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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양도성(흥인지문~창의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5~8m ·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정책에 의해, 해방 이후에는 도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 행위가 지속되어
1970년대까지 전체 18.6km 가운데 6.7km · 도성의 약 36%가 완전히 사라졌다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흥인지문 양쪽 성곽은 모두 도로 건설로 헐렸다
시점이다

 

 

경성궤도회사 터 빗돌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뚝섬과 광나루까지 경성 궤도회사가 경영하던 궤도전차가 운행하던 시발지다
이 협궤전차는 승객 및 물자수송 · 교외 나들이의 중요한 교통시설이었다

 

 

낙산구간
한양도성은 백악산 · 낙산 · 남산 · 인왕산의 4개 구간이 있다

 

 

동복시(同福始)
1422년(세종 4) 전라남도 동복(同福 · 현 화순군 동복면) 군정(軍丁)들이 성벽 수축을 시작한 구간 표시다
*
각자성석(刻字城石)은 축성 관련 글자를 새긴 성돌이다
세종 때 축성한 초기의 각자성석에는 구간과 축성 담당 군 · 현명을 새겼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감독관 · 책임기술자의 이름과 직책을 명기하였다

 

 

낙산성곽 암문
동대문에서 첫 번째 암문에서 성 안으로 들었다

 

 

서울 남산
암문을 들어 성벽 옆에서 봤다

 

 

청량리 롯데캐슬건설현장부터 오른쪽 롯데월드타워까지다

 

 

동망봉 절벽
조선 영조는 1771년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자를 써서 이곳 바위에 새기게 하였지만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이 되면서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중앙청 공사 때 이곳 바위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동고등학교 방향

 

 

TOY SHOP(구 이화동마을박물관)

 

 

인왕산 · 백악(북악)산

 

 

낙산정(駱山亭)
낙산을 복원하면서 만든 정자로 서울의 내사산인 백악산(북악) · 인왕산 · 남산이 한눈에 보인다

 

 

홍덕이밭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뒤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심양에 있을 때
나인 홍덕이가 채소를 가꾸어 김치를 담가서 효종에게 드렸는데
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김치 맛을 잊을 수 없어 낙산 중턱에 채소밭을 홍덕이에게 주어
김치를 담가 대게 했다 하여 낙산에 홍덕이밭이라는 지명이 전해진다

 

 

낙산성곽
한양도성은 처음 축조된 뒤에도 여러 차례 보수 · 개축되었다
이러한 개 · 보수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武堂)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7호
세종 때 없앤 삼군부를 흥선대원군이 1865년(고종 2) 부활하면서 그 청사로 1868년(고종 5)에 지은 건물로
조선 말기에 설치된 삼군부의 청사(청헌당 · 총무당 · 덕의당) 가운데 중심 건물이었고 1930년대에 현재 자리로 옮겼다

 

 

북한산 마루금

 

 

혜화문
낙산(126m) 성곽이 도로로 짤렸다

 

 

혜화문(惠化門)
한양의 사소문 중 북동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속칭 동소문이라고도 부른다
한양성곽이 축성된 1396년 당시에는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의 동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바뀌었다
문루가 없던 것을 영조 때 지어 올렸으나 문루는 1928년 · 홍예는 1938년에 헐렸는데 1992년 본래 자리보다 약간 북쪽에 옮겨 복원하였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관(옛 서울시장 공관)
서울시장 공관은 서울 시내 얼마 남지 않은 1940년대 목조 건축물이다
1959년부터 20년간 대법원장 공관으로 4 · 19혁명재판 판결문이 작성되는 등 대한민국 사법부의 중요한 역사현장이다
또한 1981년부터 2013년까지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면서
시민들과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는 등 24시간 잠들지 않는 행정이 이루어진 서울시 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옛 서울시장 공관 마당
옛 서울시장 공관은 2016년 한양도성 전시 · 안내센터(전시관)로 바뀌었다

 

 

옛 서울시장 공관
방 구조물을 보여준다

 

 

