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막사는 문무왕17년 (677) 원효 · 의상 · 윤필이 암자를 짓고 수도를 한 곳이다
그래서 절은 삼막사(三幕寺) · 산 이름은 삼성산(三聖山)이라 불리게 됐다
이후 신라 말 도선(道詵)이 중건하고 관음사(觀音寺)라 불렀는데, 고려 태조가 중수하고 다시 삼막사로 고쳤다
조선 전기에는 무학(無學)대사가 한양 천도에 즈음해 절을 중수하고 국운이 융성하기를 빌었다
조선시대부터는 「남왈삼막(南曰三幕)」이라 해서 서울 주변 4대 명찰의 하나로 꼽힐 만큼 유서가 깊은 절이다
칠보전(七寶殿)
조선 영조 39년(1763)에 암벽을 앝게 파서 조성한 「마애불」이 있다
삼성산 국기봉에서 삼막사로 내려오다 있다
칠보전(七寶殿)
「마애삼존불」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실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 유형문화재 제94호
좁은 칠보전에 쌀 · 국수 · 사과 · 미역 · 초 등을 바치고 절을 하고 있다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들의 기도가 모두 이루어지길 바래본다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 유형문화재 제94호
왼쪽에「일광보살」, 오른편에「월광보살」을 거느린「치성광여래」의 삼존불로 조선후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으로 중요한 석굴사원 자료다
이런 형태는 주로 칠성탱화에서 보이는 구도로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일광, 월광은 해와 달을 의미한다
이는 자손의 덕과 수명 · 재난 방지 등을 기원하는 신앙에서 유래한 형식으로
앞에 있는 남녀근석과 같이 해석하게 되면 칠성 · 다산신앙과 결합된 당시의 불교 현실을 보여준다
남녀근석(男女根石)
자연암석 2개가 남녀의 성기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남녀근석으로 부른다
신라 문무왕 17년(677) 원효가 삼막사를 건립하기 이전부터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전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 순조로운 출산을 하게되고, 가문의 번영 · 무병 ·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등 이름 있는 날이면 전국에서 몰려와 촛불과 과일을 차려 놓고 치성을 드린다
이러한 〈성기 숭배 풍속〉은 무속신앙 · 풍수신앙 · 동제 · 미륵신앙 등의 전통 속에 어울어져 있다
남근석(男根石)
여근석(女根石)
三龜字(삼귀자)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이 조선 후기 백련암지에 은거할 당시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꿈을 꾸고 바위에 음각으로 세 개의 거북 귀(龜)자를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불기2947년 경신중양 불제자 지운영 경서(佛紀二千九百四十七年 庚申重陽 佛第子 池雲英 敬書)"란 명문이 있어 1920년에 쓴 글임을 알수 있다
월암당(月庵堂)
조계종단의 대화합을 이끌어낸 제30대 총무원장 월암당 정대(月庵堂 正大) 대종사가 2003년 입적하신 곳이다
삼막사 사적비(三幕寺 寺跡碑) / 유형문화재 제125호
조선 숙종 33년(1707)에 건립한 것으로 삼막사의 사적을 적은 비석인데 풍화로 마모되어 거의 읽을 수 없다
지대석이 완전히 땅에 묻혀 버린채 보존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신 · 호랑이 등을 바위를 파서 양각했다
옆에 시주자 명단석 밑을 보니 2009년 11월이라 써있다
천불전(千佛殿)
삼신불좌상과 그 뒤로 천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삼층석탑 / 유형문화재 제112호
삼막사 승도 김윤후가 몽골군의 원수인 살이타이(撒禮塔)를 살해하여 싸움에 이긴 승적을 기념한 탑이라 전한다
전체적으로 둔중하여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높이 2.55m 탑이다
미륵석불
육관음전(六觀音殿)
성관음 · 천수관음 · 마두관음 · 십일면관음 · 준제관음 · 여의륜관음 여섯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삼막사 대웅전이다
명왕전(冥王殿) / 경기도문화재 제60호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해주는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시왕전 혹은 지장전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현판은 「명왕전」이다
1880년 의민 스님이 건립하였고, 1975년 중수하였다
범종루(梵鍾樓)
범종 · 운판 · 법고 · 목어 등이 있다
비 · 승탑(僧塔)
망해루(望海樓) · 명왕전(冥王殿)
삼막사(三幕寺)
국화전시회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