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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경기도 삼남길 제1길(한양관문길)

삼남대로는 조선시대 6대 대로(大路) 중 한양과 충청 · 전라 · 경상의 삼남지방을 이었던 천 리에 달하는 길이다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젊은 선비들이 이 길을 걸었고 삼남지방의 풍부한 물산도 이 길을 오갔다
또한 이 길은 정조께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현릉원으로 행차하던 길이며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던 길이고, 삼봉 정도전,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떠났던 길이며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던 길이기도 하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
그 중 경기도 삼남길은 과천 · 의왕 · 수원 · 화성 · 오산 · 평택을 연결하는 총거리 100km · 10개 구간으로

삼남대로의 옛 노선을 연구 고증하고, 그 원형을 최대한 따르면서 고속도로 등으로 단절된 구간과

도보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구간 등을 대체로로 개척하여 역사문화탐방로인 경기도 옛길 삼남길을 개통하였다
*
제1길은 남태령 표석부터 인덕원 옛터까지로 삼남길 안내서에 거리 9.7km · 소요시간 2시간 30분이다

 

 

남태령역 2번출구
경기도 삼남길 시점인 남태령 표석으로 간다

 

 

 

 

정각사 해탈문

남태령 2번출구에서 남태령 고갯마루로 오르다 왼쪽에 있다

안쪽으로 보이는 노란 포대화상 옆으론 부처님이 탄생하신 룸비니동산이 있다

 

 

 

 

남태령 고갯마루

서울 · 경기도 경계지점이다

 

 

 

 

서울 관악구 · 경기도 과천시 경계석

남태령 빗돌이 옆에 있다

 

 

 

 

남태령 옛길 빗돌 · 과천루
이 고개는 「여우고개(狐峴)」로 불리었는데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으로 행차할 때 이 고개에서 쉬면서 고개 이름을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임금께 속된 이름을 아뢸 수 없어 남태령(남행할 때 첫 번째 나오는 큰 고개)이라 아뢴 이후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과천루(果川樓)

남태령 옛길에 위치한 과천루에 서면 좌우로 청계산과 관악산이 감싸고 있는 과천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과천8경 중 제5경 「남령망루(南嶺望累)」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과천을 말한다

 

 

 

 

삼남길이야기 1-1 / 조선시대의 옛길 이야기

 

 

 

 

과천루에서 왼쪽 돌계단으로 내려간다

 

 

 

 

삼남길 리본

리본 작업이 잘 되어 있어 길찾기 편하다

 

 

 

 

관악산둘레길 · 삼남길 방향안내판

삼남길이 한동안 관악산둘레길 과천구간과 같다

 

 

 

 

산길에서 나와 동네길이다

 

 

 

 

I'm 과천

제1방공여단 앞 횡단보도를 건넌다

 

 

 

 

남태령

횡단보도를 건너며 봤다

 

 

 

 

용마골(龍馬谷) 빗돌

제1방공여단 왼쪽에 있다

 

 

 

 

계곡으로 들어가 올라간다. 계곡 물이 불어났을 경우 우회해야 한다
*
할머니가 끈으로 하는 놀이를 가르치는 중이라 "사진 하나 찍겠습니다" 했더니 "메일로 보내주세요" 하신다

 

 

 

 

삼남길 리본

계곡을 따라 오르다 이곳에서 리본이 달린 왼쪽 산으로 오른다

 

 

 

 

용마골 입구 · 관문체육공원 방향안내판

관문체육공원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이동식을 했다

 

 

 

 

삼남길 리본

관문체육공원 방향으로 간다

 

 

 

 

관악산에서 관문체육공원이 있는 도로로 나오는 날머리다

 

 

 

 

사위질빵 열매

날머리 옆 과천성당 방향 길가에 많다

 

 

 

 

과천성당

삼남길 스티커가 붙어 있는 전기단자함 뒤로 희미하게 보인다

 

 

 

 

과천성당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및 신앙의 해 기념으로 전신자 성경 필사를 하고 있다

 

 

 

 

관악산 · 온온사 · 과천향교 방향안내판

과천성당을 지나 오른쪽 방향이다

 

 

 

 

2008년 개봉한 「6년째 연애중」 촬영지

다진(김하늘)과 재영(윤계상)은 6년째 사귀고 있다

서로 앞집에 살며 반동거하는 이 커플은 가슴 콩닥콩닥하는 연애도 아니고 법적으로 묶인 부부도 아닌 애매한 상황이다

안 그래도 별 자극없이 맨송맨송한 이들에게 각각 새로운 사람이 다가오는데...

 

 

 

 

은행나무 보호수

나무높이 25m · 둘레 6.5m · 나이 600년 · 지정일자 1982. 10. 5

온온사 입구에 있다

 

 

 

 

역대 현감비석군(縣監碑石群)

본래 시흥군 과천면 관문리 홍천말 249의 5번지 도로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조선 정조 6년(1782)에 건립된 현감 정동준의 비로부터 1928년에 세워진 변성환에 이르기까지 모두 15명의 비석이다

과천현에 부임했던 역대 현감의 변화상을 알 수 있을뿐만 아니라 대부분 건립연대를 알 수 있어 당대에 유행했던 비석의 형식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다

*

은행나무 보호수 옆에 있다

 

 

 

 

과천현 관아지 온온사(穩穩舍)
조선 초기 무학대사의 제자 열이 과주(果州 · 과천)의 치소(治所)를 이 일대에 정하여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없어 당시의 관아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왕의 능행 · 온행 · 사냥행 등을 수행하는 행궁의 기능과 지방관청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여

