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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 안내센터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관(옛 서울시장 공관)은 서울 시내 얼마 남지 않은 1940년대 목조 건축물이다
1959년부터 20년간 대법원장 공관으로 4 · 19혁명재판 판결문이 작성되는 등 대한민국 사법부의 중요한 역사현장이다
또한 1981년부터 2013년까지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면서
시민들과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는 등 24시간 잠들지 않는 행정이 이루어진 서울시 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관(옛 서울시장 공관)
혜화동은 한양도성의 동북문인 혜화문(惠化門 동소문)에서 유래되었다

 

 

한양도성과 혜화문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分界之圖)
한양도성은 전쟁을 목적으로 산 위에 쌓은 요새가 아니라 조선왕조를 상징하고 수도 한성부의 도시 공간을 관리하기 위하여 쌓은 도시 성곽이다
왕조의 중심인 궁궐과 종묘를 보호하고 도시의 안과 밖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사산의 능선에 따라 축조되었다
영조는 1751년(영조 27)에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금송(禁松) · 준천(濬川) · 수성(守城)으로 이어지는
도시 관리 정책을 담아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을 반포하였다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사산의 숲 · 도시의 물길 · 도성의 방어가 한몸같이 긴밀한 관계임을 인식하면서
이제까지 왕의 공간으로 여겼던 수도를 사민(士民)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선언하였다
아울러 한양도성을 세 구간으로 나누고
도성의 방어와 관리를 맡은 훈련도감 · 금위영과 어영청의 삼군문에서 관리하도록 도성삼군문분계지도에 표시하였다
어제수성윤음에 수록된 최초의 서울 지도이며 가로는 42.8 cm · 세로는 29.2cm으로 목판본 지도이다

 

 

한양도성
태조 이성계는 1394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2년 후인 1396년(태조 5)부터 2년여 동안
강원 · 경상 · 전라 서북면 · 동북면의 백성 197,400여 명을 동원하여 도성을 쌓게 하였다
처음 완성되었을 때 평지는 흙으로, 산지는 돌로 쌓았으나 1422년(세종4)에 토성을 모두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세종은 성곽을 구간으로 나누어 축성과 이후 보수의 책임을 명확히 하였다
1704년(숙종 30)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도성의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되었고
백성이 아닌 도성의 군영이었던 훈련도감 · 금위영 · 어영청이 담당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되었다
한양도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1396~1910) 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 혜화동 제1전시실 / 도성도(都城圖) / 17세기 말
조선 영조 시대에 만들어진 〈조선강역총도〉에 포함된 〈도성도〉이다
〈조선강역총도〉는 〈고구려강역총도〉를 비롯한 이전 시대의 강역도와 제작 당시 조선의 지역별 지도 등이 세 묶음의 두루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도성도〉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도성의 모습을 간략하게 담은 지도로 채색이 아름답고 현재 남아 있는 도성도 중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혜화문의 문루가 없는 것으로 보아 1744년 이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한경지략(漢京지略)
"대략 40리 되는 도성 둘레를 돌며 성 안팎의 꽃과 버들을 구경하기를 사람들이 즐겨한다
이른 새벽에 시작하면 저녁 종이 칠 무렵 마칠 수 있는데 산길이 험하고 힘들어 되돌아오는 이도 있다"
*
정조 때 조선의 도읍지인 한성부 성곽 · 궁궐 · 산천 · 고적 등의 모습과 발자취를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로 추정된다

 

 

운양집(雲養集)
"5월 20일 송동에 앵두가 익었다기에 윤옥거와 다시 순성하기로 약속하고
운가 심기택을 데리고 함께 연사를 찾아갔더니 동촌의 여러 친구들도 와서 모였다"
*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문장가인 김윤식의 글을 모은 시문집이다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가 혜화문 근처 송동으로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소문도(東小門圖)
겸재 정선이 혜화문(동소문)을 바라보고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혜화문의 문루가 없는 것으로 보아 1700년대 중반에 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혜화문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약 150년 동안 그대로 사용되다가 1744년(영조 20) 8월에 재건하였다

