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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부천옹기박물관(상설전시실1)

부천옹기박물관 상설전시실1은

옹기의 역사 · 제작과정 · 유통 · 옹기문양과 토기종류 등과 그리고 부천 점말 옹기터를 재현해 놓았다

 

 

부천옹기박물관 관람 포인트

 

 

 

 

상설전시실1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조선정부의 박해를 피해 각지에 교우촌을 만들고 교육사업과 성직자 양성에 힘썼다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노력한 결과 1886년 드디어 선교의 자유를 얻고

본격적으로 사회 · 의료 · 교육 사업 등의 각종 선교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점말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하나 둘 모여 마을을 이룬 것이 '점말'이라고 한다

고 김수환 추기경 역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알려져 있다

 

 

 

 

점말의 상징 여월동 느티나무

 

 

 

 

옹기 굽던 점말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이곳으로 몸을 피해 옹기를 구웠다는 데서 이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지금도 옹기를 굽던 가마가 남아 있다

 

 

 

 

점말의 옹기, 역사속으로 사라지다

점말 사람들은 옹기를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걸어서 영등포 · 왕십리까지 가 판매도 하였다

또한 우마차로 이동해 팔기도 했으며 도매로 넘기기도 했다

이와 같이 떡시루와 질그릇 등을 주로 제작하여 팔았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질그릇에서 화분으로 품목을 변경해 만들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1980년대에 이르러 수요가 사라졌고 제작도 중단되었다

현재 점마을은 사라지고 없으며 여월택지지구 개발사업에 의해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신앙항아리 / 조선 후기

순교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들어가 항아리를 구워 팔며 살았다

어떤 작은 항아리 하나엔 십자가를 표시해 구워 마을로 팔러 돌아다니며

항아리 사세요를 외칠 때 십자가 표시가 되어있는 항아리 밑부분을 두두리며 소리쳤다

그것은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혹시 교우 아니십니까라는 표시였다

만일 상대편이 교우이면 항아리를 흥정하는체 하면서 소식을 주고 받았다

이렇게 순교자들이 구웠던 항아리는 생계수단이면서 교우들끼리 소식을 주고 받는 정보의 수단이었다

 

 

 

 

빗살무늬토기 / 신석기시대

농경이 시작되며 씨앗을 저장할 필요가 생긴 선사인들은 빗살무늬 토기를 제작하였는데 이러한 토기를 옹기의 기원으로 본다

 

 

 

 

옹기의 역사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철기시대의 토기의 특징이 설명되어 있다

 

 

 

 

삼국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토기의 특징을 설명해 놓았다

 

 

 

 

겹항아리단지 / 백제

 

 

 

 

씨앗단지 / 조선

 

 

 

 

신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옹기를 보여준다

 

 

 

 

민무늬토기항아리 / 신석기시대

농경이 시작되며 씨앗과 곡식을 저장할 필요성 때문에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이른민무늬토기 · 덧무늬토기 등 다양한 질그릇이 만들어졌다

 

 

 

 

청동기 · 철기시대 · 삼국시대의 토기 특징이 설명되어 있다

 

 

 

 

인동무늬암막새 · 연꽃무늬수막새 / 통일신라시대

재에 흙물을 혼합한 잿물로 생산하는 회유옹기가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신라에 비해 일상생활에 쓰기 편리한 실용적인 도기가 많이 생산되었다

 

 

 

 

연꽃무늬 수막새(백제) · 도깨비얼굴무늬 기와(통일신라) · 연꽃과 짐승얼굴무늬 수막새(고구려)

 

 

 

 

참외모양 주전자(고려) · 단지(초기 철기)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에서 발달했던 고온소성의 도기제작기술을 전승하여 일상생활용기로서 유약을 입히지 않은 도기가 생산되었다

독창적인 고려청자가 발달했으나 이는 상류층 이외에는 사용하기 어려웠고 일반 생활용기는 주로 질그릇을 사용했다

 

 

 

 

옹기술독 / 조선

조선시대에는 옹기는 장독 · 물독 · 시루 · 뚝배기 등 광범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어느 가정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상생활용품으로 자리 잡았다

 

 

 

 

막걸리 주병 / 근대

일제시대에는 옹기 유약으로 광명단이라는 화학약품이 사용되었다

바르면 윤기가 좋아지고 이윤을 높일 수 있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지만 광명단에는 인체에 치명적인 납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생활옹기는 급격한 몰락을 맞게된다

 

 

 

 

자연미가 흐르는 옹기의 수화문

유약을 바른 후 손으로 모양을 직접 그리는 수화문은 거의 모든 옹기에서 볼 수 있는 문양이다

유약이 마르기 전까지 빠르게 그려내기 때문에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속도감이 있다