다른 곳의 관아보다 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천현 관아는 발견되는 석조 유물과 노거수목(老巨樹木)으로 으로 보아 지금의 온온사를 중심으로 한 관아지였을 것이다
과천현 신수읍지에 위와 같이 과천현 관아를 기록하고 있다

 

 

 

 

온온사(穩穩舍)

조선시대 과천현의 객사이다

온온은 경관이 아름답고 몸이 편안하다는 뜻인데 정조 14년(1790) 왕이 수원에 있는 현릉원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머무르면서 과천 동헌을 「부림헌」 · 이곳을 「온온사」라 이름 짓고 친히 편액을 썼던 것에서 유래한다

원래는 중앙동사무소 자리에 있었는데, 1986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온온사(穩穩舍) 편액
정조가 친히 쓴 편액으로 오른쪽 상부에 御筆(어필)이라 써있다

 

 

 

 

과천교회

 

 

 

 

과천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호) 명륜당
과천 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 관악산 기슭에 세워졌으나
자주 불이 나고 과거에 오르는 학생도 없는 등의 일이 생기자 터가 좋지 않다고 여겨 숙종 16년(1690)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44년 시흥향교 · 과천향교 · 안산향교를 통합하여 시흥향교로 하였다가 1996년 과천향교로 복원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숙종 16년 이곳으로 옮기면서 세워졌다. 1975년에 완전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구세군 과천요양원을 지나 과천여자고등학교로 가는 길이다

 

 

 

 

과천외국어고등학교 앞이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간다

 

 

 

 

관악산

공사로 건물이 없어 보인다

 

 

 

 

과천시청

 

 

 

 

보광사(普光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신라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절의 역사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946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고 절 이름도 다시 지었다

 

 

 

 

보광사 목조여래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법당 내에 봉안되어 있는 높이 1.64m의 목조여래좌상으로 목조대좌를 구비하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6 · 25전쟁 때 어떤 보살이 여주로 옮겼다가 1993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금 도금이 되어 있는 이 불상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유행했던 대량제작으로 인한 경직되고 생략적인 상들보다는
조선 전기의 불상양식을 고수하고 있는 상이므로 17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시흥 문원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9호)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문원리에 인접한 관문리의 옛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모든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구슬인 보주가 놓여 있다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7호)
높이 170㎝ 정도의 각석주에 전면만을 간략하게 선각(線刻)한 보살 입상으로 경기도 과천시 문원리 절터에서 갈현동 보광사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둔중해 보이는 이 보살상은 간략화된 옷주름과 평평한 얼굴로 보아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천종합청사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수도 서울은 엄청난 대도시로 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교통체증, 상 · 하수도 부족, 주택난 등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그 때문에 수도권 집중화를 해결하는 것은 국토계획에서 항상 중요한 과제였다

정부 과천청사가 세워지면서 비로서 수도 기능 분산을 통한 국토균형발전은 현실화 되었다

 

 

 

 

과천위버필드 공사현장

 

 

 

 

갈현삼거리로 가는 길이다

 

 

 

 

청계산

갈현삼거리에서 봤다

 

 

 

 

찬우물공원 방지

이곳 초가 정자에서 다시 이동식을 했다

 

 

 

 

김영철 기념비(金永哲紀念碑)
줄타기의 명인이자 철현금 산조의 명인으로 1976년 6월 3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가 지정되어 초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走索還同飛燕輕(주삭환동비연경 · 날아가는 제비와 같이 가볍게 줄 위에서 돌아간다)
조선 성종 때 성현이 궁궐에서 펼쳐진 줄광대의 연회를 보고 지은 관나희(觀儺戱) 중 최고의 찬사다

 

 

 

 

줄타기의 본향 과천 빗돌

 

 

 

 

가자(加資) 우물
정조가 능행차를 가던 중 이 부근에서 갈증을 느끼자 한 신하가 이 우물물을 떠다 바쳤다고 한다
물을 마신 정조는 물맛이 유난히 좋다고 하면서 이 우물에 당상(堂上)의 품계를 내렸다
이때부터 이 우물은 가자우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물맛이 좋고 차다고 해서 「찬우물」이라고도 불린다
*
지하 수량의 문제로 하루 세 번 시간제 급수를 한다

 

 

 

 

과천 지식정보타운 공사 예정지

 

 

 

 

관악산

 

 

 

 

갈현동 원예단지

 

 

 

 

관양동 청동기유적지 앞이다

 

 

 

 

追遠(奉安)堂(추원봉안당)
조선 제9대 성종대왕의 제7왕자 익양군의 증손자인 덕림수께서 약 450년 전 안양시 동편마을에 정착한 후에

전주 이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종친회에서는 이곳에 재실과 추원당을 건립하여 조상님들의 영혼을 영원히 추모하고자 지었다

 

 

 

 

관양동 선사유적 주거지
층위별로 구석기시대 뗀석기부터 조선시대 자기류까지 여러가지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중심 시기는 청동기 취락유적으로 해발 60m 내외의 남쪽 경사면에서 8기의 유구가 발견되었고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발견된 주거지 중 3호와 4호 유구는 형태와 내부 시설이 양호하여 복원하였으며

안양을 포함한 경기 중부 지역의 청동기 주거 양상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인덕원터 빗돌

인덕원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환관들이 한양에서 내려와 살면서 주민들에게 어진 덕을 베풀었다 하여 인덕이란 말에

마침 이곳에 관리들의 숙식터였던 원이 있어 인덕원이라 칭하게 되었다

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이곳 주변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1597년 5월 초사흘에 인덕원에서 쉬어갔다는 내용이 있고

특히 조선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 참배시 여섯 차례에 거쳐 인덕원 옛길을 지나갔다는 원행정례의 기록이 있다

*

인덕원역 6번출구는 사진 오른쪽 골목 앞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3.2km, 소요시간 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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