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지만
고려 명종 4년(1174)에 금나라에 사신이 다녀갔다는 기록을 볼 때 이미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회암사가 현재와 같이 거대한 규모로 중창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는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말에 인도의 고승인 지공(指空)이
"회암사의 산수형세가 천축국(현재의 인도)의 나란타 사원과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그 수기(受記)에 따라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또한 조선 초에는 무학이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태조(太祖)도 왕위를 이양한 후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효령대군 · 정희왕후 · 문정왕후 비롯한 많은 왕실 인물들이 불사를 후원하였고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들이 주석(住席)함에 따라 국가적 차원의 비호를 받는 최대의 사찰로서의 면모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회암사지박물관
국가사적 제128호 회암사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 · 연구 · 전시 · 교육하고자 건립한 전문박물관이다
영상관
박물관 관람 전 영상을 2번 봤다
입장료 2천 원이다
1층 상설전시실
회암사(檜巖寺)
회암사는 고려 말에 전국 사찰의 총본사였다
이후 조선 전기에 불교계의 여러 종파가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될 때도 선종의 본찰로서 크게 번영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회암사는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의 중 지공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나란타사원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중 나옹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 등이 공역을 마쳤다
절이 무릇 262칸인데 건물과 상설이 굉장하고 아름다워 동방에서 으뜸으로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는 정도이다
목은이 기문을 지었다
목은집 천보산 회암사수조기(牧隱集 天寶山 檜巖寺修造記)
회암사의 주지 윤절간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보제가 입적한 뒤에 부도에 명(銘)을 하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사찰의 일에 관한 시말(始末)을 기록해서, 보제가 이 사찰에 힘을 쏟아 끝없이 전해지도록 한 공적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역시 선생에게 부탁하는 바이니, 사양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기에 승락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회암사로 행차하였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하고 또 궁실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대부(隊副) 150명을 보내어 부역하게 하였다
무학대사 · 나옹선사 · 지공선사
용두(龍頭 · 토제 · 조선 전기)
회암사지 보광전지 북동쪽 모서리 부근에서 발견된 용두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용두는 그 크기나 형태를 볼 때 조선 전기 회암사의 높은 지위를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토수(吐首 · 토제 · 조선 전기)
회암사지의 중심 건물인 보광전터에서 발굴된 토수다. 내부에는 사래에 고정했던 못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궁궐 토수와응 달리 용의 모습을 하고 있어 조선 전기 토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물형석상 머리편(石獸頭片 · 석제 · 조선 전기)
서기료지 남서쪽 기단 밖 모래층에서 출토된 동물형 석상 머리 부분으로 앞니와 송곳니 등이 묘사된 입 부분이다
문지 석축단 등에서도 돌로 만든 짐승의 잔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건축 장식 부재로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1층 상설전시실
청동금탁(靑銅金鐸)
건물 추녀 끝에 다는 경쇠의 한 종류로 풍령(風鈴) · 풍탁(風鐸) · 첨마(檐馬)라고도 한다
이 청동금탁은 보광전 주변에서 출토되었는데 명문을 통해서
