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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은이성지 김대건기념관

은이성지(隱里聖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1836년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첫 번째로 사제 성소(聖召)의 열매가 맺어진 자리이다

1845년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활동은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곳에서 순교 전 공식적인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였다

즉 은이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성장(산 너머 골배마실) · 세례성사 · 신학생 선발 · 사제서품 후

사목활동의 직접적인 장소로서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은이」는 (조선시대 고지도에 언리(彦里) · 어은리(御隱里) · 은리(隱里) 등으로 표기되었다) 「숨겨진 동네」 · 「숨어 있는 마을」을 의미하는데

이곳은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은신처로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후 은이는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유서 깊은 신앙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

김대건기념관은 김대건 신부의 삶의 과정을 기록한 공간으로

탄생부터 사제로서의 삶 · 활동 여정을 기념하고 관련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김대건기념관

 

 

 

 

김대건기념관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안드레아 신부 연보

 

 

 

 

김대건 신부 가계도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청도 솔뫼(지금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과 고(高)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인 김운조가 1784년 입교한 이후 대대로 천주교 신앙을 이어가며 여러 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가문이며

이러한 환경에서 소년 김대건은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일 당시 솔뫼에 터를 잡았던 김대건 일가는 증조부가 1814년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1827년 서울 청파로 이주하였다가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으로 이주하였고

얼마 후 다시 골배마실에 정착하면서 은이공소와 인연을 맺게 된다

 

 

 

 

양지현지도(陽智縣地圖) · 광여도(廣與圖) / 19세기 중반

 

 

 

 

성(聖) 피에르 모방(Pierre-Philibert Maubant 羅 1804~1839) 신부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이다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면서 2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1836년 김대건 · 최양업 · 최방제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의 경리부로 보냈다

1837년 샤스탕(Chastan) 신부를 맞아 함께 새 공소를 세우고 조선어로 성사를 주는 등 교우들에게 필요한 지침을 만들었고

1837년 말 앵베르(Imbert) 주교가 입국하자 한국교회의 교세 확장을 위해 한국교회 조직화에 함께 힘써 나갔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소년 김대건 세례 및 신학생 선발

소년 김대건은 은이공소를 방문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간택되었다

조선의 박해가 심해지자 모방 신부는 먼저 신학생이 된 최양업 · 최방제와 함께

김대건을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선교회의 극동 대표부 신학교에 유학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836년 12월 2일 김대건과 최양업 · 최방제는 모방 신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십자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순명과 복종 서약을 하고 변문(邊門)으로 출발하였다

 

 

 

 

신학생 김대건

김대건 일행은 만주 · 요동 · 중국을 도보로 횡단하여 19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김대건 · 최양업 · 최방제 어린 신학생들은 파리 외방선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본격적인 신학 수업을 시작하였다

초대 교장이었던 칼레리(M. Callery) 신부에게 신학과 라틴어를 배우고, 전교회 책임자인 리부아(N. Libois) 신부와

데플레슈(M. Desfleches) 신부의 배려로 그곳 중등학교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하였다

1844년 12월에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단신으로 의주 변문을 통해 육로로 조선에 밀입국하였다

 

 

 

 

경기지(京畿誌) / 1842년경 필사본 30.3×20.3cm

1842년경 편찬된 경기지 3책(冊)에 수록된 양지현의 지도이다

고을의 지형을 강조하기 위하여 읍내면(邑內面)을 중심으로 산줄기를 감싸듯 그렸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도로는 서울에서 경상도를 오가던 큰 길이다

 

 

 

 

양지현지도 · 1872년 군현지도 / 채색필사본 35.8×25.4cm

조선시대 정부 주도로 편찬한 마지막 전국 군현지도집인 《1872년 군현지도》 중 경기도 〈양지현지도〉이다

산세를 회화적으로 표현하였으며, 관아 건물들의 배치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당시 읍치(邑治)의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주교요지(主敎要旨) / 1897년 목판 인쇄본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이 저술한 교리서이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글로 서술하였다

1786년에서 1801년 사이에 제작되어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다가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은이성지에 소장된 「주교요지」는 후에 재간된 목판 인쇄본이다

 

 

 

 

페레올(Ferrol. Jean Joseph 1808~1853) / 복제본

페레올 주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다

1845년 김대건 신부의 안내를 받아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는 박해 이후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입국 당시 6,000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가 8년 후 두 배가 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1846년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거듭된 박해와 과중한 업무 때문에 점차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병으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안성 미리내성지 김대건 성인 묘지 옆에 묻혔다

