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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벽골제~장화리 쌀뒤주

벽골제와 아리랑문학관을 보고

아리랑문학마을과 장화리 쌀뒤주를 거쳐 오기로 했다

 

벽골제 정문

 

 

 

 

농경사주제관 · 체험관

벽골제 관광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어

벽골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해 주는 교량 역활을 담당한다

관리공간과 학습공간은 1층, 어린이박물관은 2층

벽골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3층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다

 

 

 

 

명금산

 

 

 

 

벽골제 쌍룡

벽골제 제방을 훼손코자 하는 청룡과

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백룡이 살았다는 설화가 있어

본 소재로 쌍룡을 형상화하였다

*

조연벽의 꿈에 벽골제 용이 나타나 벽골제를 빼앗으러 온 흑룡을 퇴치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다음날 조연벽은 활로 흑룡을 물리쳤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벽골제 용은 자손이 흥할 것을 약속하였다

 

 

 

 

벽골제 장생거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벽골제에는 5개의 수문이 있었고

그 명칭은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 하였다

그 중 장생거와 경장거는 1975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1980년대 수문에 대한 복원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수문은 벽골제 수리기록으로 보아 1415년(조선 태종 15) 이전부터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문은 오늘날 수리시설에서 자주 사용하는 갑문구조와 같은 방식으로

수문을 통해 주변 농경지에 물을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김제 벽골제 문화재 전경

 

 

 

 

벽골제 중수비각

김제 벽골제의 지정 내용에는 현존 제방 약 2.5km와 더불어

1415년 중수를 기념하는 벽골제 중수비가 포함되어 있다

중수비는 1415년(조선 태종 15) 당시 수군도만호였던 김제 사람 박초가 썼으며

중수비 비문은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문이 전해진다

 

 

 

 

벽골제 중수비(사적 제111호)

중수비 내용은 벽골제와 김제군명의 연원, 고적에 기록된 벽골제의 규모와 관개유역

태종의 치수 의지, 각급 공사주체와 인력 규모, 공사의 난이점, 제방 제원의 세부 및 완공 시기가 정리되어 있다

중수비의 원래 위치는 신털미산 정상부이나, 1980년 유적을 정비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현숙효열비

가수 현숙의 효열비로 부모님이 양 옆에 앉아 계신다

아리랑문학관 옆에 있다

 

 

 

 

벽골제탑 ·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기념탑

청해진은 828년(통일신라 흥덕왕) 지금의 완도에 설치되었던 해군 무역기지로서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을 역임할 무렵

중국 사람들이 신라 변방 사람들을 노비로 삼는 것을 보고 귀국한 뒤 설치한 것이다

이후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해적을 소탕하고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등

당과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하였다

이에 국왕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우상이 되어버린 장보고와 청해진 세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였고

중앙에서는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보내어 암살케 하였다

장보고가 죽고 염장이 청해진을 운영하는 동안 당과의 교역은 축소되었으며

또 다른 반란세력으로 대두될 수 있다는 판단으로

851년(문성왕 13)에 청해진 및 인근 주민 약 10만여 명을 지금의 김제 땅인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한 당시 이주민들은 벽골제 보수공사 및 동진강 유역의 간척공사, 방수공사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정래 아리랑문학관

 

 

 

 

벽골제가든

벽골제 음식점 두 곳도 문을 닫았더니 이곳도 문을 안 열었다

 

 

 

 

원평천

 

 

 

 

제1포교

 

 

 

 

신털미산

원래 신털미산 정상부에 벽골제 중수비(사적 제111호)가 있었으나

1980년 유적을 정비하면서 벽골제로 이전되었다

 

 

 

 

신덕교

 

 

 

 

원평잠관(院坪潛管)

 

 

 

 

신덕교

 

 

 

 

김제 거교비(去橋碑 · 김제시 향토문화유산 제5호)

