴 걸까?

 

 

북한산 보현봉
왼쪽 족두리봉 · 오른쪽 형제봉까지의 마루금이다

 

 

남산
왼쪽 롯데월드타워 · 오른쪽 관악산까지의 서울이다

 

 

남산

 

 

남산
왼쪽 높은 빌딩이 롯데월드타워다

 

 

남산
오른쪽 관악산까지의 서울이다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인왕산 정상(338.2m)
서울을 분지로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 · 남산을 안산 · 낙산을 좌청룡 · 인왕산을 우백호로 삼았던 명산이다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인왕사라는 불교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인왕산 정상(338.2m)

 

 

인왕산 정상목(338.2m)

 

 

북한산 보현봉
형제봉 · 구진봉 · 백악산까지의 마루금이다
*
정상에서 본 북쪽이다

 

 

백악 곡성(曲城)
곡성은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하는데 백악산과 인왕산에 하나씩 있다
*
정상에서 본 남쪽이다

 

 

호랑이바위 · 백악 곡성(曲城)
예전엔 공사로 출입통제 지역이었다

 

 

인왕산
호랑이바위로 오르는 계단 데크에서 봤다

 

 

인왕산 · 백악산
호랑이바위로 오르는 계단 데크에서 봤다

 

 

안산 · 백련산
호랑이바위를 올라서 봤다

 

 

인왕산 순성안내쉼터로 가는 길이다

 

 

백악 곡성 앞쪽 바위가 떨어질 듯 보인다

 

 

인왕산 선바위
국사당이 오른쪽에 있다

 

 

인왕산 선(禪)바위 / 중요민속자료 제4호
2개의 커다란 바위가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있는 것 같이 보여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
암석숭배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여겨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남산에 있던 국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온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되었다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이 이 바위를 성안과 성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성밖으로 밀려 났다는 일화가 있다
*
(2013. 9. 21 사진)

 

 

국사당(國師堂) / 중요민속자료 제28호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남산을 신격화한 목멱대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목멱신사」로도 불렸다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1925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일반 백성은 물론 경대부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굿당으로 변해 지금도 내림굿 · 치병굿 · 재수굿 같은 굿판이 벌어진다
*
(2013. 9. 21 사진)

 

 

인왕산 성곽초소(52T)
1968년 1 · 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목적으로
1970년부터 2006년까지 백악산과 인왕산 등에 30개소 이상의 경계 시설물(경계초소 · 소초 등)을 설치하였다
2018년부터 인왕산을 시민의 품으로 환원하겠다는 취지로
인왕산 전 구역에 대한 경계시설물(경계초소 · 고가초소 · 철조망 · 실내사격연습장 등)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한양도성 성벽에 설치한 경계초소 20개소 중 17개를 철거하고 성벽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19년 10월에 완료하였으며
3개소는 훼철과 복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을 위하여 남겨두었다

 

 

통일로18나길
도로와 만나는 길로 철문이 설치되어 있다

 

 

남산
사직로로 내려가는 길이다

 

 

인왕산 마루금
정상 · 호랑이바위 · 곡장 아래 선바위와 국사당이 왼쪽으로 보인다

 

 

사직전망대
백악산 · 경복궁 · 종로타워 등이 보인다

 

 

사직로1가길

 

 

딜쿠샤 /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687호
UPI통신의 「앨버트 테일러」 특파원이 세계 최초로 3 · 1운동을 세계로 타전한 곳이다
이집은 국유재산이었지만 예전 17가구가 살았었다

 

 

딜쿠샤 /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687호
예전 국유재산이었지만 예전 17가구가 살았었던 때 사진이다
*
(2012. 1. 21 사진)

 

 

딜쿠샤(DILKUSHA 1923) 정초석
앨버트 테일러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힌두어로 「이상향」 혹은 「행복한 마음」 · 「기쁨」을 의미한다
그는 1923년 딜쿠샤를 짓고 1942년 추방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권율 장군 집터 · 은행나무 보호수
장군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가 크게 자라 동네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기에 행촌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권율 장군 집터 빗돌이 보호수 앞에 있다
*
나무 높이 24m · 둘레 680cm · 나이 420년 · 지정일자 1976. 6. 5

