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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둘레길12코스(성창포길)

인천둘레길은 「단절된 녹지축을 살린다」는 취지로 한남정맥 줄기인 계양산을 시작으로

천마산 · 원적산 · 함봉산 · 만월산 · 만수산 · 관모산 · 문학산 · 연경산 · 노적봉 ·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S녹지축을 연결하는 코스다

일상에서 자연을 벗 삼아 여가생활을 하고 더불어 우리지역의 자연생태환경과 문화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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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코스는 동인천역을 시점으로 답동성당 · 자유공원 · 차이나타운을 거쳐 인천역까지의 길로

개항 이후 근대문물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길이 5km · 소요시간 1시간 20분이다

 

 

동인천역 4번출구

1897년 3월 22일 경인철도 기공식이 우각현(일명 쇠뿔고개)에서 거행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도원역」이고

그 후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할 때, 청과물시장에 「축현역」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한 곳이 지금의 「동인천역」이다

1926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역명이 상인천역으로 바뀌었고 다시 1955년 동인천역으로 개명하고, 1957년에 역사를 새로 준공한 후

1989년 오랫동안 정들었던 역사를 허물고 민자 역사를 지으면서 인천백화점이 자리했다

인천백화점이 운영난에 문을 닫고 엔조이쇼핑이 다시 재기를 노렸으나 다시 문을 닫고 지금은 새로 리모델링 중이다

 

 

 

 

중앙시장

송현동 개천가에 형성된 야시장이 1936년 양철지붕을 얹어 일용품시장으로 변모하였는데 이것이 중앙시장의 시작이다

동인천 중앙시장 전통혼수거리 아치로 들어간다

 

 

 

 

송현자유시장(일명 양키시장)

인천 곳곳에 있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키 물건이 은밀하게 거래되던 곳이었다

 

 

 

 

함석지붕집

화도진로 21번길이다

 

 

 

 

중앙시장

이불가게와 한복 전문집이 많다

 

 

 

 

웨딩 가구거리

배다리부터 신포사거리까지 가구점이 밀집해 있던 거린데 이젠 문을 많이 닫었다

배다리 앞에서 봤다

 

 

 

 

배다리

19세기 말까지 이 곳에 큰 갯골이 통해 있어 만조 때가 되면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배를 댈 수 있는 다리가 만들어 지면서 배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전에 철길 밑으로 배가 들어와서 배다리라 한다

 

 

 

 

웨딩♡가구의 거리

이곳 싸리재(丑峴) 사거리가 지금은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옛날에는 경사가 가팔라서 1913년과 1917년 두 차례 언덕을 깎았다

싸리재 언덕에서 돌아 봤다

 

 

 

 

경동양과점 ·동양가구공예사

 

 

 

 

경동유리상사

 

 

 

 

인천기독병원 · 독일보청기 자리

1923년, 1년 간 인천에 주재했던 감리교 여선교사 코스트럽이 개설한 70여 평 부지에 일반진료소가 생겨났고

1924년에는 아동보건소 · 1931년에는 인천부인병원이 개원했다

일제는 1940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이곳을 접대부 검진소로 사용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군이 접수하여 정보기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여선교사들이 내한하면서 재환원 원칙에 따라 교회에 반환했던 것을 병원으로 사용하였다

전쟁 후 정문에는 「대한감리회인천기독병원」이라는 정식 간판 옆에 「북한피난민연합회진료소」라는 간판도 함께 걸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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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보청기 자리는 경인간 최초의 전화 개통지이다

1898년 1월 28일 인천~한성간 최초로 전화선을 가설하여, 1900년 경인 간 시외전화가 개통되었다

또 1902년 3월 30일 인천전화소를 설치해 시내전화 업무를 총괄하고, 6월 1일에는 인천~한성간 자석식 전화 12회 선을 설치해 교환 업무를 개시했다

 

 

 

 

동서대약국

인천기독병원 주변은 한 때 인천의 의료타운이라 할 만큼 십수 개의 개인 의원들이 있었다

그 덕에 약국들도 덩달아 문턱이 닳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사람들과 인근 김포 · 강화 · 옹진 섬 주민들이 시내를 방문한 김에 약을 박스로 사가곤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약국이 동서대약국이다

 

 

 

 

학다방

예전 중구 신포동 · 용동 · 내동 · 인현동 · 시청이 있던 시절의 관동 · 중앙동에는 한 집 건너 다방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다방이 있었다

학다방은 비교적 옛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영업을 하고 있다

 

 

 

 