*

2009년 5월 페레올 주교 고향인 퀴퀴롱 마을 성당(남 프랑스 아비뇽교구 보클뤼즈현) 제의실 벽면에 걸려있던 초상화이다

 

 

 

 

동자주

상해 김가항 성당 천장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서품식

김대건 부제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상해에 있는 선교사 영입을 위해

작은 배 한 척을 준비하여 1845년 4월 30일 11명의 신자들과 함께 다시 상해로 건너갔다

이후 페레올 주교의 결정에 따라 김대건 부제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하에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조선 입국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 · 다블뤼 신부와 조선 입국을 위하여

1845년 8월 31일 타고 왔던 작은 배에 교우 및 선원들을 함께 태우고 상해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출발한 지 3일만에 이들이 탄 배(라파엘 호)는 서해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일행은 여기서 2~3일 동안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그곳을 떠나 10월 12일 금강 하류 강경 황산 부근에 도착하였다

 

 

 

 

오 바실리오 증언

김대건 안드레아 탁덕(鐸德 신부)은 본래 충청도 내포 사람으로 10여 세에 중국에 들어가

신품(神品 사제품) 공부하고 신품에 오르신 후에 조선으로 돌아오시어 선교하실 때 죄인도 양지 은이에서 뵈었으니

병오년(1846) 봄에 성교(聖敎) 일로 황해도로 배타고 갈 때 잡히시어 서울로 올라와 문옥과 형벌받은 사정은 모르되

그 해 8월에 하루는 비가 쏟아지며 뇌성(천둥)이 요란하더니 며칠 후 교우 말 들은 즉

"김 신부가 서울 새남터에서 그날 참수치명(斬首致命)하셨다"하더라

치명하신 후 신치관이와 여러 교우가 시체를 찾아 양성(陽城) 미리내에 장사 지낸 말을 치관이에게 듣고

추후로 죄인도 미리내 가서 김 신부 산소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Letter de Kim 1842~1845 영인본 / 2007년 김옥균 바오로 주교 기증

1842년부터 1845년에 이르기까지 김대건 신부의 친필편지이다

파리 외방선교회가 소장하고 있던 김대건 신부의 친필편지를 1984년 한국교회에서 인수하여 원본 크기로 영인 · 간행하였다

 

 

 

 

사제각모(毛冠 biretta)

가톨릭 성직자들이 지위를 표시하기 위해서 쓰는 3~4개의 각이 잡힌 모자이다

신부는 검은색 · 주교는 보라색 · 추기경은 홍색 · 교황은 백색의 모관을 쓴다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사목활동

김대건 신부는 은이를 중심으로 박해와 밀고의 눈을 피하여 험한 산길을 다니며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1845년 말경부터 이듬해 부활 대축일까지 수개월간 기거하며 사목활동을 이어가던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았다

1846년 4월 13일 은이공소에서 마지막 미사(예수부활대축일)를 봉헌하고 서울로 떠난 김대건 신부는

마포를 출발하여 백령도로 향했으나 6월 5일 순위도에서 체포되었고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골배마실과 고우르술라 모습

1961년 골배마실성지 조성시 야외제대에 설치되었던 부조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은이에서의 마지막 말씀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최양업 부제와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위한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1846년 4월 13일 은이공소에서 마지막 부활 대축일미사를 봉헌하고 이렇게 인사겸 부탁을 하고 길을 떠났다

 

 

 

 

은이 교우촌

은이는 한국교회사의 초창기 교우촌이면서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지이다

은이 교우촌은 조선으로 입국한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사목을 통해 김대건이 신학생으로 뽑힌 곳이자

서품을 받고 귀국한 사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로서 유서 깊은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혹독한 박해시기를 견뎌내고 개항 이후 은이의 신자 수는 1899~1900년에 200명 정도에서 1909~1910년에는 325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0년대 이후 산골 교우촌들을 기반으로 한 본당들이 경제적 빈곤과 신자들의 이동 등으로 교세의 부진을 면치 못하였을 때에도

양지면 지역은 골배마실과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3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신앙공동체를 유지하면서 본당 유치에도 적극적이었다

은이 지역에는 신자들이 본당 부지로 매입한 토지 800평이 있었으나

1927년 남곡리에서 사목하던 박동헌 신부는 산골보다는 교통이 편리한 벌터 지역에 성당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박동헌 신부는 부임 직후 은이공소의 강당 건물을 헐어 벌터에 16칸 목조 성당을 건립했고