 

 

근대까지 이어진 순성놀이
일제강점기의 순성 관련 기사 및 모집 광고

 

 

한양성곽 모형도

 

 

서울입체전경도 / 1962년
1962년에 발행된 여행안내용 지도로 여행자를 위해 필요한 지역 정보와 교통 정보 등을 간략하게 도식화하였다
전차 노선과 기차역 · 중앙청 · 청와대 · 여의도 비행장을 비롯하여 주요 시설과 지명 등을 알기 쉽게 적어 놓았다
도성 안과 용산 및 영등포 지역을 조감도처럼 그리고 그 양 옆과 여백에는 9개 구청별 동명과 긴급전화란 및 새로 편입될 동명 등을 안내하였다

 

 

서울 주변 성곽 옛모습 복원 / 동아일보 1975년 1월 20일 6면
서울시가 한양도성의 성곽 10.88km를 복원하고 광화문과 숙정문의 문루와 석축도 해체 · 복원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기사로
조선왕조 19대 왕인 숙종조 이후 처음 있는 대대적인 성곽 보수 공사라고 밝히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1961년 창의문 동쪽 성벽 보수를 시작으로, 창의문~인왕산 구간 보수(1963년)
숭례문 복원(1965년) · 광화문 이전 복원(1975년) · 숙정문 복원(1976년)에 이어 1994년 혜화문을 이전 복원 공사를 진행하였다

 

 

경성안내도 / 1930년대 후반
1899년(광무 3)에 고종황제에 의해 전차가 대한제국에 수입되었다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 노선이 개통되고 40년이 지난 1939년에 창경원~혜화정 구간을 추가하였고
1936년 대경성계획에 따라 돈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면서 1941년에는 철거된 혜화문 자리를 지나 돈암정까지 노선이 연장되었다
해방 후에도 서울시민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전차는 교통량의 증가와 시내버스 보급으로 1968년 11월에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옛 서울시장 공간 벽 내부

 

 

혜화동 옛 서울시장 공관
1941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2016년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 안내센터〉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이곳 혜화동 27-1번지(창경궁로 35길 63)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들과 함께하였다
원래 개인 소유의 주택이었던 이 건물은1959년부터 대법원장 공관으로 1981년부터 2013년까지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었다
한양도성의 성곽을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여러 차례 철거 논란이 있었으나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하기로 결정되었다
지금은 한양도성 순성길의 쉼터이자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하었다

 

 

구보씨 사진 구경가다(1883~1945)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1917~1948)
키스 동양의 창을 열다(1920~1940) 영국화가가 그린 아시아
*
예전의 서울을 알 수 있는 책들이다

 

 

1941 - 1959 / 개인주택
혜화동은 북촌에서는 드물게 문화주택이 몰려 있던 곳이었다
문화주택은 서양식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택이었다
남자를 위한 응접실, 여자를 위한 입식부엌과 뾰족지붕을 특징으로 하는 주택에서 한인은 온돌에 · 일본인은 다다미방에 살았다
혜화동 옛 시장공관은 영화제작자였던 일본인 다나카 사부로가 지었다
현관 입구에 응접실이 있는 문화주택이지만 내부에는 도코노마가 있던 집이다
이 집은 성곽 위에 지어졌는데, 이는 1907년에 성곽이 해체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해방 후 소유주가 변경되었고 1959년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3명의 개인 거주자가 이 집을 거쳐갔다

 

 

1959 - 1979 / 대법원장 공관
1979년까지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되면서
우리나라 3~4대 대법원장 조진만 판사와 5~6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민복기 판사가 거주하였다

 

 

