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누리길 3코스(서삼릉누리길)은 삼송역을 시점으로
솔개약수터 · 서삼릉 · 수역이마을을 거쳐 원당역에 이르는 길로 거리 8.28km, 소요시간 2시간 15분이다
*
서삼릉 태실을 가기 위한 걷기다
삼송역 5번출구
시점이다
서삼릉누리길 종합안내
삼송역 앞에 있다
북한산
삼송역 5번 출구 엘리베이터 뒤로 보인다
고양누리길 리본
고양고등학교 앞이다
하학수의 명장이발관
특급호텔에서 10년 근무했고 KBS 1 TV 그림을 그리는 가위손에 출연했다고 써있다
삼송유도회관
맞은편 골목으로 올라간다
삼송로 139번길
아이엠삼송아파트 · 삼송2차아이파크아파트
삼송로 139번길 언덕을 올라 봤다
숫돌고개로 가는 철문이다
S자형으로 굽은 나무가 있다
숫돌고개
조선조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1월, 이곳 삼송동과 오금동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숫돌고개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을 돕기 위해 출정한 명나라 대군과 일본군이 벽제관의 첫 전투를 벌이게 된다
명나라의 총 사령관은 이여송 장군, 그는 벽제관 전투를 승리하고 서울에서 편안하게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창릉천 방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매복에 걸려 숫돌고개에서 선봉대가 큰 피해를 보았고
자신이 직접 지휘한 본대도 패하여 개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일본군을 무시했다가 당한 패배였다
후퇴하면서 이여송이 훗날 복수를 다짐하며 이 고개의 큰 바위에서 칼을 갈았다고 하여 고개 이름이 숫돌고개, 즉 여석령(礪石嶺)이 되었다고 한다
개성으로 후퇴했던 명나라군은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후 일본군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전투없이 이곳 숫돌고개를 넘게 된다
염흥보 묘(廉興輔 墓)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염공휘흥보지묘 정부인 밀양박씨부좌 병향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廉公諱興輔之墓 貞夫人 密陽朴氏 祔左 丙向)
용도 폐기된 벙커
거북바위(龜岩)
북한산에서 서삼릉 방향으로 이어진 한북정맥 서삼릉 누리길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화강암계의 바위로 일부는 자연적인 현상에 따라 땅에 묻혀 있다
거북은 서쪽에 몸이 있고 동쪽으로는 머리를 들어 오른쪽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오래전, 북한산에서 살다가 창릉천을 따라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거북이라 알려져 있으며
묻혀진 다리가 땅위로 들어나면 창릉천 개울이 마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북바위(龜岩)
안내판에 있는 사진인데 지금의 형태와는 다르다
돌탑
서삼릉 2.23km · 삼송역 1.52km 방향안내판이 있다
권율대로 터널 위
서삼릉 2.05km · 삼송역 1.7km 방향안내판을 지난 곳이다
고양 서삼릉누리길 방향안내판
천일(예전 솔개)약수터 삼거리
이곳에서 오른쪽 길로 간다
천일(예전 솔개)약수터
천일(예전 솔개)약수터
서삼릉과 삼송 · 세수리 · 솔개 마을 이야기 안내판
조선시대에는 봄과 가을에 왕이 왕릉 제사를 위해 자주 고양 땅에 행차하였다
도성과 가까운 서오릉을 지나 서삼릉으로 행렬이 왕래하였는데 소나무 세 그루가 유난히 눈에 띄고 멋진 곳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삼송리(三松里)가 되었고, 세 그루의 나무가 있으니 세수리(樹里)가 되었다
솔개마을은 서삼릉 입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원흥동에 속한 자연촌락 이름이다
한문으로 송현(松峴)이며, 소나무가 무성한 큰 고개가 있어 솔고개라 했는데 후대에 솔개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솔개마을 입구와 서삼릉 부근에는 키가 크고 오래된 조선 소나무가 일부 남아 있다
모자 상
솔개약수터를 지나 큰 홍익교회로 오르는 언덕에 있다
큰 홍익교회
농협대학교 · 농협중앙교육원
보경루(寶慶樓)
광개토대왕비가 마당에 있다
영춘각(永春閣)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이 비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陵) 비석으로 일명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고주몽 · 동명성왕)의 17대 세손으로, 374년에 태어나 18세에 왕위에 오른 뒤 20여 년간 고구려를 다스렸다
재위기간 대왕은 나라를 막강하게 이끌면서 '막비왕토(莫非王土 ·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영토가 넓다는 뜻)의 시대를 개척했다
이 비는 광개토대왕이 돌아가시고 2년이 지난 414년에 아들 장수왕이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금석문으로 유명하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제1부는 고구려 추모왕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왕들의 세계(世系), 광개토대왕의 생애와 비의 건립경위가 적혀 있다