골배마실과 은이공소를 통합한 남국리공소는 1928년 5월경 남곡리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날에는 양지본당으로 개칭하여 이르고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성합(聖盒 Ciborium)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성체를 담는 뚜껑이 있는 전례용구이다

성합의 형태는 따로 정해진 것은 없지만 반드시 내부를 금도금해야 하며 감실 안에 보관한다

이처럼 받침대와 대가 있는 둥근 구형체의 성합을 치보리움(Ciborium)이라고 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 성서

 

 

 

 

성교요리문답 / 연대 미상 목판본

한국 천주교회가 최초로 채택한 공식 교리서이다

천주교의 근본 교리를 문답식으로 풀이한 이 책은 돌리에르(Dolliere)의 한문본 「성교요리문답」을 번역한 것으로

1864년 베르뇌(Berneux) 주교에 의하여 초판이 나온 이래

1934년 「천주교요리문답」이 나오기까지 70여 년 동안 한국 교회의 유일한 교리서로 사용되었다

 

 

 

 

사후묵상(死後默想) / 1918년 필사본

일반 신자들이 죽음을 묵상토록 하기 위하여 르장드르(Le Gendre) 신부가 저술하였다

책의 맨 끝에는 대청광서 20년 대조선 개국 503년 갑오 정월일 필 책주 최신부

(大淸光緖二十年大朝鮮開國五百三年甲午正月日畢冊主崔神父)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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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성월(聖母聖月) / 1887년 인쇄본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 이탁(李鐸)의 저술로 1857년 중국에서 간행되었고,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한글로 번역되었다

한글본 「성모성월」은 로베르(Robert) 신부가 번역하여 1887년 서울의 성서활판소에서 초간된 이래 신자들의 성모성월 신심 묵상서로 널리 활용되었다

 

 

 

 

신명초행(神命初行) 上 · 下 / 1864년 목판 인쇄본

신앙생활을 위한 묵상서 Pensez-y-bien을 다블뤼(Daveluy) 주교가 번역하고 베르뇌(Berneux) 주교가 감준하여

1864년 서울 성서활판소에서 上 · 下 2권으로 간행되었다

이 묵상서에는 일반교리서의 묵상 부분이 부실하여 이를 보충하여 역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주년첨례광익(周年瞻禮廣益) 1-4권 / 1884년 인쇄본

성인 · 성녀의 전기를 담은 「성년광익」을 바탕으로 93인의 전기와 축일을 설명하고 잇다

1865년 베르뇌(Berneux) 주교의 감준 아래 1권만이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나 박해로 속간되지 못하다가

1884년 블랑(Blanc) 주교의 감준 아래 완질이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 1-4권 / 1914년 인쇄본

1969년 가톨릭교리서가 나오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기도서로 사용되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내용에는 모예(Moye) 신부가 1783년 저술한 「천주경과」를 따르고

구성은 롱고바르디(Longobardi)가 1602년 저술한 「천주성교일과」를 바탕으로 완성하였다

 

 

 

 

기해일기(己亥日記) / 1905년 인쇄본

1839년 기해년(己亥年) 박해를 전후하여 순교한 천주교인들에 관한 순교기록으로 185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玄錫文)이 편찬하였다

1905년에 간행된 이 책에는 뮈텔 주교의 서문에 이어 78명의 순교사기가 수록되어 있다

 

 

 

 

영세대의(領洗大義) / 1864년 필사본

영세를 통해 얻는 은총과 그에 합당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영세준비서이다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도리를 배우고, 계명을 지키고, 염경기구(구송기구)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회죄직지(悔罪直指) / 연도미상 필사본

대죄 중에 잇는 신자가 고해성사를 볼 수 없을 때 또는 임종 때에 상등통회(上等痛悔)로 구원을 얻도록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Aleni)가 한문으로 저술한 것을 다블뤼(Daveluy) 주교가 역술한 것이다

 

 

 

 

예수진교 사패 / 1911년 인쇄본

천주교와 개신교의 진위를 밝혀 변박(辨駁)하기 위하여 저술된 책으로 원래의 저자와 발간 연도는 미상이다

뮈텔(Mutel) 주교가 한문본을 감준하여 한글본으로 인쇄 발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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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감략(聖敎鑑略) 上 · 下 / 1916년 인쇄본

