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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웅진백제역사관

웅진백제역사관은 백제의 역사문화 컨텐츠와 IT시스템을 활용한 교육 · 홍보 · 체험이 가능하여
쉽고 흥미롭게 백제문화를 접할 수 있으며 전시관과 영상실로 구성되어 있다

 

웅진백제역사관

 

 

 

 

천도(遷都) / 웅진으로 가는 길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는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이 숨지면서 고구려는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국력을 키운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백제의 58개 성을 함락시키고 아신왕에게 신하의 맹세를 받아내며 백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 백제는 성을 쌓고 중국 북위에 구원을 요청하는 등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승려 도침을 첩자로 보내 백제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475년 9월, 고구려는 한강을 건너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죽였다
혼란한 산황에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문주왕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중심이 될 새로운 수도를 찾아야 했다

 

 

 

 

한성도읍기(B.C. 18 ~ A.D. 475)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문주왕이 475년 웅진(공주) 천도

 

 

 

 

웅진도읍기의 왕들 /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 · 무령왕 · 성왕
천혜의 요새이자 왕실을 지지할 굳건한 세력이 존재하던 웅진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문주왕
어린 나이였지만 귀족세력을 억누르려 노력한 삼근왕
서남부로 영토를 넓히고 국경 방어를 강화한 동성왕

 

 

 

 

무령왕
사회를 안정시키고 중국 왕조와 다시 교류하며 강국임을 선언했다

 

 

 

 

성왕
영토 확장과 번영을 꿈꾸며 보다 넓은 사지로 천도했다

 

 

 

 

갱위강국(更爲强國)
갑작스런 천도로 백제의 지배세력이 교체되면서 정치에 새 바람이 불었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강화했고, 성을 축조하여 국경을 방어했다
고구려 때문에 북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워지자 남쪽에 영산강과 섬진강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백성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안정되었고, 문화도 발전하였다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재개되면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백제만의 고유 뮨화로 재탄생시켰다
수도를 빼앗기는 아품을 겪었으나 웅진에서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포한 백제, 그 흔적은 지금도 공주 곳곳에 남아 있다

 

 

 

 

다시 강국이 되다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과 지방지배의 강화

 

 

 

 

백성의 생활 안정

 

 

 

 

튼튼해진 국경

 

 

 

 

독창적인 불교문화

 

 

 

 

백제인의 장례문화

 

 

 

 

문화강국(文化强國) / 백제의 찬란한 문화예술

 

 

 

 

백제의 바닷길
백제는 한강 유역을 빼앗기면서 중국으로 가는 서해 북부의 연안 항로를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금강 하구를 출발하여 태안반도와 백령도를 거쳐 산둥반도로 향하는 서해 횡단항로를 개척했다
반면 일본으로 향하는 뱃길은 안정되었다
백제는 꾸준히 한반도 서남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고, 남해안 연안항로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이를 통해 아스카(지금의 나라)에 있던 일본의 야마토 정부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양직공도
양나라 무제의 아들인 소역이 주변 나라등이 무제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파견한 사신들의 용모를 관찰하여 그리고
그 옆으로 해당 나라들의 문화나 풍속 등을 간략하게 적어서 만든 그림이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나 송나라 때 베겨 그린 작품과 당나라 때 염립본이 이를 참고로 하여 그린 그림(왕회도)이 남아 있다
6세기 백제 · 일본 · 냥아수(말레이시아) · 파사(페르시아) 등 여러 나라의 의복과 생활풍습을 알려주고 있으며
당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중국을 중심으로 교류하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국제무대에서 활약한 백제인들
고달 · 단양이 · 다리와 지리 · 겸익 · 수수허리

 

 

 

 

사비 천도 그 이후
웅진을 중심으로 다시 강국으로 발돋움한 백제는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지방제도를 갖추며 발전해 나갔다
천혜의 요새이자 우호적인 지방세력의 거점이었던 웅진은 수도로서 그 역할을 다했으나 계속 성장하는 백제를 품기에는 넉넉하지 못했다
538년 성왕이 사비로 수도를 옮기면서 64년간의 웅진도읍기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그 이후 웅진은 백제 5방성 중 하나인 북방성으로서 백제 지방 지배의 중요 거점이었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받은 의자왕이 사비를 빠져나와 웅진으로 피난했던 것은
멸망 직전까지 웅진이 백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통일신라 · 고려 · 조선에 이르기까지 웅진은 한반도 중남부의 중심도시였다
통일신라는 이곳에 웅천주를 두어 지방지배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고려 때는 공주목 · 조선 때는 충청감영이 설치되었다

 

 

 

 

공산성 · 송산리고분군 · 고마나루

 

 

 

 

공주시내 전경 / 일제강점기

 

 

 

 

쌍수성에서 단체사진 / 1950년대
*
(2021.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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