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용정리 앞바다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에서 용현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인천부 다소면 지역의 비랑(飛浪)으로, 비랭이고개 · 비룡현 · 용현 등으로 불렀다
1914년에 독정리와 비랑리를 합쳐 부천군에 편입되어 용정리라고 하였다
1936년에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지출정(日之出町)으로, 1946년에 용현동으로 개칭하였다
인하대역 5번출구
시점이다
인하대학교 1호관(본관)
《진(眞) · 1954년 2월 건립》이라 써있다
1903년 사탕수수 재배 노동자로 하와이로 떠난 100여 명은 1913년 자녀 교육을 위해 하와이에 한인기숙학교를 설립했다
이들 이민자들의 90%는 인천 출신이었다
그 때 하와이 교포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교장으로 초빙했고 그는 이 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펼치며 1918년 「한인기독학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전 대통령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돼 학교 운영에 전념하기 어려웠고 결국 학교는 1947년 폐교됐다
교포들은 한인기독학원의 판매 대금을 조국의 대학설립기금으로 보내고 싶다는 뜻을 이 전 대통령에게 전했다
미국 매사추세스공과대학(MIT)와 같은 수준의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던 이 전 대통령은 학교 부지로 인천을 점찍었다
하와이 교포들의 고향이자 공업단지가 들어서 있는 등 공대를 설립하는 데 장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천시는 용현벌 부지 413,223㎡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곳은 온통 미나리밭과 배추밭이었고 6 · 25전쟁 이후에는 잠시 피난민수용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1954년 그 벌판에 「인하공과대학」이란 상아탑이 세워졌다
인하대학교는 인천의 「인(仁)」과 하와이의 「하(荷)」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들어졌다
대학 설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 전 대통령은 1960년 하야할 때까지 매년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할 정도로 학교에 애정을 가졌었다
우남호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호는 민간여객기로 우리나라 항공사에 역사적인 서막을 올렸다
1955년 10월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한 항공역사의 기념비적 존재다
인하대학교 상징 비룡(飛龍)
대학 소재지인 용현동의 옛 지명 용정리(龍亭里) · 비룡동(飛龍洞)에서 유래한다
인경호 · 인경정
"두개의 여의주를 지니고 천 년을 채워 승천하려던 용현벌의 탐스런 이무기
이 간교한 이무기에 기지로 대항한 마음씨 착한 소년 인(仁)과 어리석은 이무기의 모습을 비춰보이게한 소녀 경(鏡)이
갖은 고생 끝에 이무기의 흉계를 물리치고 여의주를 하나씩 물고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수준원점
바다로부터의 높이를 말하는 해발의 기준점이 바로 수준원점이다
대한민국 지형 높이의 기준점이 있는 곳이다
수준원점
원래는 당시 바닷가였던 중구 항동1가 2에 설치했다
하지만 바다를 계속 매립하자 이 수준원점을 더 이상 바다에 두기 어려워 1963년 12월 지반이 평탄하고 단단한 인하공전 캠퍼스로 옮겼다
대학 설립자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좌대
1965년 이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1979년 처음 세워진 동상이었다
1983년 10월 학생들에 의해 밧줄로 묶여 동상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동상은 현재 학교 측에서 원형대로 복원해 보관 중이다
인하대 후문
인하대생들은 주로 후문으로 다닌다
정문 쪽은 공장지대이기 때문에 상권이 발달한 후문으로 다닌다
영진당구장은 2004년과 200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김가영 선수 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으로
5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있다
작고한 창업주 이순칠 옹은 학생에게 번 돈은 다시 학생에게 써야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장학사업에 관심이 많아 본인은 찢어진 신발을 신고 새옷을 안사면서 돈을 모아 상당한 금액을 매년 인하대에 기부하여 총장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인하문화의거리
용현동성당
흔히 「시연센」이라고 부른 시민교육연극센터가 있었다
2004년 성당과 남구청 그리고 전 시립극단 연극감독 박은희 씨가 힘을 합쳐 지하 74평 객석 150석 규모의 관람석을 갖춘 연극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 복권기금 등을 활용해 근근히 꾸려오다 2011년 문을 닫었다
해성보육원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인 해성보육원 본관 건물이다
프랑스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는 1894년 가을, 길거리에 버려진 4살과 12살 된 여자아이와
이듬해 4살, 2살된 남자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답동성당 내에 해성보육원을 설립했다
광복 이후 고아의 수가 급격히 늘자 보육원은 현재의 자리에 용현동 분원을 설치했다
6 · 25전쟁 때 신부와 수녀들은 200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송도와 덕적도 등으로 피란을 다녔다
전쟁이 끝난 뒤 보육원을 정비하고 1975년 보육원 자체를 용현동 분원으로 이전했다
솔샘나우리센터
살트르 성바오로수녀회가 설립 · 운영하는 상담센터로서 소나무와 샘, 그리고 나와 우리의 합성어이다