1866년 중국 북경 교구장인 들라플라스(Delaplace) 주교가 한문으로 역술한 성경을 

1883년에 조선교구의 보좌 주교였던 블랑(Blanc) 신부가 한글로 번역해서 간행하였다

이 책은 구약과 신약 중에서 선교에 가장 필요한 조목만을 골라 역술하였는데 각 장의 성경 내용을 문답식으로 다시 풀이하였다

 

 

 

 

성찰기략(省察記略) / 1890년 인쇄본

다블뤼(Daveluy) 주교가 저술한 고해성사를 위한 성찰서이다

1864년 서울 성서활판소에서 간행되었으며 필사본으로도 전해진다

천주십계 · 성교사규 · 칠죄종(七罪宗) 등의 각 조목과 그 조목에 위반된 여러 가지 형태의 잘못된 행실을 성찰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상경(聖傷經) / 1886년 인쇄본

예수 수난에 대한 묵상서이다

예수의 수난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30일 분량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는데

매일매일의 묵상이 서로 연결되어 마지막 날인 30일 째에 끝나도록 구성되어 있다

 

 

 

 

성경직해(聖經直解) 1-9권 / 1895년 인쇄본

주일과 축일의 복음성서를 주석한 책으로, 예수회 선교사 디아스(Diaz)가 북경에서 저술한 한문본 성경직해의 한글 번역본이다

우리나라에는 1784년 교회 창설시기를 전후하여 전래되었고, 최창현에 의해 일부가 한글로 번역되었다

1892년에서 1896년까지 9권의 활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성구(聖具) · 제의(祭衣)

 

 

 

 

촛대와 밀초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오늘날에는 교회에서 양초를 사용하지만 초기에는 밀랍으로 만든 밀초를 사용했다

이는 벌들의 순결성 · 희생성이 죄 없으신 순결한 어머니를 통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초는 또한 예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성반(聖盤 Patena)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미사 중 축성될 제병 특히 사제용 제병을 놓아두는 전례용구이다

일반적으로 성반은 둥글고 평평하면서도 약간 오목한 접시 모양으로 성작을 덮을 만큼의 크기로 제작된다

이 성반은 동(銅)으로 제작 후 금도금하였다

 

 

 

 

은이공소 제구류 · 제대용 촛대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금동으로 만든 제대용 촛대 · 초 받침 · 손잡이 · 받침대로 구성되어 있다

꽃잎 형태의 초 받침은 중앙에 짧은 원통이 부착되어 초를 끼우도록 되어 있고 긴 손잡이는 일자형 원기둥으로 나선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성체현시용 촛대(Candelabrum)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청동으로 제작된 성체현시용 촛대 · 손잡이 위와 좌우 2개씩 연결된 꽃줄기 장식에 꽃받침 형태의 초 받침을 부착하여

5개의 초를 꽂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으나 2개의 초 받침만 남아 있다

받침은 성서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포도 열매와 잎으로 장식하였다

 

 

 

 

성광(聖光 Monstrance)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성광은 성체 공경 신심이 발달하면서 신자들에게 성체를 보여주고 묵상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금도금된 원형의 이 성광은 성체를 두는 곳 둘레를 방사되는 물결 모양으로 꾸미고

상단부에는 십자가 · 대 마디 부분은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성체현시용 촛대(Candelabrum)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놋쇠로 된 성체현시용 촛대 · 성체현시 때 성광 양 옆에 배치하여 촛불을 켜기 위해 사용하엿다

초 받침 · 손잡이 · 받침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개의 초를 꽂을 수 있도록 손잡이에 초 받침을 연결하여 제작하였다

 

 

 

 

제병 굽는 기구(Host baking iron)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밀떡을 만드는 집게형 기구이다

밀로 반죽한 얇은 판을 눌러서 동그란 형태의 중형 제병 1개 · 소형 제병 2개를 만들 수 있다

둥근 판 안쪽에 십자가상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자 Ⅰ· H · S가 음각되어 있다

 

 

 

 

성교요리(聖敎要理) / 1876년 필사본

천주교의 교리를 문답식으로 풀이한 교리서이다

예수회원인 로벨리(Andreas Lobelli)의 한문본 성서요리를 한글로 번역한 필사본으로

총 425조목으로 나누어 천주교의 모든 근본 교리를 담고 있다

 

 

 

 

요리강령(要理綱領) / 1956년 인쇄본

그림으로 풀이된 천주교 교리서이다

프랑스 파리의 본느출판사에서 간행된 원본을 한기근 신부가 번역하고 뮈텔 주교가 감준하여

1910년 서울 성서출판소에서 간행되었다

 

