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성지(隱里聖址)
은이 마을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모여 살게 되면서 형성된 교우촌으로서
은이 (隱里)란 글자 그대로 「숨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은이성지는 1836년 1월 13일, 프랑스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羅) 신부가
그 해 4월경 이곳을 방문하여 당시 15세인 소년 김대건(金大建 1821~1846)에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성지 내 김대건기념관 앞 옛 은이공소지(隱里公所址)로 전해지는 곳에 소년 김대건이 세례받는 형상의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은 7월 11일 서울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이미 선발된 동료 崔良業최양업 토마스) ·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과 함께 라틴어를 배우다가
12월 3일 중국 마카오의 파리외방선교회 극동 대표부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8년 뒤인 1844년 12월 초에 최양업과 함께 만주의 소괄가자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았으며
이듬해인 1845년 8월 17일에는 상해 인근의 김가항 성당에서
제3대 조선 교구장인 페레올(Ferrol 高)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은이성지 빗돌
은이성지 사제관 · 쉼터
은이성지 ↔ 미리내성지 셔틀버스 운행 안내
쉼터 창에 붙어 있다
골배마실성지 안내
쉼터 창에 붙어 있다
김대건기념각
1927년 10월 7일 로사리오를 주보로 축성된 남곡리(벌터) 성당은 당초 은이에 짓기로 하였으나
시대의 변천은 산간벽지의 교우들만의 성당을 원치않았고 새로운 전교를 위하여 벌터에 축성되었다
남곡리성당의 2대 본당 신부인 파리외방선교회의 에밀리오 포(Emile Fromentoux 包萬壽 1941~1948 재임) 신부는
1947년 교우들의 뜻을 받들어 김대건 신부의 기념경당을 지었다
본시 김신부님 기념경당은 곧 골배마실 김신부님 유적지에 짓기로 뜻을 같이 하였던 것이나
신자들의 요청으로 벌터 본당 옆 공터에 지어졌다(용인천주교회사 중)
이후 6 · 25전쟁과 양지본당으로 이전 과정 중 허물어지고 사진으로만 남아있었다
이제 기념경당의 본래 건축 목적에 따라 이곳 은이성지에 김대건기념각을 복원(재현)하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하고 현양하려 한다
김대건기념각
1948년 8월 15일 남곡리본당 포 신부님 송별기념 사진이다
김대건기념각
1948년 8월 15일 남곡리본당 포 신부님이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한 사진이다
김대건기념각
2023년 9월 1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지 방문 기념사진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隱里聖址 金家港 聖堂 용인시 향토유적 제71호)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사제 서품을 받은 상해의 성당을 복원한 건축물이다
지금 은이성지 일대는 이미 1890년대 상당한 규모의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소년 김대건 가족 역시 골배마실에 터를 잡고 살면서 신앙 활동을 했다
소년 김대건은 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 돼 마카오로 떠났고 신학과정을 마친 후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1845년 8월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다
조선인 최초의 사제로서 은이공소에 도착한 1845년 11월부터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해
다시 떠난 1846년 5월까지 은이를 중심으로 서울과 용인 일대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김가항 성당은 17세기 중반 중국 상해 김가항에 있던 민가를 개조해 만든 성당으로
1841년에는 중국 남경 교구의 중심이었으나 2001년 상해 정부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철거됐다
수원교구는 철거 직전, 성당에 대한 실측을 실시하고 기둥과 대들보 등 일부 부재를 가져와 2016년 이곳에 복원했다
김가항 성당
나무를 깎아 만든 예수성심상 · 성모성심상이 십자가 양 옆에 있고 제대와 감실이 그 앞에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유해함
김대건 신부님 유해 3기와 머리카락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김대건기념관
김대건기념관
김대건 신부의 삶의 과정을 기록한 공간으로
탄생부터 사제로서의 삶 · 활동 여정을 기념하고 관련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사목활동
김대건 신부는 은이를 중심으로 박해와 밀고의 눈을 피하여 험한 산길을 다니며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1845년 말경부터 이듬해 부활 대축일까지 수개월간 기거하며 사목활동을 이어가던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았다
1846년 4월 13일 은이공소에서 마지막 미사(예수부활대축일)를 봉헌하고 서울로 떠난 김대건 신부는
마포를 출발하여 백령도로 향했으나 6월 5일 순위도에서 체포되었고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제의(祭衣) / 1930년대 양지본당 기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사제가 신자들을 뒤로하여 미사를 집전하던 시기에 입었던 로마식 제의이다
뒷면에 십자가 · 비둘기 · 물고기 · 밀 · 이삭 · 포도 등 예수님과 성령 ·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여러 무늬가 더욱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 초상화 · 은이성지의 성역화 모습
성모상
교육관이 뒤에 있다
사제관
예수성심상이 보인다
청년 김대건 길 안내판
소년 김대건이 세례받는 형상 조형물
예수성심상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을 내려다 보고 계신다
야외제대
성모상이 보인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제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은이성지 문화해설사 사무실
은이교 앞에 있다
청년 김대건의 길을 걷다
청년 김대건 길 안내판
청년 김대건 길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까지 가는 길에는 험한 고개 셋이 있다
이 고갯길은 한국인 첫 번째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생전에 미사를 거행하고 성사를 집행한 사목활동을 위해 넘나들던 행로였고
순교 후에는 이민식 빈첸시오에 의해 신부님 유체가 옮겨진 경로이다
예부터 천주교 교우들은 이 고개를 신덕고개(은이고개) · 망덕고개(해실이고개) · 애덕고개(오두재고개)라고 부르며
지금껏 도보순례를 하면서 성 김대건 신부님의 고귀한 순교 신앙정신을 기리고 있다
청년 김대건 길
은이성지 0.2km · 미리내성지 10.1km 방향안내판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이다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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