제왕양복점 · 서울양복점

번성했던 시절 경동거리에는 30여 개의 양복점이 성업했었고

이수일양복점은 재단사 · 봉재사 등 20명을 두었어도 추석과 명절에는 며칠씩 밤을 새며 일했으며

한 때 극장 영화 예고편 앞에 양복점 광고가 몇 개씩 붙은 적도 있었다 한다

오른쪽 붉은 색 건물이 이수일양복점이 있던 자리다

 

 

 

 

예전 개항기 인천우체사 터

현재 공영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터에는 개항기 때 「인천우체사」가 있었다

우체사가 이전한 후에는 김휘관 양조장이 소성소주를 생산했었고

그후 1958년 중구 중앙동 58은행 자리에 있던 조흥은행 인천지점이 이 터로 이전해 건물을 새로 짓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은행이 합병되고 상권이 침체되자 건물은 헐리고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마스크 벽화

새로 생긴 벽화다

 

 

 

 

애관극장

한국인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1895년 「협률사」라는 상설연극공연장을 설립하여 1925년  애관극장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 소실되어 1960년 새로 신설하였다

1908년 이인직에 의해 개관된 원각사는 물론 1902년 조선황실이 서울 정동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인 협률사(協律社) 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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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관극장은 영화만 상영한 것이 아니었다

미스터 유니버스선발대회 · 세계적인 음악가 번스타인 피아노 연주회 · 1945년 8월 18일의 조봉암 주도로 결성된 인천 건준행사도 열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스크린을 가진 애관극장에서 당대의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인사하던 날 경동 일대는 교통이 마미되었다고한다

 

 

 

 

인천 답동천주교회

1889년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빌렘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답동 언덕에 성당의 정초석을 갖고 이후 코스트신부의 설계로 1897년 고딕양식의 건물을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937년 기존 건물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공사를 완공하면서 로마네스크양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답동성당 내부

 

 

 

 

예전 감리서 터(한진 SKY TOWER 아파트)

1883년 개항 직후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인천감리서 터로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촛불로 잇는 6월항쟁 빗돌

호헌철폐 · 독재타도를 외치던 6월 항쟁 30주년에 세웠다

 

 

 

 

신포시장

개항기 당시 일본인과 중국인 · 서양인에게 고급 채소를 파는 푸성귀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는 쫄면 · 신포우리만두 · 닭강정 등이 생각나는 시장이다

 

 

 

 

신포닭강정

처음 신포통닭이란 이름으로 시작하여 1980년 대에 양념통닭을 메뉴에 추가하였으나

홀에서 먹을 때와는 달리 포장하여 집에 가져가면 닭이 퉁퉁 불어서 바삭한 맛이 사라져

바삭한 식감을 위하여 멸치 볶을 때 물엿을 넣으면 바삭해지는 원리를 이용하여 물엿을 넣기 시작했다

달다는 의견 때문에 매콤한 맛을 위하여 매운 고추가루 분말을 이용했고 텁텁할까봐 상큼한 맛을 위하여 청양 풋고추를 넣기 시작하였다

현재 신포닭강정으로 상호를 변경 20년이 넘게 이어오고 있다

 

 

 

 

예전 감리서 터(한진 SKY TOWER 아파트)

1883년 개항 직후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인천감리서가 생겼고 나중에 인천부(현 인천시청) 역활에다 개항장 재판소와 학교까지 들어섰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감리서 안에서 개교했는데 이 학교가 후일 인천고다

 

 

 

 

예전 감리서 터 빗돌 · 안내판

인천개항장 재판소에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예전 감리서 터 사진

안내판에 있는 사진이다

 

 

 

 

인성여자중학교

 

 

 

 

홍예문

인천시내 남북 간 교통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철도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 준공했으며, 처음에는 혈문이라고 불렀다

오른쪽 흰 조각품은 닳은 소라껍질을 형상화한 것으로 박영성 화백의 작품이다

 

 

 

 

예전 전동119안전센터

인천 최초의 소방서는 1910년에 세워진 궁정(신생동)소방서고, 1919년 인천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소방서가 전동소방서다

이젠 심폐소생술교육센터로 활용되지만 얼마 전까지 현존하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소방소였다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 광장

광장 왼쪽 비둘기장이 있었으나, 1996년 주변 환경을 위해 철거되고 배 모양의 전망데크가 설치되었다

 

 

 

 

즉석사진 3,000원

 

 

 

 

기상대 슈퍼

기상대 정문 앞 느티나무엔 항상 사람들이 많다

 

 

 

 

송림교회 한국 최초 선교기념비

한국 최초 선교를 기념하는 공원으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흉상과 중앙에 성령의 불길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송월동 동화마을