심리 · 정서적 문제를 겪고 있는 개인 및 가족 그리고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전문적인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여 문제 해결을 돕고
개개인의 품위와 건강한 가족 공동체 회복 및 육성을 목적으로 2008년 1월에 설립되었다
경인고속도로 굴다리
용일자유시장
독정이삼거리
용현동은 예전 '비탈진 곳'이라는 뜻의 비랑이 혹은 비랭이라고 불렀다
독쟁이 고개가 그 대표적인 비탈길이다
이전한 군부대 자리에 보훈병원을 짓는 것 같다
이윤생 · 강씨 정려(李允生 · 姜氏旌閣 인천 기념물 제4호)
이윤생(1604~1637)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1636~1637)이 발생하자 의병을 모아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며 적의 통로를 차단하였다
그러나 34살 때 적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자 그 소식을 들은 부인 강씨도 바다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에 철종 12년(1861)에 이르러 정려(旌閭)를 내리고 이윤생을 좌승지 · 부인 강씨를 숙부인으로 추증하였다
6 · 25전쟁 후 독쟁이골목과 수봉산 기슭에는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과 시내에서 쫓겨온 철거민들이 많았다
용현시장
1963년에 개설하여 남구 서민 경제의 중심 역활을 하는 곳으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나왔다
용현동 물텀벙거리
모두들 버리는 '아귀'를 처음 음식으로 개발한 「성원물텀벙」이 있는 곳이다
어부들이 잡은 아귀를 바닷물에 도로 버릴 때 텀벙하고 들어가 물텀벙이가 되었다
SINCE 1972 성진물텀벙
용현동에 물텀벙이 거리가 형성된 것은 40여 년전이다
용현동의 성진물텀벙에서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텀벙이를 해장국처럼 끊여 판 후
용현사거리 부근에 하나 둘씩 물텀벙이집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물텀벙이거리가 형성되었다
SK 스카이 뷰 아파트
흔히 SK저유소라고 불리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수공장 히다치가 있었고 광복 후에는 POL이라 불린 미군유류보급창이 있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기름을 인천항을 통해 들여왔고 이곳에서 각 지역으로 기름을 수송하던 일종의 물류기지였다
1972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자리에 석유공사가 들어섰고 이어 유공 · 선경 그리고 SK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부역(LH공사 건설현장)
경인선 주안역과 남인천역 사이에 가설되었던 주한 미군의 화물철도가 지나던 곳이다
1957년 부평 미군부대와 남인천역 근처에 있던 미군부대간 물자수송을 위해 가설되었다
남인천역은 인천 논산 간 입영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1990년 이후 부평 미군기지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1992년경부터 열차 운행이 중지되었다
지금은 LH공사가 재개발 사업중이다
모델하우스
용마루 기찻길 쉼터
지난 14년간 폐선되어 방치된 수인선 기찻길 일부를 2009년 희망근로사업의 일환으로 공원을 조성하여 용현2동 주민들의 쉼터로 제공한다고 써있다
남부역으로 가는 수인선 철로다
뒤로 엑슬루타워가 보이는 철로변 집이다
철로변 골목이다
용현동시외버스터미널(지금 용현대우푸르지오아파트)
1975년 9월 25일 용현동에 염전을 매립해 대지 5천 평 · 연건평 1,200 평 · 지하1층 지상 4층 규모로 세웠다
이 터미널이 생기기 전에는 삼화고속 · 한진고속버스 주차장은 동인천역 건너편에 있었고 시외버스들은 광장 오른편에 있었다
지금 버스가 서있는 곳에서 태화버스 등 일부 시외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능안삼거리
삼거리 왼쪽에 옐로하우스가 있다
만리성 옛날짜장면
옛 맛이 난다고 말하니 기분 좋아하신다
엑슬루타워
송도 바다가 보이는 53층 초고층 아파트다
삼익아파트
경인고속도로 인천쪽 끝부분에 있는 아파트로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아파트다
낙섬사거리 인천항 방향
옛 지도에 원도(猿島)라고 표기하고 납도(納島)라고 병기한 낙섬이 있던 곳이다. 옆에는 소원도(小猿島)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 봄 · 가을마다 인천부사가 이곳에서 서해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낙섬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바다를 막아 염전을 만들면서 둑으로 연결되었다
낙섬사거리 제1경인고속도로 방향
제2경인고속도로 방향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청색해안) 빗돌
월미도 서쪽해안은 그린 · 북성동은 레드 · 상륙 후 지원 해안이 되는 내항은 옐로비치다
지금은 매립되서 그렇지 실제 상륙지점은 용마루 근처라 한다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청색해안) 빗돌 뒤로 보이는 공장 터는 예전엔 전부 바다였다
토지금고시장
1990년대 후반 토지금고에 양옥집들이 들어서면서 골목 한 집 · 두 집 물건을 내다 팔었다
앞집 · 옆집 · 뒷집이 벽을 허물고 서로 마당을 내주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시장이다
2010년 인정시장 등록을 마친 시장이다
맹아산
용현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1960년대에 지금 부평에 있는 인천성동학교 전신인 농아학교와 고아원이 이곳에 있었다
1940년대 이곳 채석장 부근에는 인천에서 알아주는 장좌리 약물터가 있었다
용정공원
문학산 줄기의 가장 서쪽 봉우리인 노적봉과 청량산이 보인다
토지금고마을박물관
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박물관이다
토지금고 · 염전 · 바다 그리고 낙섬
토지금고마을박물관 전시실이다
굴다리버스정류장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1.5km, 소요시간 5시간 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