1981 - 2013 / 서울시장 공관
1981년 대법원장 공관은 서울시장 공관으로 전환되었다
제18대 박영수 시장부터 2013년 제35대 박원순 시장까지 33년 동안 총 13명의 서울시장이 혜화동 시장공관에 거주하였는데
더러는 재임기간 중 이곳에 거주하지 않았던 시장들도 있었다
1층은 공적 업무를 위한 회의실과 응접실로, 2층은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사적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91 - 2010 / 건물의 보수 및 증축
1991년, 노후화된 시설을 정비하고 공관의 쓰임새에 맞춘 대대적인 수리가 진행되었다
인수인계 등으로 비어 있는 동안에는 집 주변의 수목이 밀림처럼 우거져 입주를 꺼리는 시장들도 있었다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는 동안 크게 총 세 차례에 걸쳐 개 · 보수가 진행되었고 오세훈 시장 거주 당시에는 지붕에서 비가 새기도 하였다
한양도성 성벽의 하부 구조 위에 지어진 건물의 일부는 철거되었다

 

 

1992 - 1994 / 혜화문 주변 성곽 복원
1968년부터 시작된 한양도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정도 600년이 되는 해인 1994년에
혜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13m 비켜난 현재의 위치에 다시 지어졌다
혜화문 복원과 함께 주변 성곽의 보수 및 복원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시장공관을 둘러싼 성곽의 일부도 함께 복원되었다

 

 

2007 - 2014 / 시장공관 존치 논란과 임시개방
한양도성 복원사업 과정에서 성곽을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시장공관 건물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몇 차례 진행되었다
2012년에 마련된 한양도성 보존관리활용 마스터플랜은 한양도성의 재현이나 복원이 아닌
원형 존중과 보존에 초점을 두고 있어 시장공관을 존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13년 발굴조사를 통해 시장공관이 성곽의 하부 구조를 침범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면서
한양도성이 품고 있는 다양한 시간의 흔적 중 하나로 이 집을 보존하되 시민을 위한 개방된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최종 결정되었다
2013년 12월 13일 시장공관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고
2014년에 건물의 역사와 역대 서울시장의 시정활동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임시개방하였다

 

 

대경성부대관 · 혁명재판 판결의 산실 대법원장 공관

 

 

대경성부대관 / 1936년
혜화동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미개발지역으로 1930년대 후반까지도 밭이 주를 이루었다
혜화동 27-1번지는 원래 밭이었다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된 〈대경성부대관〉에는 건물이 지어지기 전 농지로 사용되었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1915년 창경궁로 35길이 조성된 이후 혜화동 일대는 필지가 분할되고 밭에서 대지로 지목이 전환되는 비율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논밭이었던 땅이 1938년에는 대지로 다수 전환되었다

 

 

구 등기부 제10책 제46장
1941년 다나카 사부로 소유로 최초 등기부에 등재된 이후
1959년 대법원에서 구입하기 전까지 건물 소유자의 이름과 매매 및 취득일이 기록되어 있다

 

 

조순 시장 거주 당시 실내 전경 / 1995년

 

 

서울시장 관사 수리 / 동아일보 1991년 8월 27일 22면
수리를 마친 시장공관은 시정 업무를 위한 주요 행사를 위한 리셉션 장소와 회의실 · 영빈관 등 공적인 용도로만 사용하기로 하였다
*
서울시장 공관 9개월째 빈집(경향신문 1995년 8월 14일 21면)
입주를 꺼릴 정도로 건물이 매우 낡아 수리가 진행되었고 외부 방문객을 위한 응접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20평(66㎡)을 넓혔다

 

 

1995년 공관 서측 · 2013년 공관 서측

 

 

혜화문 복원공사 도면 / 1987년

 

 

창의적 복원
시장공관을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 안내센터〉로 리노베이션하다

 

 

모형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 안내센터〉 리노베이션 콘셉트와 건물 구성을 보여주는 모형이다
지어질 당시의 원형을 보존하는 구조(structure) 부분과 새롭게 구성되는 부분을 개념적으로 표현하였다
건물이 한양도성 및 대지와 관계 맺음을 보여주는 단면적인 공간 구성을 읽을 수 있다