전라도 관찰사 이호준과 김제군수 김선근의 업적을 기린 비석으로

벽골제 인근 원평천 일대가 큰 비만 오면 강을 가로막고 있는 다리로 인해

세 고을(금구, 김제, 태인)이 물에 잠겨 농작물 피해가 극심하자

김제군수 김선근이 이 다리를 철거하는 용단을 내려 민원을 해결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자연환경 및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관찰사나 군수의 공적비는 공적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으나

이 거교비에는 공적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향토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신덕1길

 

 

 

 

수문

 

 

 

 

집 지붕을 뚫고 자라는 나무

 

 

 

 

농사용 양수시설

 

 

 

 

신덕중앙교회

 

 

 

 

신덕동

 

 

 

 

아리랑교차로 토끼굴

 

 

 

 

홍지교

 

 

 

 

하얼빈역사

하얼빈역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끝없는 항쟁으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사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사살한 곳이다

1910년경 하얼빈역사를 60% 비율로 축소 복원했다

 

 

 

 

안중근 의사 조형물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등박문을 처단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 조형물이다

 

 

 

 

안중근 · 김구 · 유관순

 

 

 

 

하얼빈역사 1층 전시실

 

 

 

 

1층 복도

2층으로 올라가며 봤다

 

 

 

 

2층 전시실

 

 

 

 

청산리전투를 이끈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은

남쪽은 홍범도 장군이 사회주의자라고 해서

북쪽은 민족주의자라고 해서 김좌진 장군을 그들의 교과서에서 빼버렸다

〈취재이야기 중〉

 

 

 

 

청산리 대첩

 

 

 

 

독도

 

 

 

 

봉오동 전투

 

 

 

 

아리랑문학마을 일제수탈관

지평선을 이루는 징게맹갱 외에밋들

생명의 쌀이 있는 김제를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토지 강탈

조선총독부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명분은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것이었지만

사회경제 구조를 식민통치에 적합하게 개편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자 토지 약탈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는 절차를 아주 까다롭고 복잡하게 만들고

당사자가 소유권을 증명하는 증거주의를 내세웠으며 신고기간도 매우 짧게 하였다

이에 더해 가까스로 신고를 해도 수속 미비와 증거 불명으로 처리하였다

신고되지 않은 사유지와 공유지는 물론 소유관계가 불분명한 토지

그리고 조선의 왕실과 대한제국의 토지 모두가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렇게 확보한 토지의 일부를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지주들에게 무상,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구마모토공 적선불망비

구마모토 리헤이(熊本 利平)의 은덕으로 가뭄에 종자를 대어 추수가 가능했다는 내용이다

구마모토 리헤이는 1930~1940년 군산 개정에 본거지를 두고

1개 부(당시 군산), 5개 군(김제 · 정읍 등) 26개 면, 1,200여만 평을 소유한 전북 최대 일본인 지주였다

*

구마모토의 농장 경영은 일본인과 똑같은 고액의 월급으로 조선인 관리자를 고용하고

일본에서 관리자를 통해 소작농들을 원격 관리하는 방식으로

비료와 최신 농기구를 빌려주고 고리의 소작료와 비료대, 기계 사용료까지 착취하였다

그 바탕에는 생산력 증대를 통한 쌀 수탈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작동하였다

 

 

 

 

아리랑 문학마을 일제수탈기관

일제강점기 민중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미명하에

민초들을 착취하고 탄압하던 주재소, 면사무소 등 근대 기관들이다

 

 

 

 

명마마을

 

 

 

 

홍지교

 

 

 

 

담양전씨세거(潭陽田氏世居)

 

 

 

 

숲길

 

 

 

 

후장(后長) 마을

장화리 쌀뒤주가 있는 곳이다

 

 

 

 

성균진사 정공휘임지묘(成均進士鄭公諱任之墓)

 

 

 

 

효자 증통훈대부사헌부시평정지형지려(孝子 贈通訓大夫司憲府持平鄭志亨之閭)

조선 후기의 효자로, 호는 벽계(碧溪). 1868년에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이후 그의 손부(孫婦)와 증손부(曾孫婦)도 열녀로 알려져 정문이 내려졌다