 

 

 

제의(祭衣)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사제가 신자들을 뒤로하여 미사를 집전하던 시기에 입었던 로마식 제의이다

뒷면에 십자가 · 비둘기 · 물고기 · 밀 · 이삭 · 포도 등 예수님과 성령 ·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여러 무늬가 더욱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1924년에 은이공소 신자들이 서울 드브레(유) 주교에게 제의 두 벌을 청하며 보낸 서한이다

 

 

 

 

성석(聖石 Altar Stone)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대리석으로 된 성석의 네모진 표식 안에는 성인의 유해(遺骸)가 모셔져 있다

제대 중심에 홈을 파서 안치하게 되는데 이는 초기 교회 시대에 카타콤바의 순교자들 무덤 위에서 미사를 드렸던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봉성체용 성합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성체를 모셔두거나 사제가 환자에게 성체를 영해 주기 위해 모셔 갈 때 쓰는 성당 제구이다

봉성체 때에 사용하는 성합은 이처럼 성합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도록 작은 휴대용이다

 

 

 

 

성낭(聖囊)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성체포(聖體布)를 넣어 제대로 가져갈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사각으로 된 주머니 형태이며 제의와 같은 천과 색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요즈음은 잘 사용하지 않고 있다

 

 

 

 

감실보(龕室褓 Tabernacle Veil)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감실을 덮는 보자기로 전례에 따라 색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이 감실보는 영광 · 결백 · 기쁨을 상징하는 흰색의 인견에 예수를 뜻하는 모노그람마 · H · S가 수놓아져 있다

 

 

 

 

외국 신부님

 

 

 

 

한국천주교회사 교본 / 1960년

 

 

 

 

공의회 위한 기구문 / 1959년 9월 23일

 

 

 

 

강도영 신부님 장례식 / 1929년

강도영 신부님은 한국천주교회 세 번째 사제 서품자이자

한국땅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첫 번째 사제로서 초대 미리내본당 신부를 역임하셨다

사진 속 장소는 현재 미리내로 추정되며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 묘 옆에 안장되었다

 

 

 

 

남곡리 김대건 신부 기념각 / 1947년 건립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포(포만수 에밀리오) 신부님이 한국 문화나 건축물에 남다른 애정으로 한국 전통양식 기념각을 건립하셨다

지붕 위의 십자가가 눈에 띄며 한복 입은 포 신부님이 상고머리 아이들과 함께 찍은 이 사진은

어린이 양육사업에 헌신하신 신부님의 삶을 보여 준다

근대 건축 문화재이자 교회의 의미있는 기념각이 사라진 아쉬움도 남긴다

 

 

 

 

한국 최초의 주교 노기남 대주교님 주교 축성식(서품) 기념사진 / 1942년 12월 20일

 

 

 

 

큰 사랑을 이뤄 한몸같이 주를 섬기라

김대건 신부 옥중서간 중에서

 

 

 

 

상본(像本 holy card)

은이공소 신자들의 신심을 엿볼 수 있다

 

 

 

 

상본(像本 holy card)

 

 

 

 

김대건 신부 초상화 · 은이성지의 성역화 모습

 

 

 

 

김대건 신부 초상화 / 장발 루도비코作 1920년

 

 

 

 

김대건 신부 초상화 / 프랑스인 선교사 플뢰레(Fleuret) 作 1925년

 

 

 

 

김대건 신부 초상화 / 장발 루도비코 作 1929년

 

 

 

 

김대건 신부 초상화 / 장우성 요셉 作 1954년

 

 

 

 

김대건 신부 초상화 / 정채석 비오 作 1971년

 

 

 

 

김대건 신부 초상화 / 문학진 토마스 作 1983년

한국 공인 영정 제1호 지정작이다

 

 

 

 

김대건 신부 시복 시성 과정 연보

 

 

 

 

은이성지의 성역화 모습

동영상이 나온다

 

 

 

 

성전이 들어서기 전 이쑤시개공장

 

 

 

 

옛 은이공소 매입계약 직후 / 2012년 11월

 

 

 

 

철거 중 모습 / 2013년 4월

 

 

 

 

철거 중 모습 / 2013년 4월

 

 

 

 

철거 후 모습(김대건 신부 세례터) / 2013년 7월

 

 

 

 

은이성지 현재 모습

새 성전과 김대건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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