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부 먼우이면(遠又爾面 일명 먼우금) 옥동 · 한진리(현 송도역 부근) · 옹암리(현 유원지 입구부근)등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먼우금 · 한나루 · 독바위 · 송도를 병합하여 옥련이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36년 제 1차 부역확장 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하여 일본식으로 송도정(松島町)으로 개칭하였다
해방 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옥련동이 되었다
옥련동이란 유래는 백옥같은 돌이 많다하여 옥골 또는 옥동 · 옥련동 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인선 송도역
시점이다
옛 송도역사
1937년 개통된 수인선 협궤열차는 1979년 남인천역~송도역 간 · 1992년에는 송도역~소래역 간 운행이 중단되었다
예전 송도역 대합실
송도라는 글씨가 남아있다
송도역 급수탑
증기기관차가 수인선을 달렸을 때 사용하던 물통이다
송도역전시장
송도역 앞 공터에 소래 · 군자 등에서 수인선을 타고와 농산물 등을 파는 장이 있었다
그 후 수인선이 폐선되면서 상설시장인 송도역전시장이 들어섰다
시장 입간판 옆으론 옛 인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송도초등학교
1948년 학익초등학교 분실로 개교한 학교다
당시 군자 · 소래 등 수인선 주변에 살던 학생들이 열차로 통학했다
청학동 외국인묘지
청학동 외국인묘지 빗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국내에 체류하며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다 이 땅에서 숨진 외국인(외교관 · 통역관 · 선교사 · 선원 · 의사) 66명이 안장되어 있다
묘역은 중구 북성동 1가 1번지에 있었으나 6 · 25전쟁으로 파손된 것을 다시 복원해 관리하여 오던 중 시세 확장으로 1965년 3월 25일 이곳으로 이장했다
에드워드 바타버스 쥬니어(Edward Batavus Jnr · ? ~ 1902)
바타버스의 출생과 국내 활동에 대하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899년 인천해관의 사무직(Indoor Staff, Clerk)으로 발령 받아 1901년까지 3년 동안 화물검사결과 정리 · 관세징수 · 해관운영 관련 업무 보조를 담당하였고
1902년 방판(Assistant)으로 승진하여 해관 대내외 운영책임을 맡아 근무하다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프레드릭 프랭크 윌리엄 리치몬드(Frederick Frank William Richmond · 1876~1899)
리치몬드는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1876년 6월 6일 출생하여
1899년 경 대한제국 해관에서 입출항하는 승무원(Outdoor Staff, Tidewaiter, 당시 직책명 영자수(鈴字手)으로 입사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1월 19일 23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일본인 처 '치쿠(Chiku)'가 묘비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토마스 홀링워즈(Thomas Hollingworth · ? ~ 1899)
홀링워즈는 영국 Bristol 출신으로 1894년부터 1899년까지 6년 동안
인천해관에서 입출항하는 무역선의 밀수출입을 감시하는 승감원(Outdoor Staff, Tidewaiter, 당시 직책명 영자수(鈴字手)으로 근무하였으나
그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1899년 7월 28일 인천 제물포에서 사망해 그의 해관 동료들이 묘비를 세웠다
엘리 바 랜디스(Eli Barr Landis · 1865~1898) / 납득시(納得時)
랜디스는 1890년 한국 선교를 위해 입국한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 선교사로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1년 4월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성 누가병원(st. Lukes Hospital)」
다른 이름으로 「약선시직원(藥善施直院)을 설립하여 무료로 조선인들을 치료하였다
1895년 인천해관 촉탁의사 및 1898년 총세무사 촉탁의사로 활동하면서 해관원의 주치의로서 근무하였고
제물포로 입국하는 여행자에 대한 검역업무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환자를 돌보다가 과로로 쓰러져서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오례당(Woo Li Tang · 1843~1912) / 吳禮堂
오례당은 1843년 청나라 강소성 상주(江蘇省 常州)에서 태여나 1912년 6월 22일 6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인천해관 초창기 멤버로 1883년부터 1899년까지 방판(Assistant) 직으로 근무했다
일찍이 해외유학을 떠나 스페인 영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경력을 쌓았으며
조선에 해관원으로 입국할 당시에는 스페인에서 결혼한 아멜리아와 함께였는데 그의 나이 40세 때 일이었다