 

 

그때 그 사진 한 장(글 · 사진 전민조)

 

 

제4전시실
시장공관 건축 연혁 · 시장 기증도서 및 도성 관련 도서 · 전시 안내센터 모형 · 혜화동 주변 예술인 작품 등이 있다

 

 

님의 침묵 · 성북동비둘기 · 동경 · 근원수필
천변풍경 · 고산시가 · 삼대
*
근현대 서울의 성북동 일대는 예인들의 창작과 교류의 터전이었다
문학 분야의 김광섭 · 박태원 · 이태준 · 전광용 · 조지훈 · 한용운 · 미술분야 권진규 · 김기창 · 김용준 · 김환기 · 박래현 · 변종하 · 송영수
문화재 분야 전형필 · 최순우 · 음악 분야의 윤이상 등 수많은 예인들이 그들의 작품속에 성북동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승무 · 청록집 ·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 사상계 35호
마해송 동화집 · 행복에의 흰손들
*
혜화동 고개에 올라서서 성(城) 돌에 앉아 우이동 연봉을 바라보는 맛과
삼선교에서 성북동 뒷산을 보며 황혼길을 걸어오는 맛은 동양화의 운치가 있다
돌의 미학 / 조지훈 1964년

 

 

한성판윤~ 서울시장 연표
794대 한성판윤 윤동형 / 취임일 1753년(영조29) 1월 2일 · 퇴임일 1753년(영조29) 1월 17일 · 재임기간 16일
1674년(현종 15)~1754년(영조 30). 81세 · 조선 후기의 문신 · 본관은 파평 · 자는 사임(士任)
장령 순거의 증손으로 · 할아버지는 수찬 절이고 · 아버지는 덕교이고 · 어머니는 김화옥의 딸이다 · 윤증의 문인이다
1711년(숙종 3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 3등 47인이 된 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 14등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사서 · 수찬 · 지평 · 사간을 역임하였다
이어 응교 · 사간 · 대사간 · 공조참판 등을 지냈고 1753년(영조 29) 한성부판윤에 올랐다가 지돈녕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사람이 온아하고 자상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옛 시장공관의 구조

 

 

한양도성 혜화동 제3전시실 / 시정관련 신문기사 · 역대 시장 기증품
역대 서울시장 공관으로 쓰인 이 건물의 흔적을 담은 공간이다
역대 서울시장과 관련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박원순 시장 고무신 · 오세훈 시장 생활한복 · 이명박 시장 야구공과 글러브를 각각 공관의 추억으로 내놓았다

 

 

제22대 · 31대 고건 시장
경신년(2000년) 7월부터 신묘년(2001년) 12월까지 사용한 업무 일정표

 

 

박원순 시장공관 · 내일 시민에 공개

 

 

제32대 이명박 시장
하이서울 장학생에게 보내는 친필 편지 초고와
2003년 10월 23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벌어진 챔피온결정전 3차전 시구 당시 사용한 글러브와 야구공

 

 

제33 · 34대 오세훈 시장
혜화동 시장공관 거주 당시 일상복으로 착용했던 개량한복과 시장 부부의 이름이 새겨진 컵

 

 

옛 서울시장 공관
방 바닥 구조물을 보여준다

 

 

한양도성 혜화동 제2전시실
한양도성과 혜화문 · 회화동 27-1번지 사진 / 촬영 2009년
혜화문을 통과하는 도로가 혼잡해짐에 따라 1915년 우회도로인 창경궁로 35길이 조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양도성 성벽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혜화문이 헐리고 확장된 도로로 인해 1994년 완료된 혜화문 복원 공사 당시 원래 위치보다 북서쪽으로 13m 이동하여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
옛 서울시장 공관
성벽이 짤라진 오른쪽 붉은 지붕이다

 

 

옛 서울시장 공관 마당
옛 서울시장 공관은 2016년 한양도성 전시 · 안내센터(전시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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