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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공산성

웅진백제시기(475~538)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비단결 금강이 감싸 흐르는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1500년전 고대왕국 대 백제의 찬란했던 향취가 가슴속 깊이 다가온다

 

공산성

세계유산 백제역사 유적지구 빗돌

 

 

 

 

금서루 입구 비석군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이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을 공덕하는 내용을 새긴 공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세불망비, 우애불망비, 청덕선정비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의정, 도순찰사,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송덕비가 많다

 

 

 

 

목사 김효성 비(문화재자료 제71호)

조선시대 공주 목사였던 김효성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1828년 세운 비다

비몸과 머릿돌은 원래 모습이지만 거북모양의 받침돌은

비를 옮기는 과정에 없어져 사각형 받침으로 대신하였다

김효성은 본관이 광주이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의금부도사를 거쳐 청주목사와 공주목사를 거쳤다

 

 

 

 

제민천교 영세비(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

1817년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이를 재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문에는 1818년 여름 홍수로 다리와 둑이 무너지자 다리의 복구를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쌓은 일은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모두 완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업 자금의 조달방법 및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의 자금을 지원한 강신환 등 10여명의 일반백성 이른도 있다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한 공산지의 문헌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민천교 영세비

금서루에서 봤다

 

 

 

 

공북루

금서루 뒤로 보인다

 

 

 

 

서문에서 바라본 공주 시가지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인 황새바위와

그 뒷편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 방향이다

 

 

 

 

쉼터

 

 

 

 

봉황산 방향이다

 

 

 

 

공산성 백제시대 건물지

백제시대 왕궁의 일부로 사용된 건물 터이다

 

 

 

 

인조와 쌍수정 이야기

1624년 인조임금이 왕위에 오른 직후 나라에서 주는 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란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왕이 된지 1년도 못되어 도성을 떠나 공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인조는 공산성의 두 그루의 큰 나무에 기대어 시름을 달래곤 했는데

얼마 후 반란군을 완전히 토벌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놓은 인조는

그동안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나무에 정3품의 벼슬을 내리고 금대를 걸어주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훗날, 이곳에 지은 정자가 바로 쌍수정이다

 

 

 

 

쌍수정(雙樹亭)

인조 임금은 이괄의 난을 피해 1624년 잠시 공주레 피난 온 적이 있었는데

피난 중에 우성면 목천리 인근에 살던 임 씨가 임금님께 콩고물에 묻힌 떡을 바쳤다

맛이 있구려, 그런데 떡의 이름은 무엇이요? 하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면 이 떡은 어느 댁에서 만들었소?

임씨 댁에서 만들어 바쳤습니다

인조 임금님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임씨라... 그것 참 맛이 절미로다"

그리하여 임씨가 바친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세월이 흘러 임절미는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로 바뀌었고

공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공주떡이 되었다

 

 

 

 

쌍수정(雙樹亭) 현판

 

 

 

 

쌍수정(雙樹亭) 후면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각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다

비에는 이괄의 난과 인조가 공산성으로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유형문화재 제35호)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쌍수정 사적비는 1624년 인조가 공주를 떠난 직후 세우려고 했으나

84년이 지난 1708년에 지금의 비석이 세워졌다

 

 

 

 

공산성 백제 왕궁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475년 이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 터다

공주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지대에 있는데

1935년에 기마병 훈련장으로 사용하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그 후로 1985년까지는 전국자전거대회를 여는 등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1985~1986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왕궁터 주변을 평평하게 만드는 큰 토목공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백제시대 기와와 토기, 청동거울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공산성 백제 연못

공산성 왕궁 터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인공 연못이다

빗물을 받아 저장하여 연못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화재가 났을 때는 소방용으로도 사용하였다

 

 

 

 

 

공산성 백제 연못

연못은 지름 약 9.5m 정도로 땅을 판 후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너비가 40~50cm 정도 되는 얇고 평평하게 다듬은 돌을 깔았다

연못 벽 뒤에는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하여 1m 너비로 점토를 두껍게 채웠다

연못 안에서는 많은 양의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봉황산 방향이다

 

 

 

 