1883년 조선이 미국에 보빙사를 퍄견할 때 통역요원으로 수행하였고 복귀한 이후에는 줄곧 인천해관에만 근무하였다
그는 퇴직 후 무역상과 부동산 임대 · 금융업 등을 영위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버트 한스 칼 브링크마이어(Robert Hans Carl Brinkmeier · 1840~1930 / 불익마여(佛益馬餘)
브링크마이어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Braunsweig)에서 태여났다
우리나라에 언제 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889년부터 1897년까지 8년동안
인천해관에서 무역선을 통한 밀수출입을 감시하는 승감원(Outdoor Staff, Tidewaiter, 당시 직책명 영자수(鈴字手)으로 근무하였다
조선해관에서 물러나 1897년부터 1910년까지 독일영사관 서기관(書記官)으로 근무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살다가 1930년 4월 24일 이곳에 묻혔다
아만두스 라다기(Amandus Ladage 1859~1886) / 이대취(李大趣)
1858년 2월 6일 함브르크에서 출생한 프랑스계 독일인으로 추정된다
조선해관 창설멤버로 1883년 초대 조선해관총세무사 묄렌도르프가 데려온 외국인 해관원 중 한 사람이며
1883년 6월 16일에 창설된 인천해관에서 방판(Assistant) · 승감원(Tidewaiter) · 서리감사관(Acting Examiner)으로 근무하다
3년만인 1886년 8월 7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제물포에서 사망하였다
그 당시 같이 근무하던 해관 동료들이 정성을 모아 묘비를 세웠다
초파일의 봉경사
석불 앞에는 수박 · 참외 · 토마토 · 바나나 등 과일 상이 놓여있다
사철나무집
옥련동에서 오래된 식당이다
인천시립박물관
1946년 4월 1일 세창양행 사택에 한국 최초의 공립박물관이 열린 후
1953년 4월 1일 제물포구락부 자리로, 1990년 5월엔 송학동에서 지금의 자리로 왔다
학익고인돌(鶴翼支石墓 인천시 지정기념물 34호)
남구 학익동에 위치한 인천구치소(당시 소년형무소) 서쪽 구릉 위에 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주변 문학산에는 8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며 그 중 3기가 일제강점기에 수습조사 되었는데, 이 고인돌이 그 중 한 기이다
탁자식 고인돌로 덮개돌의 길이는 2.6m · 너비는 1.7m · 두께는 0.6m이다
받침돌의 한 쪽은 1개의 석재로 다른 한 쪽은 2개의 석재로 조성하고 막음돌은 없다
돌방에서 민무늬토기조각 · 돌화살촉 · 돌칼 · 갈돌 등이 출토되었다
문학산 부근에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소재했던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문인석(文人石)
왕과 왕비, 왕족의 무덤인 능(陵)과 묘(墓)를 보호하고 장엄하게 보이기 위해 주위에는 문무인석 · 석수 · 석상과 같은 능묘석물(陵墓石物)을 세운다
문인석은 이러한 문묘석물 중의 하나로 능묘 좌우에 하나씩 배치된다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나 금관을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고 있어 갑옷 차림으로 칼을 빼어 손을 앞으로 모은 자세를 취한 무인석과는 비교된다
*
숙부인 경주조씨 묘에 있던 문인석으로 웃고 있는 모습이 조금 과장된 듯하나 보기 좋다
삼층석탑 · 일본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비 · 잠령공양탑(蠶靈供養塔) · 부도 일력루 헌납비(敷島一力樓獻納碑)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선생 상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자유수호의 탑 뒤로 청량산 전망대가 보인다
청량산은 장관이 수려하여 청량산이라 명명하였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또 청량산이라 지은사람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이라고 전한다
6 · 25전쟁 참전국 국기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정문 옆에 있다
인권의 길
1998년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아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과 유네스코가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송도유원지 로터리에 이르는 250m의 도로를 「인권의 길」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에서 인권의 길이 선정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송도국제도시
옥련동 너머로 보인다
송도동(송도국제도시)
마쓰시마(松島)는 18세기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부르기 이전의 이름이다
일제는 이 「송도」를 군함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활약했던 군함 송도함을 기리기 위해 1936년 인천부 옥련리는 부산 · 포항 지역에 이어 송도정(松島町)으로 강제 개명된다
2005년 7월 우리 스스로 동춘동 앞바다 갯벌을 매립해 만든 국제도시의 법정동명을 송도동으로 정한다
고층 빌딩 밀집지역이 송도동이다
개명해야 하지 않을까?
