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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군산구불6-1길(2)

군산 구불6-1길(탁류길)은 백릉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지인 군산의 원도심을 중심으로
일제강점시대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의 애환을 경험하며 과거를 되돌아 보는 길이다
*
첫 날, 군산근대역사관부터 이성당까지 걸었을 때 날이 어두워져
다음 날 이어걷기를 했기에 군산 구불6-1길(탁류길)을 2번에 나눠 올렸다

호텔 항도
군산시 호텔 1호점이다

 

 

군산월명공원
수시탑과 해병대 군산 · 장항 · 이리지구 전적비가 보인다

 

 

월명동 근대쉼터와 항도호텔 사이의 건물 후면이다

 

 

명월갈비
60년 전통의 한우갈비집이다

 

 

카페 신민회

 

 

군산신문사
매매 안내글이 창문에 붙어 있다

 

 

구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 관사 / 등록문화재 제726호
1940년대에 'ㄱ'자 형태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 뒤쪽에 있던 이 관사는 판사와 검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다다미 · 불단 · 반침 등으로 구성된 관사의 내부는 일본식 주택의 특징을 보여 준다
이에 반해 관사의 외부를 이루는 지붕 구조의 캐노피 · 2층 현관 유리창에 쓰인 스테인드글라스
오르내리창 · 벽난로 · 연도시설 · 지하실 등은 서양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일본과 서양의 주택 양식이 혼합된 이 관사는 군산지청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곰창작소
테디베어뮤지엄 · 테디베어뮤지엄샾 앞이다

 

 

영화정

 

 

고우당

 

 

관광안내센터

 

 

여미랑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곳이었다
2012년 일제강점기 당시의 월명동 일본식 건축물을 나라 잃고 서러웠던 시대의 아품을 되새길 목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여미랑은 전라도 사투리의 「여미랑께」를 표현한 이름으로 오래된 친구의 집을 뜻하는 말이다
*
님의 침묵 촬영장소다

 

 

여미랑
2012년 당시 민간에 위탁하였고 일본식 다다미방을 체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총 면적 2929㎡로 카페 · 주점 · 특산물판매점 등 총 10채의 일본식 가옥이 원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심에는 자그마한 연못과 정원을 조성하였다

 

 

라대곤 소설 / 망둥어
욕심은 많아서 제 살 찢어 미끼로 끼워도 사정없이 물고 늘어져 자살하듯 버등거리는 모습이 애처롭다
멍청해서 별 볼일 없이 살다 허망하게 가버리는 놈이다

 

 

채만식 소설 / 탁류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시가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그림 자동차

 

 

대웅전 / 등록문화재 제64호
동국사는 2003년 7월 15일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웅전에 있는 석가삼존불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삼존불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

 

 

월명동 물장수 이상현
예로부터 월명동 지역은 시민들이 마시는 물이 귀하기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물장수들이 물을 지게로 날라 팔기도 하였다

 

 

선양동 해돋이공원으로 오르는 길이다

 

 

송창동 방향이다

 

 

오룡로 북쪽
오룡고가교에서 봤다

 

 

군산반석교회 방향이다

 

 

오룡로 남쪽
오룡고가교에서 봤다

 

 

삼학주공아파트 방향이다

 

 

선양동 해돋이공원

 

 

선양동 해돋이공원 안내판

 

 

군산영광여자고등학교 방향이다

 

 

군산금광초등학교 방향이다

 

 

풍차 쉼터를 지난다

 

 

채만식 탁류 소설비 정주사집
정주사는 양반의 후예로 서당에 다니고 보통학교도 졸업하여 서천군 고원으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오래 근무하였을 뿐 승진도 없고 늙었다고 쫓겨나 빚만지고 살다가 가산을 모조리 정리한 후 군산으로 이사한다
그의 식구는 두 딸인 초봉 · 계봉 그리고 아들 형주 · 부인 유씨까지 다섯이었다
서천에서 군산으로 이사올 때 그의 선대 유산인 선산 한 필지 · 논 4천평 ·  한 채를 모두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 돈으로 대정동에 팔백 원을 주고 기와집 한 채를 산 뒤 남는 돈이 이삼백 원이었다
이마저 미두에 손을 대 대정동 집을 팔고 둔배미초가집으로 이사와 살았다
*
개복동서 둔배미로 오르는 길을 콩나물고개라 부른다

 

 

월명공원 방향이다

 

 

팔마산 방향이다

 

 

선양고가교

 

 

탁류 길 벽화이야기
이곳 개복동서 둔배미로 오르는 길이 콩나물고개다

 

 

한참봉 쌀가게 소설비
소설 속 정주사가 십여 년 넘게 거래하던 쌀가게로 첫째 딸 초봉이와 은행원 고태수의 혼담이 오간 자리이며
은행원 고태수가 하숙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말죽거리잔혹사 · 타짜 · 8월의 크리스마스

 

 

군산시민예술촌
과거 군산의 충무로 · 개복동 예술의 거리

 

 

씨네마 우일(宇日)

 

 

과거 군산의 충무로 · 개복동 예술의 거리

 

 

모과쉼터로 들어가는 골목길이다

 

 

모과 쉼터

 

 

신포우리만두
짬뽕거리로 들어가는 들머리다

 

 

간판 없는 집

 

 

상인슈퍼편의점

 

 

