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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

충주 계립령로(鷄立嶺路) 하늘재 /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49호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까지 연결되는 옛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이사금) 3년(156년)에 개통되었는데

이는 죽령(竹嶺)보다 2년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고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고구려가 남진할 때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신라가 북진할 때에도 충주지방을 확보하는 통로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 고개를 넘어 금강산으로 향하던 중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을 만들고

태자의 누이 덕주공주는 미륵리 석조여래입상과 마주보이는 월악산 영봉 아래 덕주사 마애불을 만들고 머물렀다 한다

계립령은 고구려 때는 마목현(麻木峴) · 신라 계립령 · 고려시대에는 대원령(大院嶺)으로 불렀으며

대원령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한울재가 되는데,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하늘재로 바뀌었다

한훤령(寒暄嶺)은 하늘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충주 미륵대원지 주차장

충주 미륵대원지와 미륵세계사를 돌아보고 올랐다

시점이다

 

 

 

 

충주 미륵세계사 대웅전(大雄殿) · 안심당(安心堂)

신라 마의태자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미륵도량이다
몽골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과 복원이 반복되다가 1936년 큰 수해로 폐사되었다

1950년대 말 중창을 발원하며 건립한 도량으로 1961년 법주사 말사로도 등록했다

 

 

 

 

공기돌 바위

자연적인 바위에 약간의 인공(人工)이 가미되었으며

바위의 생긴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거북바위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정상 부분에 좁은 폭으로 길게 홈을 파서 그 홈을 따라 바위 밑 부분까지 물이 잘 빠지도록 되어 있다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 직경 1m 가량의 둥근돌(공기돌)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하여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 공기돌로 힘자랑을 하였다 하여 온달장군 공기돌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 보물 제96호

충주 미륵대원지 석굴의 본존불(으뜸가는 부처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불)이다

높이가 10.6m에 이르는 큰 불상으로 석굴(石窟)은 「Π」형이며

벽면에는 석굴암과 같이 조각상이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화재로 인해 부조상의 일부만 남아 있어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다

여래상의 얼굴과 손은 비교적 공을 들여 조각하였으나 다른 부위는 간략하게 조각하여 돌기둥을 보는 듯하다

얼굴은 상대적으로 입체적인 편인데 눈은 감고 있는 듯하며 눈썹은 반원형을 그리면서 코로 이어진다

머리는 나발과 팔각형의 보개로 표현되어 있으며, 보개 모서리에는 풍령을 고정하기 위해 철심을 박았다

양손은 가슴 앞에 두었는데 왼손에는 보주로 보이는 원형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하반신은 거의 돌기둥처럼 보이며 발은 반쯤 표현되었고 대좌는 복련좌이다

보개에서 대좌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돌은 총 6매이다

절터를 발굴할 당시 출토된 기와 중에 彌勒(미륵)이 다수 찍혀 있는 것으로 볼 때

부처의 명칭은 미륵으로 생각되나 왼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미륵상은 전례가 없어 단정하기 어렵다

이 석불은 10m가 넘는 불상이지만 얼굴이나 손 부분만 강조하고

나머지는 간략하게 표현하는 등 고려 전기 거대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을 보여 준다

*

전설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06호)을 만들었다고 한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등 /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19호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

하대석은 4각형이며 윗 부분에 연꽃을 새겼다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팔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등을 설치했던 팔각형의 화사석(火舍石)이 있는데 4면에 화창(火窓)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팔각의 옥개석을 두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 보물 제95호

높이 5m의 오층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기단을 만든 후 초층탑신석을 올려 놓았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옥개석 너비가 탑신석에 비해 아주 좁고 낙수면의 기울기가 심하며

각 층의 체감율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

이 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 화사석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으로 고려 수도인 개성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중주지역에 4각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9호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왼쪽(동쪽)에 위치하여 북향하고 있으며

길이 605cm · 높이 180cm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받침이다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갑문(龜甲文)은 생략하였으며 왼쪽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하였다

귀부의 등 가운데에 비좌가 있으나 비를 세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며

수차례 발굴조사에서 비석 조각조차 찾지 못했음을 볼 때 원래 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충주 미륵대원지(忠州 彌勒大院址 사적 제317호)

 

 

 

 

하늘재로 오르는 길

하늘재는 우리나라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고갯길로

숲길을 오르며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며 선조들의 삶을 만날 수 있는 역사 길이다

