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서울 동관왕묘

서울 동관왕묘(東關王廟 보물 제142호)는 서울의 동쪽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이다

관왕묘는 중국의 장수 관우(關羽 162~219)의 조각상을 두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으로 1601년(선조 34)에 지었다

명나라에서는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문묘(文廟)처럼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무묘라 하여 크게 숭배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후기에 무묘(武廟)를 많이 지었다

동관왕묘의 중심 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丁자 모양과 ㅡ자 모양이 합쳐진 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 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 벽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었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동관왕묘 삼문

남문 또는 외삼문으로 불린다

 

 

 

 

동묘(東廟) 현판

 

 

 

 

동묘공원 빗돌

동묘의 빗돌로 외삼문 옆에 있다

 

 

 

 

내삼문

어막대(御幕臺) 공사로 오른편은 가림막이 쳐져 있다

 

 

 

 

어막대(御幕臺)

공사 가림막 창문으로 봤다

 

 

 

 

금잡인(禁雜人) ·  대소인원계하마(大小人員계皆下馬) 빗돌

관계없는 사람들의 출입금지 · 모든 사람들은 말에서 내리라는 빗돌이다

내삼문 오른쪽에 있다

 

 

 

 

동무

내삼문 안쪽 오른편이다

 

 

 

 

서무

내삼문 안쪽 왼편이다

 

 

 

 

정전

조선 선조 재위시 준공되었다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 현판

관제 신앙이 유행한 고종대에는 전국에 관왕묘가 우후죽순처럼 건립되었으며, 북관왕묘나 서관왕묘 등도 세워졌다
동관왕묘의 경우 1871년 정전이 퇴락하여 대대적으로 수리하였으며, 이후 어제어필 현판을 여러 차례 제작한 기록이 있다
1878년(고종 15)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의 어필 현판을 수리하고 어필을 새로 걸 때 참가한 감동(監董) 이하에게 시상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고종 어제의 현판 유물은 대한제국 이후의 것이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칭제하였으며, 1901년 현령소덕무안관왕(顯靈昭德武安關王)으로 부르던 관우를

황제로 올리는 존제숭호(尊帝崇號)를 통해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추숭하였다
이후 1902년 동관왕묘는 동관제묘로 개칭되었고, 관제묘의 의장의물은 황제례에 의해 개장하였으며, 이때 전호 편액도 새로 만들어 걸었다
당시 제작된 편액이 현재 정전 가운데에 걸려 있는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이다
편액의 왼쪽 말미에는 “한나라 관제의 성은이 그 위엄을 사방에 떨치니, 관제에 대한 존경심이 진심으로 우러나도다
광무 임인년 맹춘호(孟春号)에 친히 글을 지어 삼가 올리노라.”라고 쓰여 있다
이를 통해 광무 임인년(1902) 음력 1월에 고종황제가 어제어필로 썼음을 알 수 있다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 현판

위 동관왕묘의 편액과 형식과 내용까지 같으나 크기가 조금 작은 또 다른 편액이 현재 동관왕묘의 정전 협칸 위에 걸려 있다
이것은 원래 1883년(고종 20) 9월 25일 동소문 안 숭동에 건립한 북관왕묘에 있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북관왕묘는 갑신정변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인연이 있던 곳이었다
이에 고종은 관우의 영험으로 왕실이 안정되길 기대하며 북관왕묘를 건립하여

 관왕의례 또한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의 제사 절차를 따르도록 하였고, 고종과 왕세자도 자주 찾았다
이렇게 고종이 북관왕묘를 비롯한 여러 관왕묘를 건립한 것은

19세기 외세침탈에 이은 국가 운영의 불안을 해소하고 부국강병을 바라는 지배층의 열망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1895년 갑오경장으로 관왕묘 의례는 1년에 한 차례로 축소되었으나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다시 제사가 부활하였다
하지만 1908년 향사이정으로 북관왕묘가 동관왕묘에 합사되어 관우상을 비롯한 감실을 옮겼고

북관왕묘의 편액 또한 동관왕묘로 옮겨져 걸리게 된 것이다

 

 

 

 

드므(물그릇) · 향로석(香爐石) · 등명대(燈明臺 등롱대)

등명대에 백목전진상(白木廛進上)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정전 앞쪽에 있

 

 

 

 

현성전(顯聖殿 정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는 1902년에 들어서야 관왕(關王)을 관제(關帝)로 추숭하였으며, 
관왕묘 또한 관제묘로 불러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라는 편액을 사액하였다
이 편액을 정전 정면에 걸기 위해 원래 정전 정면에 걸려 있던 현성전 편액이 배위청 안쪽 천장으로 옮겨 걸리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동관왕묘 정전 안팎에는 총 50점의 편액 · 시액과 28점의 주련이 걸려 있다

 

 

 

 