인천 송월동은 소나무가 많아 솔골 · 송산으로 불리다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이 운치가 있어 송월동으로 불린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후 독일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거주하던 부촌이었으나

젊은사람은 떠나고 노인분들만 거주하면서 건축물은 노후되고, 빈집들이 늘어나 활기를 잃어버린 곳이 되었다

대표적인 원도심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13년부터 꽃길을 만들고, 낡은 담과 옹벽에 세계명작동화를 테마로 그림과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지금의 동화마을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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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나라 길 중 기린 포토존이다

 

 

 

 

우물

인천역 근처에 부두가 있었을 때 이곳에 선주들이 많이 살았고

그 때 이 우물 앞에서 오징어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씻었다고 한다

 

 

 

 

트릭 아트 스토리

과학적인 화법과 특수도료를 사용하여 평면의 그림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입체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는 놀이공간 전시관이다

트릭아트 뿐만 아니라 동작인식 시스템 · 거울미로 · 블랙아트 등 여러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무지개계단

머리 끝에 긴 뿔이 달린 유니콘 · 불을 뿜는 용 · 하얀 날개를 가진 페가수스 등이 있다

 

 

 

 

블랙레빗 카페

동화마을 카페도 안쪽에 있다

 

 

 

 

해피 투게더 인형뽑기

맞은 편에 먹거리 쉼터 · 커피숍도 있다

 

 

 

 

동화마을 먹거리쉼터 · 커피숍

 

 

 

 

송월동 동화마을 아치

동화마을을 나와 차이나타운으로 간다

 

 

 

 

차이나타운

송월동 동화마을 안내도 붙어 있다

 

 

 

 

의선당(義善堂)

1893년 이전에 세워진 중국 절로 총 3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당 왼쪽에 거주공간이 있으며, 길가에 위치한 건물은 한때 중국무술도장으로도 사용했고 지금은 중국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이다

의선당은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도록 하는 교훈을 주는 곳으로

개항 후, 중국 산동성을 중심으로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건너 온  중국인들이

이국 땅에서 잘 적응하고 살도록 하기 위한  화교들의 교화 기관이 필요하였고 단합하며 살아가는 화교들의 끈기와 생명력이 담겨 있는 곳이다

해방 이후 점차 쇠퇴해지고 1970년대 화교사회의 위축과 함께 거의 폐쇄되었고 무당파 팔괘장 전수도장으로 80년대 운영되었다

이후 거의 문을 열지 못하다가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2006년 5월 대대적인 수리 후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정청에는 관음상(觀音像)을 중심으로 흙으로 만든 5개의 상이 모셔져 있다

섬세한 솜씨로 만들어진 토상(土像)은 청나라 말기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청관(淸館) · 공화춘(共和春) 

공화춘은 1908년 무렵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 중국식 건물로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으나

중화요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는 음식점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음식점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그후 짜장면박물관 터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재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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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창가 그림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이 주점과 색시집이다

섬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 때문에 주변 숙박업소는 늘 성업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집은 차이나타운의 황해여관이다

지금의 「청관」 자리다

 

 

 

 

북경 탕후루

화덕만두 · 월병 · 공갈빵 등을 판다

인천역으로 내려가는 삼거리에 있다

 

 

 

 

현대세탁소크리닝 · 대창반점

현대세탁소는 짜짱면집에 포위된 세탁소로 건물은 120여 년쯤 된 건물이고 세탁업을 한지는 50여 년이 되었다

그 옆으로 「응답하라1988」에 나온 대창반점도 있다

 

 

 

 

풍미(豊美)

짜장면의 원조는 「공화춘」이지만 문을 닫었다 근래에 다시 열었고 영업을 계속한 집으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은 풍미다

 

 

 

 

짜장면박물관(예전 공화춘 共和春 등록문화제 제246호)

1908년 무렵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 중국식 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으나 중화요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는

음식점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음식점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건물을 매입한 후 건물을 보수하고 내부에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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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박물관의 짜장면이야기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 상인과 노동자가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들을 위해 값싸고 간편한 음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짜장면이다

처음에는 산둥지방의 토속면장에 고기를 볶아 손수레에 재료를 싣고 부둣가로 나가 직접 수타면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청관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짜장면은 1950년대에 화교들이 캐러멜을 첨가한 한국식 춘장을 개발함으로써

우리 입맛에 맞는 오늘날의 짜장면으로 탄생하였다

 

 

 

 