 

 

 

 

충주 미륵리 원터

충주 미륵대원지 창건과 더불어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 곳에 원(院)을 별도로 세우고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터는 고려초기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립령로(鷄立嶺路 · 하늘재)에 위치하며

충주를 넘어가면 문경 관음리에 절터가 있는데 이 또한 원(院)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조령(鳥嶺 · 새재)이 개통되면서 미륵리의 원(院)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미륵리 원터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두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건물의 형태는 「회(回)」자 구조로

가운데에 말을 묶어 두는 마방(馬房)을 두고 주변에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우리나라 최초의 고개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에 자리했던 이 원터는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지이다

 

 

 

 

한반도의 중심 중원문화

백두대간을 축으로 남한강 중 · 상류지역에 위치한 중원은

「넓은 들 가운데」라는 사전적 의미와 「나라의 중심」 · 「천하의 중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이 일대는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이 있던 자리이며

이후 신라 진흥왕 때 영토를 확장 시킴으로서 국원소경이 설치되었고 경덕왕 때에 이르러 중원경이라 불리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충주로 개명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지명의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앞다투어 차지하려던 땅이다

그 이유는 물과 길, 사람이 만나 월악산 지역의 지릅재와 하늘재로 이어지는 계립령과

남한강 수운을 통해 신(新)문화와 문물이 교류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하늘재 빗돌

하늘재 · 대광사 갈림길이다

 

 

 

 

하늘재 빗돌

신라 아달라왕 3년(156년)에 개통되어 삼국시대에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남에서 충청도 · 경기도로 가기 위해 제일 많이 이용됐던 이 길은 인근 죽령보다 2년 앞서 열렸다

조선 태종 14년(1414) 문경 새재길이 새로 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 100선」 중 10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 하늘재

 

 

 

 

하늘재 자연관찰로 아치

 

 

 

 

역사 · 자연관찰로 데크길

 

 

 

 

쉼터

 

 

 

 

이끼의 고마움

이끼는 물속에 살던 조류가 진화해 육지로 올라온 최초의 육상식물로 물속생물과 육지생물의 중간단계에 있는 생물이다

이끼는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대기오염의 지표종으로 사용된다

이끼는 자기 몸의 약 5배 이상의 물을 흡수해 저장해 비가 오면 흡수하였다가

가뭄이 오면 물을 배출해 땅이 마르는 것을 방지한다

때문에 지의류와 함께 「지구의 옷」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숲의 천이

숲이 나이를 먹는 과정을 천이라고 부른다

*

나지

용암대지나 건조한 나지에 지의류의 개척과 정착에 의해 시작된다

초지

지의류의 정착으로 수분이 생기면 이끼류와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초원이 형성된다

관목

초원에 새롭게 정착한 식물군에 의해 다양한 동물이 유입되면서 토양이 점차 비옥해진다

이제 초원에서 1m의 작은 나무를 볼 수 있다

이 작은 나무를 관목이라 부른다

양수림

시간이 흐르면서 햇볕을 좋아하는 1m이상 자라는 소나무와 자작나무 같은 양수가 등장한다

이 나무들이 숲을 이루면 햇빛이 가려져 점차 작은 초본이나 작은 양수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혼합림

반면 그늘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음수가 서서히 숲으로 들어오게 된다

드디어 숲은 음수와 양수가 뒤섞여 자라는 혼합림이 된다

음수림그러나 조화로웠던 숲은 양수보다 크게 자라는 음수로 인해

그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안정화되며 음수림이 형성된다

이로써 천이과정은 끝난다

 

 

 

 

쉼터

 

 

 

 

살아 있는 이정표

현재, 만국 공동 거리 측정 단위로 킬로미터(km)를 사용하지만

그 옛날 우리나라 순수 거리 측정 단위는 리(里)였다

십리는 약 4km · 이십 리는 약 8km인데 이십 리(二十里)를 스무 리라 하여 「시무나무」를

십 리(十里)의 절반인 오리(五里)는 「오리나무」를 심어 길 가는 나그네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때문에 시무나무는 이십리목(二十里木)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 뜻을 헤아려보면 스무 · 시무 등 모두 20리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시무나무와 오리나무는 나그네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하고

때론 과거길에 오르는 가족 일원이 오백리 한양까지 변고 없이 무탈과 급제를 기원하는 당산목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역사 · 자연관찰로 아치