현성전(顯聖殿) 현판

정전 배위청 내부에 배치된 사변형 현판 중 유일하게 용머리 무늬를 하고 있는데다

나머지 어제어필 현판보다 높게 걸려 있어 동관왕묘 현판 중 위계가 높다고 판단되는데

2004년 언젠가 현판의 단청을 보수하면서 원형을 충분히 고증하지 않은 채 개칠하여 원형이 훼손된 것을 알 수 있다

*

제작자와 명문이 없다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 편액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5 - 31

此有漢關王之諡號曠世興感(차유한관왕지시호광흥감) / 이곳에 한나라 관왕의 시호가 모셔져 있으니 이런 흥겨운 일이 또 어디에 있을 소냐
歲柔兆攝提仲秋親書敬揭焉(세유조섭제중추친서경갈언) / 병인년(1746) 중추에 친히 글을 짓고 삼가 모신다

편액 말미의 글이다

*

영조에게 있어 관왕묘는 명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조선을 구한 「재조지은(再朝之恩)」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곳으로 생각하여
1746년(영조 22) 8월 21일 동관왕묘와 남관왕묘를 수개하도록 하였다
당시 동관왕묘를 수리하고 어제어필로 제작하여 건 전호 편액으로

영조의 어제어필 시액과 마찬가지로 사변형이고 복판의 글씨를 양각하고 금자(金字)인 점은 일치하지만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복판의 바탕색이 청색이라는 점이다
동관왕묘가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동쪽에 해당하는 청색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그 재료가 청화백자나 단청을 그릴 때 사용하는 회회청(回回靑)이어서 주목된다
회회청은 수입 안료 중 최고가여서 현판에는 그 사용례가 많지 않으며 동관왕묘 현판 중에서 유일한데

이로 미루어 현판 중 전호 편액의 위계가 높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현령소덕무안왕묘( 顯靈昭德武安王廟)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5 - 32

동관왕묘에는 위 편액과 형태나 글자 및 단청문양이 일치하는 현령소덕무안왕묘 현판이 1개가 더 있다
현판 머리에 어지(御旨)라 양각되어 있어 영조의 어제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양자의 차이점은 복판과 모판의 바탕색이 대비되는 점이다
위의 편액은 복판이 청색이고 모판이 주색인데 비해, 아래 편액은 복판은 주색이고 모판은 청색이다
이로 미루어 1746년 8월 22일에 동관왕묘의 편액은 동쪽을 상징하는 푸른 청화 바탕에

남관왕묘의 것은 남쪽을 상징하는 붉은 주칠 바탕에 금자로 써 걸었다가 
후일 남관왕묘가 화재로 소실될 때 현판만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만고충절천추의열(萬古忠節千秋義烈)

동관왕묘에는 영조의 어필 시액이 또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만고충절 천추의열이고, 말미에 신사년 가을(歲辛巳仲秋書)에 썼다고 새겨져 있다
1761년(영조 31) 8월 영조가 능행할 때 동관왕묘에 가서 제례를 드린 후 환궁하였으며
8월 25일 만고충절 천추의열을 어필로 써서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걸도록 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

이와 같이 동관왕묘에는 여러 점의 영조 어필이 현존하는 데

당시 이러한 현판을 제작할 때에는 주로 피나무(椵木)를 재료로 사용하였다

 

 

 

 

동관왕묘 금동관우좌상

굳게 다문 입에 긴 턱수염을 늘어뜨리고 있는 높이 2.5m · 무게 2.4톤의 청동 상으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청동 주조 명작이다

 

 

 

 

천고완인(千古完人)

천고에 완벽한 사람이란 뜻이다

 

 

 

 

만고충심(萬古忠心)

수많은 세월 동안 지닌 충성스런 마음이란 뜻이다

 

 

 

 

벽석태산부공고(磐石泰山扶鞏固)

 

 

 

 

진한천성(振漢天聲)

관우의 용맹스러움을 칭송하는 의미로 한나라에서 떨친 소리가 천둥처럼 크다는 뜻이다

*

현판 테는 청룡 · 황룡 · 오색 구름을 그려 넣었고 네 곳 모서리에는 박쥐문양이 있다

 

 

 

 

칙봉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대군(勅封三界伏魔大帝神威遠鎭天尊關聖大君) 현판

천지인(天地人) · 하늘 땅 인간세계의 마귀를 항복시키는 대제이면서

그 신령스러운 위엄으로 아주 멀리까지 가서 모든 마와 척신을 진압하는 천존이신 관성제군이라는 뜻이다

 

 

 

 

성신문무(聖神文武)

문무에서 성스러운 신이라 칭송하는 의미이다

 

 

 

 

금번자개환위의(金幡柘盖煥威義)

 

 

 

 