1394년(태조 3)에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 · 조선국왕 · 왕현비(王賢妃) · 세자 등 왕실 인물이 회암사의 불사를 후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지 출토 왕실 자기
회암사지에서는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는 최상품 자기들이 출토되었다
분청향완 목천서만(木川徐万)
충청도 목천(木川) 자기소에서 서만(徐万)이라는 장인이 국가에 세금으로 바친 공납자기이다
녕(寧 · 인녕부(仁寧府) · 장흥고(長興庫) · 내섬시(內贍寺) 등의 관청 이름이 적힌 자기들은
관청에 납품한 공납자기를 다시 회암사로 운반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內用) · 천(天) · 지(地) · 현(玄) · 황(黃) · 별(別) · 좌(左) · 우(右) · 간지(干支) 및 각종 숫자가 적힌 백자는
분원 관요(官窯)에서 제작한 것으로 분원 관요가 운영되면서 회암사에 왕실자기를 조달한 것으로 보인다
회암사의 잡상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잡상은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조선 후기 잡상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 수법도 매우 정교하다
지금까지 밝혀진 잡상의 종류는 모두 6가지인데
갑옷을 입은 장수 모습의 인물형 잡상 1종, 사람의 얼굴이나 새나 물고기의 몸을 한 잡상 2종, 새 · 물고기 · 짐승 형태의 동물형 잡상 3종이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잡상은 조선 후기 잡상보다는 중국 명 · 청 시대의 주수(走獸)와 닮아 있다
물론 잡상 가운데 봉황을 탄 선인상(仙人像)은 출토되지 않은 점
중국에는 없는 무인상(武人像)이나 상인하수상(上人下獸像)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무장형 잡상(武裝形 雜像 · 소조 · 조선 전기)
회암사지 출토 청기와 · 중국자기
청기와는 중국 명나라 황실에서 유행한 것으로, 평기와에 유약을 발라 청색이 드러나도록 구워 낸 것이다
청기와는 제작재료인 염초(焰硝)가 군수물자인 화약의 원료였기 때문에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제작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또한 왕실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궁걸이나 왕실의 원찰(願刹)의 일부 건물에만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청기와는 모두 수키와이고, 주요 건물지에서 1~2점씩만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건물 지붕에 상징적으로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
회암사지에서는 중국제 청화백자 파편이 출토되었다
주로 15~16세기에 제작된 대접 · 접시류 파편으로, 중국식의 화려한 당초무늬 ·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 명나라의 청화백자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왕실용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중국 청화백자가 회암사에서 여러 점 출토된 사실을 통해 당시 회암사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청화백자는 왕실에서 특별히 하사하였거나, 왕실 인물이 회암사에서 직접 사용한 자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청화백자 성화 명 완 편(靑畵白磁銘碗片 · 중국 명 성화년간(明 · 成化年間 1465~1487)
조선 15세기에는 중국 명대(明代) 경덕진(景德鎭)에서 제작된 청화백자가 다양한 경로로 유입되었다
특히 세종연간(1418~1450)에서 문종연간((1450~1452)에는 선덕제(宣德帝)가 백자와 청화백자를 하사하거나
사신이 자기를 진상하는 등의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 경덕진 관요산 청화백자 또는 관요 양식의 청화백자가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명 정통(正統 · 1435~1449) · 경태(景泰 · 1450~1457) · 천순(天順 · 1457~1464) 연간에 해당하는 29년 동안은
선덕제의 사치스런 궁정생활 및 환관정치에 따른 정치적 불안으로 경덕진의 운영이 중단되고 자기무역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세종 30년(1448) 이후에는 청화백자의 유입이 급속하게 줄었다
이러한 사실은 성종연간(1469~1494)에 임금의 친인척과 대신들뿐만 아니라 사대부가의 연회에서도 청화백자를 사용하는 사치풍조가 만연하여
1477년 그 사용을 금지하는 칙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성화(成化) 명이 있는 청화백자편과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으로 장식된 청화백자편은