해안성당 · 제물진두 순교성지

1960년 당시 이곳 차이나타운에는 4천여 명의 중국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고 소수의 화교 가톨릭신자들은 답동성당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 화교 신자들의 언어 소통과 민족 이질감으로 화교들을 위한 성당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에 미국 메리놀회에서 1960년 7월 17일 화교를 위한 선린성당을 설립하고

중국 만주에서 사목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한 고요셉(맥코막) 신부를 초대 신부로 임명하게 된다

지금의 성당 건물은 초대 신부의 노력으로 1966년 6월 9일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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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베드로의 외가집안이 치명한 순교터로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10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제물진두 순교성지이다

 

 

 

 

예전 인천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248호)

인천 개항 초기부터 해운과 물류수송을 담당하였던 상선회사 사옥이다

1883년 미쯔비시우편회사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시작하여 1885년 공동운송회사와 합병된 후 1886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다

이 건물은 1888년 건립되었는데, 초기에는 붉은 벽돌 건물의 사옥과 사택 · 창고 등이 같이 세워졌다

건물의 건립 연도는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목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우리나라 해운 및 유통산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제물포해전이 있었던 1904년 당시에는 일본병참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항만 관련회사의 업무용 건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로 활용되고 있다

 

 

 

 

각국조계지계단

근대 개항기 인천에 정착하려는 외국인들을 위해 인천항 주변에는 조계지가 들어섰고 응봉산 정상에는 각국공원(현 자유공원)이 조성되었다

 

 

 

 

대불호텔전시관 · 중구 생활사전시관(1960~1970년대)

인천 일본인 조계지에 위치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호텔 대불호텔이 철거 40년 만에 호텔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그 옆에는 1960~1970년대 인천의 생활사를 알려주는 전시관도 함께 개관했다

 

 

 

 

당시 대불호텔 사진

1888년 일본인 사업가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서울에 건립된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다

1918년 중국인에게 매각되어 중화루로 활용되다가 1978년 철거되었다

대불호텔은 1978년 철거된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데

2011년 발굴조사를 통해 방과 복도 · 지하실 등 건물의 평면구조와 축조방식을 보여주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현장 보존을 결정하였는데 이 때 초기 대불호텔의 삽화도 공개되어 신축 이전에는 일식 목조 2층 건물이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졌다

 

 

 

 

예전 인천일본제1은행지점(인천 유형문화재 제7호)

1883년 인천 개항 후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개설된 근대적 금융기관이다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고, 초기에는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911년 조선은행 인천지점 ·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 법원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최초의 우편배달부 상

우리나라 우편제도는 1884년 11월 18일, 서울과 인천 간에 우편물이 교환되면서 그 막이 올랐다

본 조형물은 근대 사진자료에 남아있는 우체부와 우체통(1912년식)의 모습에 기초하여 제작하였다

 

 

 

 

중구청(예전 일본영사관 터)

이 건물은 인천부청사로 지어진 인천의 행정 중심지 역활을 해온 역사적인 곳이다

1985년 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기까지는 인천시청사로, 지금은 중구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2층이었는데, 1964년 3층으로 증축되었다

 

 

 

 

예전 인천일본제18은행지점(인천 유형문화재 제50호)

일본 제18은행 지점은 제18은행이 1890년 해외에 세운 최초의 은행지점이다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한 면직물 중계 무역이 번창하자 수출입과 통관업무의 중심지였던 인천에 지점을 개설한 것이다

이후 1936년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에 그 업무를 인계하였으며 1954년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의 합병으로 발족한 흥업은행 지점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화살롱 카페 화(花)요일

드라마 「도깨비」를 촬영한 카페다

 

 

 

 

전시관 밖에 있는 포토존

사진 좌측에 일본58은행이 보인다

 

 

 

 

예전 인천일본제58은행지점(인천 유형문화재 제19호)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일본 제58은행은 인천 전환국에서 주조되는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을 목적으로 1892년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이어 1893년 부산 · 1895년 서울에 지점을 설치하였고, 양국에서 송금한 상품 대금의 결재와 무역 금융에도 주력하였다

후에 야스다은행으로 개편되었으며 광복 후 조흥은행 인천지점, 대한적십자 인천도지사 사옥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인천광역시 요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신포로 27번길

왼쪽 각국조례지 계단으로 가기 전에 봤다

 

 

 

 

동국빌리지(예전 오례당 저택 터) · 인천제일교회

각국조례지 계단 오른쪽에 동국빌리지 · 그 뒤에 인천제일교회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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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제일교회는 1946년 10월 19일 14명의 월남한 장로교인들이 서울 영락교회에서 파송한 한병혁 목사를 모시고 창립예배를 드렸고