제2부는 대왕의 즉위 당시 일어났던 대외 정복활동과 업적이 연대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제3부는 묘를 지키고 관리하는 수묘인연호(守墓人煙戶)의 명단과 숫자 · 뽑는 방법 · 매매금지 · 능의 관리규정 등이 서술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의 중요한 쟁점 부분은 신묘년 고구려의 출정과 왜 · 백제 · 신라와의 관계를기술한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 나이이위신(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羅以以爲臣)"이란 구절로 한 · 일 양측의 입장이 상반되고 있다
일본은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라고 풀이했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들은 4세기경 우리나라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이것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라일본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72년 일본군 참모본부가 이 비문의 사건에 비밀리에 개입한 전말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밝혀지면서, 비문의 조작과 왜곡이 드러났다
또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 등에 의해 비문이 일부 파괴되거나 석회로 훼손된 점도 알려졌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 이후 비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결과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 왜구 ·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내용이 문맥상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이 해석이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 남조선 경영론은 터무니없는 억측으로 그 근거를 잃게 되는 것이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 분쟁과 관련하여 광개토대왕비의 가치는 더욱 높게 평가되고 있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점으로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 본 비석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터에
이곳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는 훌륭하고 위대한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모쪼록 광개토대왕이 품었던 원대한 웅지(雄志)와 고구려 선조들의 피내림(혈통과 정신의 계승)을 통해
오늘 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성취로 이어지길 겨레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
원명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소재지 / 고구려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에 위치
자 수 / 비석 4면에 새겨진 글자 수는 총 1,802자
규모 / 높이 6.39m · 각 면 너비 1.5m · 무게 47톤 · 재질 오석(烏石)
서삼릉보리밥집
효릉(孝陵 인종과 인성왕후)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仁宗 1515~1545 · 재위 1544~1545)과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박씨 1514~1577)의 능이다
인종은 중종과 장경왕후의 아들로 태여났으나, 생모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지 7일만에 세상을 떠나 문정왕후(중종의 세 번째 왕비)의 손에서 자랐다
1520년(중종 15)에 왕세자가 되었고 1544년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9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성왕후는 1524년(중종 19)에 왕세자빈이 되었고, 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비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 세상을 떠나 이듬해에 인종의 능 옆에 모셔졌다
*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미개방으로 남아 있던 효릉이 9월 7일 개방됨으로써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는 조선왕릉 전체가 관람객을 맞게 되었고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후속 조건이었던 「조선왕릉 40기 전체 개방」 약속도 실현되었다
판위(版位)
헌관이 제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절을 4배 한다
배위(拜位)라고도 한다
*
전주이씨 3분이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조상께 국궁4배를 실현한다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 · 어로(御路)가 옆에 있다
태실(胎室)
일제강점기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왕실의 태실을 발굴하여 수습한 유물들을 한곳에 모아서 조성한 태실군이다
태실이란 태를 묻은 석실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태를 생명체의 근원이라 여겨 매우 귀중하게 보관하였으며, 특히 왕실에서는 태를 백자 항아리에 담아 전국 명산에 묻었다