인천대교
뒤로 무의도가 보인다
가천박물관
한국의료생활사에 나타나는 문화사를 조명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창간호실 · 문화재실 등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약전 현판
박물관 · 기념관들이 많아 다음을 기약하며 지나치듯 돌았다
룸살롱거리
송도엔 음식점 · 술집 · 모텔 등이 모여있다
인권의 길 빗돌
1998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정된 인권의 길이지만 아는 사람들이 없다
송도유원지 정문
예전 무의도에서 파온 모래를 깐 인공 해수욕장 유원지가 있었다
예전 송도유원지 수영장 터
수출을 기다리는 중고차들이 가득하다
중고차 수출업체
콘테이너박스에 무역회사 간판을 달고 있다
능허대(凌虛臺 인천시기념물 제8호)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서 따온 이름으로 만경창파(서해)를 하늘로 날아오르듯 항해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1988년에 연못과 정자를 만들어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능허대(凌虛臺) 현판
능허대 터 빗돌
백제 근초고왕 27년(372)에 동진과 교류하고 싶었으나 육로는 고구려가 있어 바닷길을 택했다
그 출발점이 바로 능허대 밑 한나루(大津)라는 나룻터였다
그 후 조선 광해군 때까지 이곳에서 중국행은 이어진다
옥련쉼터공원
송도석산
송도석산
1987년 채석 행위가 중단돼 흉한 돌산으로 남아있는 채석장으로 송도해안도로 공사를 할 때 이곳에서 돌을 파서 깔았다고 한다
독바위 혹은 독배로 불리던 이곳에 구한말 외국무역회사 타운센트사가 탄약고를 설치하기도 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장소로 유명하다
SBS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석산 천도절벽 촬영지 안내판이다
송도석산
예전 실미도 대원들이 지났던 길에서 봤다
송도고등학교
1906년 10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설립을 위임받은 윤치호가 개성 송악산 부근에 한영서원(韓英書院)으로 설립하였다
6 · 25전쟁으로 잠시 휴교했고 1952년 4월 송학동(지금 남부교육청 자리)에 남녀 피난 학생 500명을 모아 재개교했다
이듬해 11월 답동교사로 이전해 오랫동안 이곳에 정착한다. 이후 1983년 2월 옥련동으로 이전했다
사람이 먼저되라
지식 전달 교육보다는 도덕적 품성과 인간됨을 강조한 고 송암 이회림 이사장의 유지를 받들은 교시가 교문 안에 있다
고 윤영하 소령 흉상
해군 참수리 357호정 정장으로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서 순국했다
흉상 좌대에는 송도고등학교 2학년 안동헌 후배의 글이 있다
흑산도홍어회
홍어회골목 들머리지만 안을 들여다 보니 장사는 안한다
할머니홍어회
40여 년 전통의 홍어회골목에 마지막 남은 집이다
없어지기 전 다시 와봐야겠다
조개고개
홍어회골목으로도 불리던 곳으로 동양화학이 바다를 매립하기 전까지 바다를 끼고 있던 곳으로 반나절이면 망태기 하나 가득 조개를 캐오던 곳이었다
옥골
문학산 옆 노적산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 있는 마을로 바다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오그라든 마을이라 옥골이라 불렀다
옛 송도길
조개고개로부터 이어지는 곳으로 1971년 8월 21일 발생한 실미도사건의 대원들이 지나간 길이다
연수둘레길 안내도
송도 전철역 입구에 있다
송도역
대부분 기록을 위해 함께한 사람 사진을 올리는데
오늘은 빅터 사진을 안만든 게 생각나고 시계도 보여 전철 창을 통해 한 장 만들었다
시계는 기록을 위해 자주 사진에 담는다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3.2km, 소요시간 5시간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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