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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야기

김제 성산

김제 성산(41m)은 김제시 서쪽에 위치한 낮은 언덕으로 시민의 휴식처이다
이곳에는 김제향교와 심신을 연마하는 홍심정이 있으며 중앙광장에는 6 · 25동란 중 산화한 전몰군경의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다
삼한시대부터 조선조 5백년에 이르기까지 김제의 소재지로서
석성과 토성으로 된 성곽이 있었는데 원형은 사라지고 지금은 토성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성산공원사거리

 

 

성산공원 안내판
성산공원 주차장 들머리에서 첫 번째 갈림길이다

 

 

김제시의회
김제시청 옆에 있다

 

 

느티나무 보호수
품격 시나무 · 나무둘레 3.5m · 나이 500년 · 지정일자 1992. 5

 

 

고산 최학규 선생 시비 · 벽성12동천비 · 우란회기념비
3개의 빗돌이 함께 있다

 

 

고산 최학규 선생 시비(古山 崔學奎 先生 詩碑)
천문동 푸른 골짝을 은하가 이어 흘러 내 가느란 혈관에도 푸른 물소리 스며든다
*
금산사(金山寺) 시가 새겨 있다

 

 

벽성12동천(碧城十二洞天) 비
벽성의 지명 유래는 4세기 중엽 백제 비류왕 때 완성했다는 벽골지와 관련이 있다
벽(辟)은 벼(禾)를 뜻하고 성(城)은 골(骨 · 고을)과 통하므로 벼의 고장이라는 의미다
동천(洞天)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좋은 곳을 뜻한다

 

 

우란회기념비(又蘭會記念碑)
1972년에 세운 빗돌이다

 

 

성산전망대
일제강점기 물 저장탱크가 있던 자리에 세운 30m 높이의 3층 건물이다
전망대에 서면 김제의 너른 들, 김제의 어머니 산인 모악산과 새만금방조제까지 보인다
코로나 19로 문이 닫혔다

 

 

이상운 학생 순의비 · 반공투사 고 최주일 추모비 · 반공희생자위령비 · 충혼비

 

 

이상운 학생 순의비(李相云 學生 殉義碑)
이상운 학생은 1927년 생으로 충북 청원 출신이다
1943년 이리농림학교 2학년 때 일제의 쌀 수탈 통로를 막기 위해
주재소와 만경교를 폭파하려다 발각돼 일경의 혹독한 고문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반공투사 고 최주일 추모비

 

 

느티나무 보호수
품격 시나무 · 나무 둘레 2.8m · 수령 500년 · 지정일자 1992. 5

 

 

반공희생자위령비 · 충혼비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던 자리다

 

 

충혼비
일제치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몸바친 애국지사들과
한국전쟁 당시 반공전선에 앞장선 민간인 · 군인 · 경찰관들의 넋을 추모하고 그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반공희생자위령비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0m ·  둘레 3.4m · 나이 500년 · 지정일자 1992. 5. 14

 

 

용암서원(龍巖書院)
조선 성종 19년(1488년)에 세워졌으나 병화로 불타 없어지고
선조 8년(1575년)에 다시 지었던 것을 광해군 4년(1612년)에 성산 아래로 옮겨 세워졌다

 

 

용암원(龍巖院)
용암서원 외삼문이다

 

 

만화루(萬化樓)
김제 향교 외삼문이다

 

 

명륜당(明倫堂)

 

 

앙덕문(仰德門)
지성서원 삼문이다

 

 

지성서원
문이 닫혀 있다

 

 

김제 동헌(사적 제482호) 삼문
조선시대 동헌으로 1667년(현종 8) 군수 민도가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동헌 · 내아 · 피금각과 관리사가 남아 있다

 

 

근민헌(近民軒)
조선시대 동헌으로 1667년(현종 8) 군수 민도가 세웠다고 한다
현종 8년(1667년)에 군수 민도(閔燾)가 동헌을 세우고 이를 「근민헌(近民軒)」이라 칭하였으며
그 후 숙종 25년(1699년)에 군수 이세성(李世晟)이 동헌을 중수함과 아울러 그 명칭을 사칠헌(事七軒)이라 개명했다
1960년대 초까지 읍사무소로 사용하였고, 198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피금각(披襟閣)
동헌이 남향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피금각이 동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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