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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원주 원동성당

천주교 원주교구 원동성당(국가등록문화재 제139호)
풍수원과 부엉골에 이어 1896년 8월 17일에 강원도의 세 번째 본당으로 탄생하였다
그러나 그해 충청도 장호원에 본당이 설립되는 반면 부엉골은 공소로 격하되었으므로 실제로 원동은 두 번째 본당이라 할 수 있다
 1965년 3월 22일 원주교구 설정과 더불어 주교좌 본당으로 승격되어 교구 사목의 중심이 되고 있다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성당
1896년 8월 17일 설립된 성당으로 서울명동성당보다 오래된 성당이다
원주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원주 원동 본당
유신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한 획을 그은 지학순 주교가 「원주선언」을 한 곳으로
원주지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천주 은총의 모친
예수님께서 모든 은총의 근원이 되시기에 예수님의 어머니를 「천주 은총의 모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천주당(天主堂) 정면 중앙 종탑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는 1971년 10월 5일 원동성당에서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연좌 성토대회 · 가두시위 · 철야기도회 등으로 3일간 지속됐고 정권의 보복은 시작됐다
1972년 10월 26일 지학순 주교는 부산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다 계엄사령부에 연행됐다
지학순 주교는 곧 풀려났지만 유신으로 무장한 정권의 보복은 집요했다
결국 1974년 7월 6일 긴급조치 1 · 4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7월 8일부터 11일까지 원동성당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특별기도회가 열렸다
7월 10일 서울명동성당에서는 주교회의가 열려 「정의의 실천은 주교의 의무」라며
지학순 주교를 지지하고 전국 교회에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를 호소했다

 

 

성당 옆문
7월 23일 비상군법회의에 출석하라는 소환장을 받은 지학순 주교는 김수한 추기경 · 윤공희 대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양심선언에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면서
"유신헌법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학순 주교는 당일 다시 연행됐고, 뒤이어 원주교구 신부들이 연행됐다

 

 

요셉상
지학순 주교의 투쟁은 한국 가톨릭의 전환점이 됐다
7월 25일 주교회의에서 주교의 고통에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 프랑스 대사가 참석한 시국 미사가 열렸다
하지만 지학순 주교는 8월 12일 징역 15년 ·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사제관
1974년 9월 23일 원동성당에서 300여 명의 사제들이 모였다
밤을 새는 열띤 토론 끝에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이것이 사실상 정의구현사제단의 첫 탄생이다
하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식 탄생은 이틀 후인 9월 26일
서울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을 내세운 제1시국선언 발표로부터 삼고 있다

 

 

미카엘대천사
지학순 주교는 226일 동안의 옥고를 치루고 1975년 2월 18일 석방됐다
그의 원주 귀향을 맞기 위해 3만 명의 원주시민들이 원주역 앞에서 기다렸다
당시 원주시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대단한 환영 인파였다
지학순 주교가 원동성당에 도착할 때 한 청년이 외투를 벗어 길에 깔자
너도나도 외투를 벗어 길에 까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습과 비슷했다고 한다

 

 

소화유치원
1934년에 설립되었는데  입학하는 아이들이 없어 올해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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