공산성 진남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 문 터가 확인되는데

그 중에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 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에는 영동루,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공산성 임류각지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에 세운 임류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왕의 궁의 동쪽에 임류각을 지었는데

건물의 높이가 5장(약 15m)에 이르는 고층 누각이었다고 한다

 

 

 

 

공산성 깃발 이야기

공산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동쪽에는 청룡, 서쪽 백호, 남쪽 주작, 북쪽 현무를 각각 배치하였다

 

 

 

 

영동루

 

 

 

 

 

동문에서 바라본 공주 시가지

대통이라 쓰여진 기와의 발굴로 드러난 백제 최초 가람배치 사찰이라는 대동사지

이동이 빈번했던 충청감영이 비로소 봉황산 아래에 200여 년간 자리잡은 조선시대 충청감영 터

동학농민전쟁의 피눈물이 흐르는 최후의 결전지인 우금치전적지 등이 있다

 

 

 

 

광복루

공산성에 가장 높은 전망대가 광복루다

광복루는 원래 지금의 이 자리가 아니라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하게 될 때

공산성에 있던 중군영도 폐쇄되어 쓰임새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 때 일본 데라우찌 총독이 공주를 장문한다는 기념으로

해상루의 위치를 옮겨 웅심각이라 바꾸고 말았다

그러나 광복 직후인 1946년 공주를 찾은 백범 김구 선생님은

나라를 되찾은 것을 기리는 마음에서 광봉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공산성 명국삼장비(유형문화재 제36호)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8년에 명나라의 세 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가

왜군에게 피해를 많이 받은 공주에 들어와 머물면서 주민들을 보호한 업적을 기린 송덕비다

 

 

 

 

금강 상류 방향이다

 

 

 

 

공주시

금강 건너로 보인다

 

 

 

 

영은사(도지정유형문화재 제51호)

세조 4년(1458) 지은 사찰로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 합숙소로 사용하였으며

광해군 8년(1616)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만하루와 연지(연지 충청남도 기념물)

공산성에는 우물이 3개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곳과 쌍수정 남쪽의 것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으나 1982년부터 1983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확인. 정비한 것이다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만하루와 연지(연지 · 충청남도 기념물)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연못의 축석상태를 보면, 모두 단을 두어 쌓았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축석에 사용된 석재는 비록 정치석되지는 않았지만, 면을 어느 정도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다

이들의 축조는 매우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석질은 절석이 잘도는 반암계통을 사용하고 있다

 

 

 

 

얼음창고

한겨울 금강이 얼면 깨어내 왕겨에 싸서

석빙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더운 여름에 꺼내 썼다고 한다

 

 

 

 

금강 배다리

공주가 발전하면서 금강을 건너는 사람들과 물자가 크게 늘어났다

그동안 사용하던 나룻배로는 도저히 이들을 실어나를 수 없어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지만

이것마저도 홍수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배다리다

나룻배 20~30척을 잇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폭 3m 길이 150m로 배다리를 놓았다

 

 

 

 

느티나무

두 그루 뿌리가 합쳐진 것인지 한 나무인지?

암튼 크기가 대단하다

 

 

 

 

공북루(拱北樓 ·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7호)

누 바깥쪽에 석성이 쌓여 있으며, 누의 중앙 한 칸에 해당되는 부분만이 뚫려 통로를 이루고 있다

1603년(선조 36) 관찰사 유근(柳瑾)이 쌍수산성을 수축하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望北樓)를 중건하여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月波堂)을 지었다고 하나 월파당은 1654년 붕괴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공북루(拱北樓) 현판

 

 

 

 

공북루 앞 마당

전날 축제가 열렸던 듯하다

 

 

 

 

금강교 · 백제큰다리

배다리도 큰 홍수와 오랜 세월을 견디기 힘들어

1932년 충청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는 대가로 금강에 만든 다리가 금강철교다

금강철교는 그때부터 공주의 관문 역활을 하게 되었다

 

 

 

 

공산정(公山亭)

 

 

 

 

금강교 · 백제큰다리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금서루

 

 

 

 

무령왕릉 상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3.97km, 소요시간 2시간 20분

(2021.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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