 1950년 2월 1일 신축교회 70평을 기공하여 건축 도중 6 · 25전쟁으로 중단하였다가 수복 후 완공하였다

 

 

 

 

1953년 경 오례당 저택(동국빌리지)

1882년 조선 정부는 미국과 통상조약 · 청나라와 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관세주권을 보장받는다

이에 따라 일본만 무관세 지역으로 둘 명분이 사라진다

이에 조선 정부는 1883년 제물포항 개항을 앞두고 개항장에 설치된 해관업무를 관장할 인물을 물색했다

그러나 세관 설치 운영 경험이 없던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언을 구한다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은 일본의 전횡을 막으면서 청국의 종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국해관과 천진 영사를 역임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목인덕)를 천거하였다

1882년 겨울 조선에 입국한 그는 고종으로부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벼슬을 받는다

오늘날로 치면 외교통상부 차관에 해당된다

그는 1885년 9월 해임될 때까지 약 3년 간 조선의 세관 업무를 총괄한다

오례당은 묄렌도르프를 따라 조선에 들어온 해관요원 중 한 사람으로 중국어 · 영어 · 독일어 · 프랑스 등에 능통한 세관업무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해관문서에 의하면 오례당은 1883년 4월 24일자로 왕명에 의해 종신직 해관 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제 내한한 것은 인천해관 창설일인 6월 16일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제물포구락부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 · 영국 · 독일 · 프랑스 · 러시아 및 기타 외국인들과

소수의 중국 · 일본인들이 친목을 돕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01년 인천 개항장이 내려다 보이는 응봉산 언덕에 세워졌다

내부에는 사교실 · 도서실 · 당구대 등을 마련하였고 따로 테니스코트도 가지고 있었다

 

 

 

 

각국지계(各國地界) 빗돌

「조계」란 영토의 일정한 범위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를 허가한 지역으로 거류지라고도 부른다

인천에는 1883년 일본전관조계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청국전관조계, 1884년 10월에 각국 전관조계가 설치되었다

조계 빗돌은 조계의 경계를 나타내 주는 표지석으로 각 조계의 경계 지점에 세웠던 것이다

이 각국조계석에는 각국지계와 조선지계(朝鮮地界) 라는 명문이 있어

인천의 각국조계와 조선인 마을이 맞닿는 개항장의 외곽 지점 어딘가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2007년 제물포구락부 보수공사 중에 발견되어 지금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인천축항 풍경 1940년대 / 2017 광성

 

 

 

 

대불호텔이 보이는 청 · 일조계지 1910년대 인천항 풍경 / 2017 광성

 

 

 

 

인천시장 공관(현 역사자료관)

인천의 역사 자료를 발굴 · 수집 · 정리 · 발간하는 기관으로 2001년 10월 인천시민의 날을 맞아 시장공관은 역사자료관으로 새롭게 태여났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사업가의 저택이었다가 광복 후에는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으로 또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으로 사용된 일이 있었으나

이후 인천시에서 매입하여 1966년 한옥 건물로 개축 · 시장공관으로 변화하였다

 

 

 

 

공자상

중국 청도에서 기증한 공자상 아래로는 1883년 설정된 일본조계와 1884년 마련된 청국조계와의 경계계단이 있다

12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 계단은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고 청국조계지 일대가 관광특구로 지정 개발되면서 새롭게 정비되었다

 

 

 

 

연오정( 然吾亭 )

코로나19로 출입통제구역이다

 

 

 

 

석정루( 石汀樓 )

목재업과 조선소로 큰 돈을 벌었던 이후선 사장이 지어 인천시에 기증한 2층 누각이다 

 

 

 

 

삼국지벽화거리

삼국지는 중국 4대기서의 하나로 전세계인에게 사랑받는 불후의 고전이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조조, 손권, 유비 세 사람의 영웅담은

의리와 배신 · 파괴와 건설 · 사랑과 미움의 서사시로서 동서고금 남녀노소에 큰 감명을 주어왔다

길이 150m의 대형 벽화거리다

조금 떨어진 옆엔 초한지 벽화거리도 있다

 

 

 

 

삼국지벽화거리 포토존

관우와 사진 만드는 장소다

 

 

 

 

밴댕이특화거리

인천역으로 가는 짜장면박물관 옆 길로 예전 인천역 뒤가 바다였기에 아직 밴댕이 식당이 많이 남아있다

 

 

 

 

인천역

물류로 인해 인천항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 인천항은 일제가 여주 · 이천 지역의 쌀과 소래 남동 등지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반출하기 위해 1937년부터 수인선을 운행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거리 8.4km, 소요시간 4시간 20분

(2020. 07.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