 

 

 

 

솔숲

 

 

 

 

백자 가마터 / 조선 후기

백자를 생산하던 가마터로 길이 20m · 폭 5m 정도이고, 남아 있는 상태로 보아 소성실은 7개로 보인다

인근에 미륵리 요지가 있고 문경지역에도 조선 후기 가마터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백자를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마터에서 생산된 백자는 민수용으로 막사발이나 접시가 주를 이루며 문양이 없는 순백자이다

 

 

 

 

돌 축대

 

 

 

 

연아 닮은 소나무

충주시와 월악산국립공원사무소가 보호하는 나무이다

 

 

 

 

연아 닮은 소나무

 

 

 

 

하늘재 관리사무소

 

 

 

 

하늘재~포암산 구간 입산시간 제한

관리사무소 앞쪽에 있다

 

 

 

 

탐방로 안내

 

 

 

 

계립령유허비 · 하늘재 빗돌

 

 

 

 

하늘재 빗돌

 

 

 

 

계립령유허비(鷄林嶺 遺墟碑)

2001년 1월 문경시장이 세운 빗돌이다

 

 

 

 

쉼터

도유림 안내석이 있다

 

 

 

 

하늘재 관리사무소

포암사 · 관음정사 · 주차장으로 가는 산행 길이다

*

관리사무소 옆 쉼터에서 과일과 커피를 한 후

관음리 전망을 보려고 왼쪽 계단으로 올랐다

 

 

 

 

물 탱크

전망을 볼 수 없어 이곳에서 아래 주차장으로 갔다

 

 

 

 

관음리 주차장

 

 

 

 

화장실

 

 

 

 

연못

이곳에서 다시 하늘재로 오른다

 

 

 

 

하늘재 옛길 종합안내도

하늘재 · 포암사 · 관음정사 · 주차장 산행코스 2.9km으로 가는 산행 길이다

*

하늘재 옛길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 525m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로 삼국시대(156년) 때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하였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빼앗긴 하늘재를 다시 찾기 위해 끈질긴 전쟁을 벌였으며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몽진(蒙塵)할 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렇듯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조선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전에는 계립령(鷄立嶺) · 대원령 · 지릅재 등으로 불렀으나 요즘에는 거의 모든 지도에 하늘재라 표기하고 있다
오래된 세월만큼 길 양쪽에는 전나무 · 굴참나무 · 상수리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문경 쪽에서 오르는 길은 고갯마루 가까이에 사는 주민들을 위해 포장을 해 놓았으나 미륵리 쪽은 비포장도로이다

 

 

 

 

산신각(山神閣)

 

 

 

 

산신각(山神閣) 편액

 

 

 

 

산신(山神)

마의태자(麻衣太子) · 덕주공주(德周公主) 그림이 있다

 

 

 

 

 

 

 

 

하늘재에서 미륵대원지로 간다

 

 

 

 

숲길이다

 

 

 

 

역사 · 자연관찰로 아치

이번엔 숲길로 간다

 

 

 

 

숲속의 청소부 버섯

버섯은 죽거나 약해진 동 · 식물의 몸 안에 균의 형태로 들어가

영양분을 얻고 적당한 습도와 온도가 갖춰지면 밖으로 나와 식물처럼 몸을 편다

버섯은  · 식물을 분해하여 다시 흙으로 만드는 청소부 역할을 하는데

그 흙이 다른  · 식물의 영양이 되어 숲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준다

 

 

 

 

차량출입금지 구역 안내판

 

 

 

 

철문 집

 

 

 

 

월악산 산양이 살고 있어요

방사한 개체를 비롯하여 2019년 2월 기준 98마리의 산양개체수가 확인되고 있다

 

 

 

 

역사 · 자연관찰로 아치

오를 때 건넜던 다리다

 

 

 

민진이네 농원

 

 

 

 

하늘재 역사 · 자연관찰로 안내판

 

 

 

 

꿩요리전문점 대장군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할 향토별미 30대 맛집이다

점심 때 저녁을 예약했는데 자리가 없다

 

 

 

 

삿갓촌

2006년 제10회 충청북도 음식경연대회 꿩요리부분 대상 음식점이다

8가지 꿩 코스요리를 했다

 

 

 

 

걸은 거리 4.8km · 소요시간 2시간 40분

*

2024. 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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