한양도성 혜화동 제2전시실
한양도성과 혜화문 / 회화동 27-1번지 사진 (촬영 2009년)
혜화문을 통과하는 도로가 혼잡해짐에 따라 1915년 우회도로인 창경궁로 35길이 조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양도성 성벽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혜화문이 헐리고 확장된 도로로 인해 1994년 완료된 혜화문 복원 공사 당시 원래 위치보다 북서쪽으로 13m 이동하여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한양도성 혜화동 제1전시실 / 도성도(都城圖 · 17세기 말)
조선 영조 시대에 만들어진 〈조선강역총도〉에 포함된 〈도성도〉이다
〈조선강역총도〉는 〈고구려강역총도〉를 비롯한 이전 시대의 강역도와 제작 당시 조선의 지역별 지도 등이 세 묶음의 두루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도성도〉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도성의 모습을 간략하게 담은 지도로 채색이 아름답고 현재 남아 있는 도성도 중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혜화문의 문루가 없는 것으로 보아 1744년 이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한양도성 혜화동 제3전시실 / 시정관련 신문기사
역대 서울시장 공관으로 쓰인 이 건물의 흔적을 담은 공간이다
역대 서울시장과 관련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한양도성 혜화동 제3전시실 / 역대 시장 기증품
박원순 시장은 고무신 · 오세훈 시장은 생활한복 · 이명박 시장은 야구공과 글러브를 각각 공관의 추억으로 내놓았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관(옛 서울시장 공관)
현재 공사중이다

 

 

혜성교회

 

 

혜화문에서 경신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골목길

성벽이 주택과 학교 담장 축대로 쓰였다

 

 

경신고등학교
1885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정동에서 창립하여 아동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연혁의 시작이다

 

 

선잠단지 · 성북동 기도의집
북한산 마루금이 너머로 보인다

 

 

성북공원 방향이다

 

 

서울왕돈까스
이곳에서 메밀우동 · 돈까스로 점심을 했다

 

 

와룡공원

 

 

와룡공원 성곽길 조망지점
서울 밤 풍경 조망지점 안내판이다

 

 

북악 팔각정

 

 

성북동

 

 

와룡공원 성곽

 

 

와룡정
이곳에서 성밖으로 나가야 한다

 

 

와룡정을 지난 성밖 길이다

 

 

소나무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팔각정
아래 삼청각이 있다

 

 

말바위
조선시대 말을 타고온 사람들이 산에 오르기 전에 이 바위에 말을 매어 두어 말바위라 불리기도 하고
백악(북악)산의 산줄기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는 설도 있다
*
(2015. 9. 5 사진)

 

 

말바위쉼터
2019년부터 서류 작성과 신분증 확인 없이 출입증을 받는다

 

 

숙정문(肅靖門) / 사적 제10호
한양도성의 북대문으로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숙정문으로 바뀌었다
현존하는 도성의 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유일한 문이다
1976년 문루를 새로 지었다

 

 

촛대바위

 

 

백악 곡성(曲城)
곡성은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하는데 백악산과 인왕산에 하나씩 있다

 

 

백악 곡성(曲城)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4월 북악산 전 구간을 처음으로 개방하고
전체가 아닌 성곽길(와룡공원~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탐방로로 출입을 제한하였으나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북악산 개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소통과 개방의 취지를 살리겠다"고 언급한 것에 따른 후속 조치의 일환으로
2020년 10월 1단계 개방개획에 따라 현재와 같이 한양도성 북악산 성곽으로부터 북악스카이웨이 사이의 성곽 북측면 탐방로가 개방되었다
그동안 통행을 가로막았던 성곽 철책 일부를 제거해 청운대~곡장 구간의 성곽 외측 탐방로를 개방하게 되어 한양도성으로의 접근이 쉬워지게 되었으며
2022년 상반기에는 2단계 개방계획을 통해서 50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성곽 남측면도 개방하게 될 예정이다

 

 

북한산 마루금
보현봉 · 승가봉 · 사모바위 · 비봉 · 향로봉이다

 

 

백악(북악)산

 

 

백악 곡성에서 내려가는 길이다

 

 

암문(暗門)
한양도성 북악산 성곽으로부터 북악스카이웨이 사이의 성곽 북측면 탐방로가 개방되었다
성곽 외측 탐방로의 개방으로 한양도성으로의 접근이 쉬워지게 되었다

 

 

백악산 조망 명소 쉼터
왼쪽 곡장 · 오른쪽 촛대바위가 보인다

 

 

청운대(靑雲臺) ·  293m

 

 

청운대(靑雲臺 293m) 빗돌

 

 

청운대 목련
겨울철에 목련이 꽃봉오리를 벌린다

 

 