 

 

홍난파 가옥 /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90호 · 홍난파 동상
이 집은 지하 1층 · 지상 1층의 붉은 벽돌조 건물로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근처 송월동에 독일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주변의 건물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았다
특히 이 집은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세상을 떠나기 전 6년을 보냈기에 홍난파 가옥으로 부르고 있다
홍난파는 봉선화 · 고향의 봄 등 멋진 가곡의 작곡자지만 친일로 명성이 퇴색했다

 

 

월암근린공원 복원 성벽
2008년까지 성벽을 담장으로 사용하던 주택을 철거하고 발굴 조사하였다
묻혀있던 한양도성 성벽을 복원하고 주변지역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서울특별시교육청

 

 

경교장(京橋莊) / 사적 제465호
이화장(梨花莊) ·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건국 활동 3대 명소 중 하나다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돈의문박물관마을
일제강점기 당시 철거됐던 돈의문 사진이 걸려 있다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터
세종 4년(1422)에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하였다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인도에 설치된 키오스크를 통해서도 AR로 재현된 돈의문의 모습이다

 

 

어서각(御書閣) 터
최규서(1650~1735)의 집터 안에 있던 영조의 어필을 봉안한 곳이다
조선 경종 ·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는 영조 즉위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일어난 무신란을 평정한 공을 세웠으나
그 공이 문서에 기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에 영조는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필을 내렸다
일사부정은 지조와 신의가 하나되어 사직의 안위를 지켰다는 뜻이다

 

 

캐나다 대사관 · 정동회화나무 보호수
2003년 캐나다 대사관 신축 당시 ·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뿌리의 위치를 감안해 건물의 디자인도 한발 물러섰으며
굴착 시기도 나무의 동면 주기에 맞추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캐나다 대사관의 노력으로 정동회화나무는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
나무 높이 17m · 둘레 516cm · 나이 520년 · 지정일자 1976. 11. 17

 

 

구 벨기에대사관 (현 캐나다대사관) 터
벨기에영사관은 1901년 조선과 벨기에의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이곳에 개설되었다
1905년 중구 회현동에 있는 현 우리은행 자리로 신축 이전한 후 이곳은 1920년대 이화학당 음악관을 거쳐 하남호텔로 이용되었다
2007년 하남호텔을 철거한 자리에 캐나다대사관이 세워졌고
현재 관악구 남현동에 있는 서울시립서울미술관 건물이 회현동의 벨기에영사관을 1983년 벽돌 단위로 완전히 해체해 이축한 결과물이다
*
사진의 회화나무가 캐나다대사관 회화나무다

 

 

구 러시아공사관 탑
1890년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한 르네상스식 건물로 벽돌조 2층 본관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고 현재는 3층 규모의 탑만 남아 있다
일부가 발굴된 지하 밀실은 비밀통로로 경운궁(현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1898년(건양 1) 2월 1일부터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약 1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역사에 나오는 「아관파천」이다
*
개보수공사로 가림막이 쳐져 있다

 

 

한국가톨릭 수녀원 첫 자리 (정동수녀원)
1887년 7월 26일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버림받은 고아들과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프랑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1888년 7월 22일 조선교회의 부르심에 응답한 네 명의 수녀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7월 23일 서울에 온 수녀들이 러시아공사관과 담을 맞대고 있던 정동 한옥에 머묾으로 순교의 땅 조선에 가톨릭 수도공동체가 시작되었다
7월 29일 순교자의 딸들인 다섯 명의 지원자들이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 9월 7일 종현(명동)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른다

 

 

과거 신아일보 별관
한국 최초로 다색인쇄를 시도했던 일간신문사로 1980년 제5공화국을 세운 전두환 정권에 의해 경향일보에 흡수되었다

 

 

중명전(重眀殿)
1897년 황실도서관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을 집무실이자 외국 사신 알현실로 사용해 중명전으로 격상되었다
1층 왼쪽 방이 을사늑약이 강제되었던 방이다

 

 