그는 조선 순조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럽고 남달리 총명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눕자, 여러 방면으로 약을 구하고 밤이면 마당에서 아버지가 낫기를 간절히 빌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禮)를 다하여 장례를 치른 후 3년 동안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유학자들이 추천하고, 관찰사 서상정(徐相鼎)이 조정에 아뢰어, 1868년 4월에 정문이 내려졌다

 

 

 

 

열녀 성균진사 정환석지처 의인김제조씨(烈女成均進士鄭桓奭之妻宜人金堤趙氏)

정지형의 손부(孫婦)인 김제 조씨(趙氏)는 타고난 성품이 정숙하고 규범을 잘 지켰다

남편인 성균 진사(成均進士) 정환석(鄭桓奭)이 병들어 모든 약이 소용 없자

손가락을 셋이나 잘라 그 피로 목숨을 잇게 하고, 허벅지의 살을 베어 약을 달여 먹이니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7년 동안을 더 살았다고 전한다

관찰사 윤영신이 조정에 아뢰어 정문을 세웠다

*

열녀 통덕랑 정방변지처 공인경주이씨지려(烈女通德郞鄭邦變之妻恭人慶州李氏之閭)
정지형의 증손부 경주이씨(李氏)는 통덕랑(通德郞) 정방섭(鄭邦變)의 아내로

시어머니가 병으로 몸져눕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올렸다

또 남편이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자,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고 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빌었다

그 동안 열 번이나 손가락을 찢고 세 번이나 허벅지의 살을 베어 정성을 다하였다

이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뒤를 따랐다

관찰사 이헌식이 조정에 아뢰어 정문을 세웠다

 

 

 

 

장화리 쌀뒤주(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1호)

조선 고종(1963~1907) 때 만든 것으로 이곳에 거주하는 정종수가 보존하고 있다

옛날 정씨 집안은 조상 대대에 걸쳐 만석군으로 불리우던 큰 부호였다

부자인만큼 인색하지 않아 매일 수백 명의 손님이 찾아와 머물렀다

많은 사람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집 안마당에 거대한 쌀 뒤주를 만들었는데

가득 채우면 70가마의 쌀이 들어갈 정도였으나 이것도 한 달 식량이 채 못되었다고 한다

나무로 남든 사각형 뒤주는 높이 1.8m, 너비 2.1m, 판재 두께 3.3cm이며

일반 건물처럼 위에는 초가지붕을 얹고 아래에는 주춧돌을 놓았다

뒤주 문틀에는 8개의 판자를 끼워서 사용하였으나 현재 1개가 분실되어 7개가 있다

*

정종수(鄭鍾洙) 후손께서 본가는 물론 마을을 안내해주셨다

 

 

 

 

회화나무

나라에서 내린 나무로 일반적으로 가정 집에는 안 심는다

 

 

 

 

정화암(鄭華岩 1896 ~ 1981) 생가

정화암은 김제시 장화동에서 태어나 3 · 1운동과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아나키스트다

1920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기관인 독판부를 조직하여

국내 연락망을 결성하는 한편 7월에 미국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했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후 북경으로 가서 아나키즘 독립운동가와 만나 폭탄 제조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 방안을 강구하였다

한편 중국의 혁명 세력들과 함께 동방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했으며

상해해방연맹, 흑색공포단 등을 조직하여 친일파 및 전향자들을 처단하고

일본영사관과 일본군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가수 현숙(본명 정현숙) 생가

예전엔 동래 정씨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외지인이 50% 정도 산다

 

 

 

 

장화교회

언덕 위에 있다

 

 

 

 

후장마을 노인정(회관)

 

 

 

 

장화교회

정자 우측에 있다

 

 

 

 

가작회관(加作會館)

 

 

 

 

가작버스정류장

음식점 세 곳이 모두 문을 닫아 버스를 탔다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2.07km, 소요시간 6시간 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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