빈해원(瀕海園) / 등록문화재 제723호
1965년 콘크리트와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2층 건물이다
이 건물은 1~2층이 개방된 내부공간과 각층에 여러 개의 방이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한국전쟁 이후 군산에 정착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으로 1950년대 초 개업한 이후 1965년 현재 건물로 이전하여 운영하고 있다
음식점에 걸려 있는 장식 · 주방용품 · 생활용품 등에서 화교문화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군산 빈해원은 근대기 군산에 정착한 화교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빈해원 / 등록문화재 제723호
1965년 콘크리트와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2층 건물로 1~2층이 개방된 내부공간과 각층에 여러 개의 방이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군산근대건축관 / (구)조선은행 군산지점
1922년에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2층 건물로 지붕은 함석판을 이은 모임지붕으로 처리하였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는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으로 소개된다
(구)조선은행은 1909년 대한제국의 국책은행으로 설립된 한국은행에 기원을 두고 있으나
을사늑약 이후 조선 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하였다
일제의 경제수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물로 보수 ·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시관 내부 전경

 

 

빈해원
1~2층이 개방된 건물 부분이다

 

 

미두장(米豆場)
당초에 일본인들이 조선에서의 쌀 착취를 위하여 이전의 재래시장 중심의 자율거래를 금지시키고
조선 전역의 미곡 거래를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미곡의 배급 통제를 위하여 만든 민관 합작 회사였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 쌀의 시세를 결정하는 과정에 시세 차익을 놓고 벌이는 놀음이 생겼으니 그게 바로 「미두」이다
*
미두는 3개월 단위로 미리 쌀값을 예측해서 이루어지는 선물거래의 한 유형이다
실제 쌀이 오가는 게 아니라 일정한 시점에 쌀을 사거나 팔 권리가 거래되는 것이며
또한 미두 거래는 개인끼리 하는게 아니라 미두 취인소라는 중매소를 이용하여 이루어져 오늘날의 주식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 111 in 수근
일제시대 쌀 수탈의 이동경로가 된 군산항의 뱃길과 그 주변에서 회한의 삶을 실었던 부두노동자의 삶의 길을 표현하고
그 중 항구 노역자 생활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웠던 박수근 화백을 통해 길의 의미를 재조명했다

 

 

군산근대미술관 / 구 18은행 군산지점
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1870년 나가사키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다
나가사키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자 1877년 9월 일본의 18번째 국립은행으로 변경하였다
구 18은행 군산지점은 1907년 조선에서 일곱 번째로 설립되었다
2008년 등록문화재 제372호로 등록되었고 보수 · 복원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미술관 내부 전경

 

 

2층 공간
안중근의사가 수감생활을 했던 여순감옥을 재현한 곳이다
동양의 평화와 대한의 독립을 위해 몸바쳤던 안중근의사의 뜻을 되새겨보는 곳이다

 

 

미즈 카페
1930년대 건립되어 무역회사로 사용되었던 건축물이었으나 2012년도에 근대역사박물관 정면에서 이곳으로 이전 · 개축하였다
이 일대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쌀 수탈의 거점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무역상사와 상업시설이 독점하는 거리가 되었다
1930년대 무역회사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건축물을 이전 · 개축하면서 카페테리아 · 근대문학 소통공간으로 개보수하였다

 

 

장미갤러리
일제강점기 용도나 기능을 확인할 수 없는 건축물이나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위락시설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군산의 예술창작은 문학과 신파극이 두드러진다
문학은 백릉 채만식의 소설 탁류가 있으며 신파극은 군산좌(구 군산극장) · 희소관(구 극도극장)에서 주로 공연되었다
1930년대에는 "사랑을 따르자니 돈이 울고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는 대사를
"조국을 구하자니 생활이 울고 생활을 따르자니 조국이 운다"로 바꿔 부르며 한국인의 양심과 생활의 고달픔을 달랜 시기였다

 

 

장미갤러리 1층

 

 

장미갤러리 2층 내부

 

 

군산화교소학교 석탑
1920년대 군산시 명산동에 있던 일본 유락(향락시설) 칠복루 정원에 있었던 석탑이다
광복 이후 군산화교협회가 칠복루를 인수하여 화교학교로 운영하였기에 이 석탑이 화교학교에 남아 있게 되었다(학교 건물은 2001년 화재로 전소)
이 탑의 특징은 일본식 석탑의 특이한 형태와 더불어 탑 중앙의 구멍을 통하여 전선을 설치 각 층에 전깃불을 밝혔던 근대 조경용 탑이라는 데 있다

 

 

보국탑(報國塔) 면석 / 1935. 6. 22
일제강점기 군산의 유지였던 모리기쿠 고로가 자신의 집 뒷산인 월명산 중턱에 건립한 탑이다
이 탑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탑의 1층 면석에는 모리기쿠 고로의 약력과 그의 후손이 영원히 이 탑 아래에 살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
모리는 노일전쟁 당시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만주에서 장사를 해 돈을 모았으며
그 후 군산으로 와서 농장과 정미소를 운영하며 수탈과 착취를 일삼았던 자다

 

 

은적사 삼층석탑 / 고려
월명공원 수원지 인근에 위치했던 선종암의 탑이다
고려시대 양식의 3층석탑으로 1912년 수원지가 건설되며 선종암이 폐찰되자
군산공원으로 옮겨졌으나 원활한 관리를 위하여 1976년 은적사로 이전 관리하다가 2011년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위탁되었다
*
군산 구불6-1길 시점이자 마침점이다

 

 

군산 내항 배수펌프장

 

 

군산196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테라스형 레스토랑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0.4km, 소요시간 5시간 29분
(2021.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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