명창 이동백 상(像)
1867년 서천에서 태여나 독공(獨功)으로 득음하여 편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경지에 이르러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구축하였고
판소리를 품격 높은 민족예술로 승화시켜 그 공으로 고종황제로부터 통정대부를 제수받았고
창극을 발전시켜 일제강점기엔 민중의 정한(情恨)을 풀어주었다
*
젊은 시절 활동무대였던 원각사의 맥을 이은 정동극장 마당에 있다

 

 

정동제일교회
1897년 아펜젤러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다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
우리나라 첫 여성 의병장으로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기여했으며
탄약제조소를 운영해 여성 의병을 조직하는 등 항일 투쟁을 전개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됐다

 

 

제1회 전국체육대회 개최지 안내판
전국체육대회 시초가 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1920년 11월 4일부터 6일까지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 향나무 보호수
1916년 준공한  배재학당 동관(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으로
배재중고등학교가 1984년 2월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동교사로 사용한 곳이다
*
나무 높이 16.5m · 둘레 225cm · 나이 525년 · 지정일자 1972. 10. 12

 

 

소덕문 터(昭德門址) 빗돌
소덕문은 한양 4소문 중 하나로 한양도성 축조와 함께 1396년 건립되었다
1738년(영조 14) 소덕문의 이름을 고치라 명하였고, 1744년(영조 20) 8월 문루가 완성되자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중앙일보사 앞쪽에 있다
*
(2016. 7. 9 사진)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성인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1984년 서소문공원 안에 순교자 현양탑을 건립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97년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기존의 현양탑이 헐리게 되었고 이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는 오늘 이 자리에 새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다

 

 

두레우물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있다

 

 

염천교사거리

 

 

팔홍문 터 빗돌
조선시대 이지남(1529~1577)과 그 아들 등 3대에 걸쳐 8명이 충신 · 효자 · 열녀가 된 것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워준 8개의 문이다

 

 

남지터(南池址) 빗돌
연산군 때부터 중종 때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조선시대 최고의 간신 김안로가 죽자
성난 군중이 김안로의 집을 부수고 그 터를 못으로 만들었는데 그 못이 남지다
남대문 밖에 남지 · 동대문 밖에 동지 · 서대문 밖에 서지가 있었다

 

 

숭례문(崇禮門) / 국보 제1호
조선 태조 5년(1396)에 최초로 축조되었고 1398년 2월 중건되었다
이 문은 조선시대 한성 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하므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1448년에도 크게 고쳐지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남대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양측에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1908년 도로를 내기 위하여 헐어 내고 성문만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2006년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으나
2008년 화재로 문루 1층이 약 10% · 2층이 약 90%가 소실되었다가 2013년 복구되었다

 

 

황룡 · 청룡
남대문 홍예문 천장에 그려져 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가장 최근의 것이 아닐까?

 

 

숭례문
1904년 한양도성과 숭례문을 통과하는 전차 사진이다

 

 

남산 서울타워

 

 

서울로 7017
1970년 만들어져, 2017년 다시 태여난 17m 높이의 고가도로다

 

 

동자동 방향
서울로 7017에서 봤다

 

 

남대문 방향

 

 

염천교 방향

 

 

구 서울역사 / 사적 제284호
대한제국기인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철도의 남대문역사로 처음 건설되었으며
1925년 르네상스 풍의 절충주의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복합 문화공간인 「문화역 서울284」로 바뀌었다

 

 

서울역 옥상공원
앞의 건물은 1977년 완공된 대우그룹 빌딩이었다
예전 서울역사를 나오면 처음 보게되던 건물이라 서울의 이미지를 심어준 건물이다
이 건물은 김수근이 설계했는데 이 건물에서 쓰는 전력 사용량이 제주도 전체 전력 사용량보다 많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외국 자본에 넘어가 이름이 바뀌었다

 

 

강제 징용자상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탄광과 공장으로 끌려가 노예처럼 일한 탓에 삐쩍 마른 청년의 모습이다
탄광에서 일을 마치고 나와 햇살에 눈이 부셔 손으로 하늘을 가린 형상으로 알려졌다
어둠 속에서 희망과 평화를 상징하는 빛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품이다
"일본 강점기에 강제징용된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다시는 다른 나라의 침략에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다"면서
"일본이 전쟁범죄를 반성할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김운성 작가는 말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 · 김운성 작가 부부가 만들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9.62km, 소요시간 5시간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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