조선 15세기 후반 명나라 청화백자의 유입과 사용 제한 등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청기와
청색 또는 녹색의 유약을 입힌 청기와는 「조선왕조실록」에 청와(靑瓦)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종(1418~1450)에서 광해군 재위기간(1608~1623) 사이에 청와에 관련된 기록을 보면
성종에서 중종의 재위기간에 청기와 사용이 확대되었으며 임진왜란(1952~1598) 이후
청기와의 유약 재료인 염초의 제작기술이 단절되어 광해군 재위기간에는 중국에서 염초를 수입하여 제작하였다고 한다
청기와는 제작재료인 염초(焰硝)가 군수물자인 화약의 원료였기 때문에 다른 곳에 사용할 만큼 충분하지 않아서 재료 조달이 어렵고
제작에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궁궐이나 왕실의 원찰(願刹)의 일부 건물에만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청기와를 비롯하여 다른 곳에서 출토된 예를 보면 기와가 서로 연결되는 미구부분이나 지붕을 덮었을 때 보이지 않는 면에는 유약을 입히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과 아래의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볼 때 청기어ㅏ의 제작에 따른 재료 수급 등의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다
*
청기와를 구워서 만드는 데 들어간 재력(財力)이 너무 많이 들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과 사정전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
문소전과 종묘에도 오히려 덮지 못했는데 어찌 불우(佛宇)에 이를 덮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문종1년 2월 29일
조선왕실의 행렬
왕이 참여하는 공식적인 행사에는 왕의 존재와 권위를 드높이기 위하여 대규모 호위병사와 의장용 깃발 · 무기 등을 동원하였다
어가 행렬에 동원되는 인원과 의장물의 규모는 거동의 목적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왕실 인물들을 태운 가마와 그 주변을 둘러싼 시위군병과 관원들, 각종 의장기를 비롯한 의장물과 고취악대 등으로 행렬의 위용과 화려함을 강조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회암사 행차
회암사에서 열린 왕실의 불교의식
2층 전시실
국내 최고 온돌 시설이 있는 서승당이 전시되어 있다
범자문 기와
산스크리트어 즉 범자(梵字)를 도안하여 문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범자문은 천수경(千手經)에 나오는 관음보살의 육자진언(六字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며
그 의미는 "옴,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으로 관음보살을 부르는 주문이다
이 주문을 외우면 여러 가지 재앙이나 병환 등의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관음보살이 지켜주고 성불을 하거나 큰 자비를 얻는다고 믿었다
범자문 수막새(토제 · 조선 전기)
용문 기와
용은 실제로 존재하는 여러 동물의 특징을 결합하여 형상화한 상상의 동물로, 만물 조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용은 벽사와 수호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 왕권의 상징물로 인식되어 왔다
기와의 문양으로 용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이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용무늬 사용을 금지하는 제도가 여러차례 시행되었는데
이는 용무늬가 왕과 왕실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암사지에서 여러 종류의 용문 기와가 출토된 사실로 볼 때 당시 회암사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용문 암막새(龍文瓦 · 토제 · 조선 전기)
용문 수막새 편(龍文瓦片 · 토제 · 조선 전기)
봉황문 기와
봉황은 상상속의 신령스러운 새로서, 성인의 탄생에 맞추어 세상에 나타나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봉(鳳)은 수컷 · 황(凰)은 암컷을 가르킨다
우리나라에서 봉황무늬는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봉황의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 왕비에 비유되었다
또한 태평성대를 예고하는 상서로운 새로 여겨져서 왕실의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회암사지에서 용문 기와와 함께 왕실의 상징물로서 관련 건물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기와의 발견으로, 당시 회암사의 높은 위상을 집작할 수 있다
천순경진 명 봉황문 수막새(天順庚辰 銘鳳凰文瓦 · 토제 · 조선 천순경진 1460년)