북한산
청운대 전망데크에서 봤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가경구년 갑자 십월 일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편수 용성휘
(嘉慶九年 甲子 十月日 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순조 4년(1804) 10월 오재민이 공사를 이끌었고, 공사 감독은 이동한이 담당했으며
전문 석수 용성휘가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이다
*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 축성 책임 관리와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1 · 21사태 소나무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타운(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 · 경과 치열한 교전 중 현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 · 21사태 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
1월 21일 교전 후 14일간 작전 결과 침투한 31명 중 28명 사살 · 2명 도주 · 1명을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1968. 4. 1)이 창설되었다

 

 

백악산(白岳山 342m)
북한군의의 공중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해 1979년 10월 15일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이며
2000년 9월 9일 보다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백악산 정상석 옆에 북악산 복원 비가 있다
*
북악산은 예부터 백악산(白岳山)이라 불렸다
청렴을 뜻하는 백(白)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도망을 뜻하는 북(北)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산이라 흔적을 남긴 걸까?

 

 

백악산(白岳山 342m) 정상 빗돌
1396년 처음 성을 쌓을 때 공사구간을 96개로 나누고 각 구간의 이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붙였다
백악 정상을 기점으로 천(天)자 구간이 시계방향으로 시작되고 마지막으로 조(弔)자 구간이 끝난다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데크길이다

 

 

북한산 마루금
보현봉이 가운데 우뚝하다

 

 

창의문 안내소
출입증을 반납하는 곳이다

 

 

창의문(彰義門)
백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속칭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한다

 

 

인조반정공신(癸亥擧義靖 社功臣 · 개해거의정 사공신) 현판
영조가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누문 다락에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 놓았다
*
一等(일등) 昇平府院君 金瑬(승평부원군 김류) 등 7명
二等(이등) 順興君 金慶徵(순흥군 김경징) 등 12명
三等(삼등) 啇原君 朴惟明(상원군 박유명) 등 27명이 기록되어 있다
*
(2015. 9. 5 사진)

 

 

창의문
고갯마루가 청계천의 시점이다
고갯마루 너머로 흐르면 홍재천에 흡수된다

 

 

최규식 경무관 상
서장 재직 중이던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일행이 청와대 바로 옆에 이르렀을 때 최규식 서장이 그들을 검문하며 막아섰고
검문을 통과할 수 없었던 공비들이 외투속에 감추고 있던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최규식 서장은 가슴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현장에서 순직했다
최규식 경무관과 함께 순직한 정종수 경사 상이 옆에 있다
*
어제 54주기 추모행사가 있었다

 

 

청운중학교
1 · 21사태로 버스에 타고있던 청운중학교 3학년 김형기(17)군이 사망했다

 

 

북한 무장공비 침투를 저지한 곳 빗돌
1968년 1월 21일 22시 10분 경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공격하기 위해 침투했을 때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가 육탄으로 저지하여 순국한 곳이다

 

 

중국 굴피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3m · 둘레 3.1m · 나이 415년 · 지정일자 1981. 10. 27

 

 

회화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6m · 둘레 3.8m · 나이 430년 · 지정일자 1968. 7. 3

 

 

청와대 영빈관 앞 분수광장

 

 

4 · 19 최초 발포 현장 바닥 동판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 몰려든 시민들을 향해 국가 권력이 처음으로 발포했던 곳으로
이날 이승만 전 대통령이 머물던 경무대로 가기 위해 중 · 고 · 대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무차별 총격이 시작됐다
발포로 인해 시민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다쳤다
*
청와대 영빈관 앞 분수광장 바닥에 설치됐다

 

 

청와대 사랑채
본래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68년 1 · 21사태 이후 경호를 위해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1996년 2월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며 국민의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로 개조하여 효자동 사랑방으로 개관하였고
 2010년 1월 기존의 효자동 사랑방을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개축하여 청와대 사랑채로 개관하였다
*
(2019. 3. 23 사진)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촛불

 

 

예전 진명여자고등학교 터 빗돌

 

 

1907년 개교 1주년
빗돌에 있는 사진이다

 

 

대한국적십자병원 터(大韓國赤十字病院 址)
예전 정부 서울청사 창성동별관이다

 

 

경복궁 영추문(景福宮 迎秋門)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의 반대편인 서쪽 문으로 「가을을 반긴다」는 의미다
 1926년 일제에 의해 문 앞에 전차 종점이 만들어지면서 주변 담장과 함께 사라졌다
1975년 복원된 이후 43년 만인 2018년 12월 6일 개방됐다

 

 

동아일보 사옥

 

 

서울도시건축전시관
*
마침점은 시청역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3.95km, 소요시간 6시간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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