숙종 어제어필(御製御筆) 시액 / 숙종실록 원문

유사동교역고묘(有事東郊歷古廟) / 동쪽 교외에 일 있어 고묘 지나다가

입첨유상숙연청(入瞻遺像肅然淸) / 들러보니 맑은 유상(관우상) 숙연했도다

금신치경사유절(今辰致敬思愈切) / 이번은 공경하는 마음 더욱 간절해지며

원우동방만세녕(願佑東方萬世寧) / 우리 동방 만세토록 편케 해주기 소원이로다

*

숙종은 선조 이후 조선후기 국왕 중 처음으로 동관왕묘를 방문하였던 임금이다

그는 관우를 천고에 드문 충의의 인물로 치켜세우고 장수와 군졸들을 격려하며 왕실 수호를 강조하였다

관왕묘를 방문한 이듬해에는 관우를 기리는 시를 지어 어제어필로 쓰고 목판에 새겨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걸게 하였다

당시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각 붕당의 기반이던 중앙 군영을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였는데
숙종이 관왕을 예찬한 시를 지은 것은 충성과 의리를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영조 어제어필(御製御筆) 시액

赫然忠義泰山同(혁연충의태산동) / 빛나는 충의는 태산 같도다
追憶逞年倍予裏(추억정년배예리) / 지나간 세월의 업적 돌이켜보니
凛凜英氣宛乎昔(늠름영기완호석) / 늠름한 기상 예와 같이 완연하구나
萬世歆香讓我東(만세흠향양아동) / 만세의 향기로움이 우리나라까지 왔도다
峕歲癸亥中秋中旬(시세계해중추순) / 이 계해년 중추 중순에

追慕拜手謹取同韻 敬續(추모배수근취동음경속) / 추모하여례하고 시를 지어 삼가 공경을 계속했다
御詣(어예)

*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동관왕묘에 들려 충의를 흠모하는 뜻을 내보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725년 관원을 관왕묘에 보내어 치제하였다

현판 왼쪽에 “계해년(1743) 중추(8월) 중순에 관왕을 추모하여 배례하고 시를 지어 삼가 공경을 계속한다”고 하고 ‘어예(御詣)’라 쓰여 있다
이로 미루어 1743년 8월 중순 영조가 동관왕묘를 참예하고 나서 어제어필로 써서 건 시액임을 알 수 있다

 

 

 

 

면충효(勉忠孝) 한수정 협서(漢壽亭 挾書)

충과 효에 힘쓰라는 의미다

*

관우는 여러 번의 칙봉으로 별호도 여럿 있는데 한수정도 그 중 하나로서

관우의 위상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한전장군수정후( 漢前將軍壽亭侯)에서 유래되었다

 

 

 

 

부강상(扶綱常)

인륜의 길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로 부식강상(扶植綱常)에서 취한 글이다

 

 

 

 

호연정기(浩然正氣)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찬 바른 기운이란 의미이다

 

 

 

 

정전

중심 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丁자 모양의 ㅡ자 모양이 합쳐진 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 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 벽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

전실과 후실 사이에는 좌우로 작은 무지개 모양의 협문이 있다

열주 아래 흰 띠를 두른 듯 칠한 것은 중요한 향사 공간이기 때문이다

 

 

 

 

충의관원(忠義貫笎)

정전 옆면 처마 밑에 있는 현판이다

 

 

 

 

현성보번(顯聖保藩)

 

 

 

 

만고표명(萬古標名)

동관왕묘 현판 중 시기가 올라가는 17세기의 것으로 명대 사신인 정룡이 썼다
모판형 현판으로 복판 바탕색은 흰색 바탕의 분질(粉質), 글자의 색상은 먹자(墨字)이다
만고표명을 비롯한 동관왕묘의 모판형 현판은 변아와 막지가 개채되어 있어 그 원형을 알기 어렵다

*

아주 오랜 세월 이름을 남긴 징표라는 뜻이다

 

 

 

 

상강쇄혈격양신자충간(湘江灑血激揚臣子忠肝)

뒷문 왼편에 있는 주련이다

 

 

 

 

태경고현조파인간고담(泰鏡高懸照破人間鬼膽)

뒷문 오른편에 있는 주련이다

 

 

 

 

현성전(정전)

뒤에서 봤다

 

 

 

 

현성전(정전)

뒤에서 봤다

 

 

 

 

계단 소맷돌

깨져서 새로 만들고 보관중인 듯하다

 

 

 

 

유청집희(惟淸緝熙)

 

 

 

 

글씨가 안보이는 편액이다

 

 

 

 

연못

 

 

 

 

내삼문 · 관리사무소

 

 

 

 

관리사무소당간지주가 앞에 있다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을공원  (0) 2023.10.22
전농동 부군당  (0) 2023.10.15
종로5가 · 동묘시장  (0) 2023.10.09
안산오색길  (0) 2023.10.07
고양누리길 3코스  (0) 2023.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