봉황문 수막새(鳳凰文瓦 · 토제 · 조선 전기)
석조 불상과 소조 불상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석조불상은 모두 파손된 채로 출토되었는데, 높이가 약 20cm 가량이며 모두 좌상이다
이들은 사암(砂巖)으로 제작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온화한 인상을 준다
회암사지 출토의 석조불상는 수인(手印) · 지물(持物) · 대좌(臺座) 등의 양식을 볼 때 고려 말의 불교양식을 계승하여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서기료지(書記寮址)에서는 소조불상편이 다량 출토되었다
소조불상편들은 크기가 작고 뒷면이 편평한데,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불전(佛殿)의 벽면을 장식하던 불상군(佛像群)의 일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중상(머리) 편(神衆像(佛頭) · 소조 · 조선 전기)
서승당(西僧堂) 절개 모형
승려들이 참선하는 선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한 구조의 구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바닥보다 45cm 가량 높게 설치된 'ㅌ'자형의 침상식 구들이 서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구들은 건물의 남북 양쪽에 있는 4개소의 아궁이에서 불을 땔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구들에 온기를 골고루 보내기 위하여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보인다
명문 기와
명문 기와는 명문(銘文)에 중점을 두고 다른 장식적인 문양을 보조적으로 사용하여 제작한 기와이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는 홍무삼십년정축삼월일(洪武三十年丁丑三月日 · 태조6년 1397), 효령대군선덕갑인(孝寧大君宣德甲寅 · 세종 16년 1434)
효령대군정통병진(孝寧大君正統丙辰 · 세종 18년 1436), 천순경진사년(天順庚辰四年 · 세조 6년 1460), 성화6년(成化六年 · 성종 1년 1470) 등이 있는데
이는 회암사의 중창(重創) 기록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왕실의 주요 인물이 회암사의 중창에 관여하였음을 말해 준다
건물 장식과 기와 명
용두 · 잡상 · 토수 · 암키와 · 수키와 · 암막새 · 수막새 등을 일러준다
효령대군 선덕갑인 명 수막새(孝寧大君宣德甲寅 銘瓦 · 세종 16년 1434)
천순경진 5년 명 암막새(天順庚辰五年 銘瓦 · 천순경진5년 1460)
천순경진 명 수막새(天順庚辰五年 銘瓦 · 천순경진 1460)
보광전 명 암키와(寶光殿 銘瓦 · 조선 전기)
황제만세 명 암막새 편(皇帝萬歲 銘瓦片 · 조선 전기)
궁궐 명 수키와(宮闕 銘瓦 · 고려 후기~ 조선 전기)
화문 기와
화문은 어떤 특정한 꽃을 도안한 것이라기 보다는 종교적 의미에서 천상의 꽃을 도안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화문에 줄기와 넝쿨을 연결하여 도안한 문양이 나타나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 매우 다양한 형태의 화문 기와가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의 화문 기와는 그 형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장식성이 강하며, 조선시대 화문 기와는 문양의 표현이 점차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화문 기와는 국화, 모란 등이 줄기나 덩굴과 결합되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어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화문 기와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화문 수막새(花文瓦 · 조선 전기)
회암사와 양주도자기 · 회암사의 명문 백자 · 연화문 기와
연화문 기와
연화는 모든 것을 태여나게 하는 힘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환생과 재생을 의미한다
그리고 군자의 청빈과 고고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상징성을 갖은 연화가 기와의 문양으로 채택된 것은 물에서 피어나는 것이므로 화마를 막는 벽사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연화문은 오랜 세월 동안 폭넓게 사용되어 온 문양이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삼국시대부터 각종 공예품의 무늬로 활용되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기 널리 애용되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기와는 도안된 형태를 보이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연화 수막새(蓮花文瓦 · 조선 전기)