대개 무늬는 연속성과 유기성을 드러내며 단선으로 그리거나 복선으로 그리는 등 장인에 따라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아 형태가 자유롭다

 

 

 

 

태양문황독 / 일제강점기

 

 

 

 

초화문항아리 / 1930년대

 

 

 

 

천연방부제 옹기

 

 

 

 

숨쉬는 옹기

 

 

 

 

항아리를 만드는 옹기토

옹기토에는 일반 점토와는 달리 고운 모래가 섞여 있다

때문에 일반 점토에 비해 수축이 적고 형태를 만들기도 용이하다

특히 구운 후에 통기성을 높여줘 숨쉬는 용기를 만들 수 있다

 

 

 

 

온도에 따른 옹기의 변화

옹기는 분해기에 접어들게 되면 흑체에서 적열체로 변하게 되는데 470도 이하에서는 검은색이었던 것이

470도가 지나서부터는 산화되면서 흡열반응을 일으키게 되므로 표면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처음 가마에 불을 때고 소성을 시작할 때에는 컴컴한 암적색에서 시작하여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붉은 색 - 오렌지색 - 연한 황백색으로 변하게 된다

옛날 옹기장들은 육안으로 색깔 변화에 따른 온도를 구체적으로 몰랐으나 연한 황백색이 되면 옹기 소결 온도가 되었다는 것을 경험에 의하여 알고 있었다

 

 

 

 

옹기의 문양

초벌성형이 끝난 후 근개로 정형하여 그리는 근개띠무늬 · 목도장으로 무늬를 찍는 누름무늬 · 글자로 장식하는 명문

손으로 자유롭게 그리는 수화문 등이 있다

문양을 넣는 시기와 방법에 따라 다양하나 모두 소박하면서도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다

 

 

 

 

유약

옹기에 입혀져 있는 검붉은 빛의 유약은 표면을 반짝이게 하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물이 새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도 있다

전통기법인 잿물유약은 소나무 · 잣나무 등 각종나무와 짚을 태워 만든 잿물에 흙을 섞어 만든다

 

 

 

 

옹기의 제작과정

원재료인 바탕흙을 밟아서 곱게 짓이겨 불순물을 제거하고 물레를 이용해 다져진 흙덩이를 잘 쌓아 올린다

표면을 고르게 마름해 그늘진 곳에서 말린 뒤 잿물을 입히고 다시 건조한 옹기를 가마에 넣고 굽는다

 

 

 

 

흙밟기와 흙가락 늘리기

 

 

 

 

바탕작업과 옹기 빚기

 

 

 

 

완성하고 말리기

 

 

 

 

잿물치기와 굽기

 

 

 

 

다양한 형태의 옹기가마들

 

 

 

 

옹기의 질을 만드는 과정에 필요한 제토 도구

 

 

 

 

옹기에 모양을 잡는 성형 도구

 

 

 

 

성형 도구

 

 

 

 

제작과정 · 모양 · 용도에 따른 옹기의 종류 · 옹기에 붙여진 다양한 이름들

 

 

 

 

제작과정에 따른 옹기의 종류

질그릇 · 오지그릇 · 푸레독 등을 설명한다

 

 

 

 

모양에 따른 옹기의 종류

호형옹기 · 발형옹기 · 대접형옹기 등을 설명한다

 

 

 

 

용도에 따른 옹기의 종류

저장용기 · 실내용기 · 주방용품 · 운반용기 · 발효식품용기 · 제례용기 등이다

 

 

 

 

옹기에 붙여진 다양한 이름들

 

 

 

 

옹기장 · 옹기점 · 옹기점의 입지조건 · 전통옹기의 흥망

 

 

 

 

옹기점의 입지조건

 

 

 

 

옹기짓던 장소, 옹기점

오늘날 점촌 · 점막 · 점말 · 옹기점 · 독막 · 도곡 등의 지명은 옛 옹기점이 있던 장소다

 

 

 

 

옹기짓는 사람, 옹기장

고려시대에 옹기장은 나라가 관리하는 관청수공업, 절에서 관리하는 사원수공업 · 민간수공업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와서라는 부서를 만들어 옹기장을 관리했다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당시 관청에 소속된 옹기장은 10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통옹기의 흥망

고려시대에 이르러 현대 옹기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면 자기를 능가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옹기의 대중화는 조선 말엽과 일제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점차 일제가 민족산업을 탄압하고 옹기외에 가볍고 튼튼한 화학합성재질의 그릇들이 등장하며 옹기는 쇠퇴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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