회암사의 명문 백자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백자의 명문은 천(天) · 지(地) · 현(玄) · 황(黃) · 좌(左) · 우(右) · 별(別) · 회승(檜僧) · 삼보(三寶) · 괘(掛) · 불(佛) · 삼(三) · 정(正) · 십(十) · 명경 · 슉의궁 · 큰쇼 등으로 다양하다
명문을 나타낸 방식으로는 음각 · 정각 · 묵서 등이 있다
음각 수법은 도자기를굽기 전에 글자를 새겨 넣은 후에 유약을 바르고 구우며, 정각 수법은 도자기를 구운 후 뾰족한 도구로 쪼아서 새겼다
그리고 묵서 수법은 도자기를 구운 후에 붓으로 글자를 써넣었다
백자의 품질은 기명 수법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음각 명문과 정각 명문은 양질(良質) 또는 조질(粗質) 백자에서 찾아볼 수 있고, 묵서 명문은 주로 조질 백자에서 발견된다
정각 명문에서 한글 명문은 양질 백자, 한자로 숫자를 적은 명문은 다소 조잡한 백자에서 발견되는 점이 흥미롭다
백자 '큰쇼' 명 접시편(16세기) · 백자 '슉의궁' 명 발(18세기) · 백자 배(裴) 장군(15세기)
회암사 양주 도자기 / 파수항아리(조선) · 주구동이(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양주도호부에 하품자기소 · 중품도기소 · 하품도시소 각 1개소씩 모두 3개의 도기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424년부터 1454년까지는 이 자기소와 도기소가 확실히 운영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일정기간 가마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도기류 중에는 경기도 광주의 관요에서 생산되어 왕실에 납품된 것 이외에도
양주의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제작되여 납품한 것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각 명문이 있는 백자 · 음각 명문이 있는 백자 · 묵서 명문이 있는 백자
분청사기 인화문(15세기) · 분청사기 귀얄문호 편(15세기) · 백자발(15세기)
분청사기 조화 모란문 항아리 편(15세기) · 백자완(16세기) · 백자발(17세기)
회암 명발(檜巖 銘鉢 · 청동 · 조선 전기)
회암사지에서는 회암(檜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발이 모두 11점 발견되었다
이들은 각각 크기는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 굽 안쪽 바닥면에 두 줄로 명문을 새겼다
명문의 내용은 회암육십성전(檜巖十六聖殿) · 회암오백성전(檜巖五百聖殿)이라는 부분은 공통되며
각기 다기양십육(茶器羕十六) 또는 불전유과기양일(佛殿油果器羕一) · 반기양오십(飯器羕五十) · 실과기양사십육(實果器羕四十六) 등이 덧붙어 있다
즉 명문의 내용을 통해 이 청동발은 회암사의 16나한, 500나한을 모시는 전각에서 공양물을 담았던 불구(佛具)임을 알 수 있다
회암 명발(檜巖 銘鉢 · 청동 · 조선전기)
백자 벼루 편(白磁硯片 · 자기 · 조선 전기)
회암사 불화
1565년(명종 20)에 문정황후가 제작하여 회암사에 봉안한 불화이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이들 불화는 문정왕후가 아들 명종(明宗)의 쾌유와 장수(長壽) · 선정(善政) · 왕자의 다산 · 왕비의 회임
그리고 세자 탄신을 기원하고자 제작한 것이다
석가 · 미륵 · 아미타 · 약사여래의 화상을 각기 금화(金畵)와 채화(彩畵)로 50점씩, 모두 400점을 그린 것으로
회암사가 중수되어 경찬회(慶讚會)를 개최할 때 점안(點眼)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이 적힌 화기의 발문은 나암 보우(1509~1565)가 썼으며, 그림은 도화원에 소속된 전문화가 화원이 그렸다
삼화상(지공, 나옹, 무학) 진영 (삼베에 채색 · 조선 건륭 47년 1782 · 대곡사 소장 · 복제품)
회암사 약사삼존도
가운데 약사삼존도만 국립박물관 소장이고 왼쪽은 미국 · 나머지 3점은 일본 소장이다
회암사 약사삼존도(비단에 채색 · 조선 가정44년 1565 · 일본 호쥬인(寶壽院) 소장 · 복제품)
회암사 석가삼존도(비단에 채색 · 조선 가정44년 1565 · 미국 버크컬렉션 소장 · 복제품)
회암사 약사삼존도(비단에 금선 · 조선 가정44년 1565 · 국립박물관 소장 · 복제품)
회암사 약사삼존도(비단에 금선 · 조선 가정44년 1565 · 일본 도쿠가와 미술관 소장 · 복제품)
회암사 약사삼존도(비단에 채색 · 조선 가정44년 1565 · 일본 류조인 소장 · 복제품)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 · 지류 · 무의 정승남 기증) 탁본
고려 1377년(우왕 3)에 나옹화상(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성된 선각왕사비 탁본이다
선각왕사비는 보물 제38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화재로 파손되어 현재는 보존처리를 거쳐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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