이곳에는 오석(烏石) 비군과 화강석(花崗石) 비군으로 나누어진다
오석 비군은 왕과 황제 · 황태자의 태실(22기)이고, 화강석 비군은 왕실과 황실 가족들의 태실(32기)이다
조성 당시에는 「일(日)」자형 담장과 일본식 철문으로 되어 있다가 1995년 담장과 철문을 철거하고 1996년에 발굴 조사를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비석 뒷면에는 언제 옮겨졌는지에 대한 내용과 일본의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서삼릉 태실 태항아리 재현품 전시실
태실은 왕 · 왕세자 · 왕자(대군 · 군) · 왕녀(공주 · 옹주) 등이 태어나면 그 태반과 탯줄을 묻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태를 생명체의 근원이라 여겨 매우 귀중하게 보관하였는데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모아 백자항아리에 담고 그 항아리를 전국 명산에 묻었다
서삼릉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을 발굴하여 수습한 유물들을 모아서 조성한 태실군으로 총 54기로 이루어져 있다
*
전시된 8점의 태항아리는 재현품으로 태조의 외항아리 1점 · 세종의 내항아리 1점 ·
인조의 내 · 외항아리 2점 · 숙종의 내 · 외항아리 2점 · 정조의 내 · 외항아리 2점이며
서삼릉태실연구소로부터 2020년 12월에 기증받아 전시되었다
왕자 · 왕녀 묘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왕자(王子) 묘 8기와 왕녀(王女) 묘 14기 등 총 22기의 묘를 한곳에 모아 조성한 묘역이다
각각의 봉분 앞에는 원래의 묘비석과 옮겨오면서 새로 제작한 묘비석이 세워져 있다
묘비석 뒷면에는 언제 옮겨졌는지에 대한 내용과 일본의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묘소는 모두 하나의 담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 앞에는 문석인과 상석 ·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숙의 묘(淑儀墓)
완화군(完和君 완친왕) 묘
대한제국 1대 고종의 장자 완화군(완친왕)의 묘로 초장지는 서울 하월곡동이다
빈 · 귀인 묘(嬪 · 貴人 墓)
조선과 대한제국의 국왕과 황제의 의 후궁(後宮) 묘 16기를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한곳에 모아 조성한 묘역이다
각각 봉분에는 상석과 묘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일부 묘비석 뒷면에는 묘가 옮겨진 때가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모두 하나의 곡장 안에 조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석물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빈 · 귀인 묘(嬪 · 貴人 墓)
빈 · 귀인 묘(嬪 · 貴人 墓)
회묘 앞에서 봤다
회묘(懷墓) 안내판
조선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의 생모인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1482)의 묘이다
폐비 윤씨는 윤기견의 딸로 1473년에 성종의 후궁이 되었고, 1476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투기의 죄로 왕비로서의 품위를 잃었다하여 성종과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 1479년에 폐위되고 1482년에 사사(賜死)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윤씨의 제사를 허락하고 묘의 이름을 회묘(懷墓)라 하였으며
1504년 갑자사화 이후에는 왕후로 복위되어 시호를 제헌왕후라 하고 회묘를 회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에게 내려진 모든 호칭을 없애어 지금의 회묘가 되었다
회묘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한국스카우트연맹 중앙훈련원
원당천
원당천 다리
카페 안녕 정원
서울문산고속도로 터널
수역이마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속한 자연촌락 마을이다
원당역과 서삼릉 사이에 위치한 가장 큰 마을로 「쇄기」로 불리기도 한다
본래 이 마을의 정식 명칭은 수역(水域)이 마을이다. 수역은 물이 많은 지역을 부르는 이름인데 옛 기록에도 수역으로 표기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수역이가 오늘날 쇄기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마을 앞에 넓은 들판이 있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 식당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지금은 덕양지역에서 유명한 먹거리촌이 되었다
*
성사1동 행정게시판이 있다
수역이마을 안내도
원당역 · 서삼릉길 안내판
배다리박물관으로 넘어가는 수역이길이다
예전 철도
전철3호선 철교 밑에 있다
행주기씨도선산(幸州寄氏都先山)
행주기씨의 연원은 약 3,000여 년전인 기자조선을 개국한 문성대왕 기자(文聖大王 箕子)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자의 47대손 마한왕 기훈(馬韓王 箕勳)에게는 우성 · 우량 · 우평 등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왕조가 기울자 그들은 부왕으로부터 각각 기(奇) · 한(韓) · 선우(鮮于)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백제 · 신라 · 고구려 등으로 떠났다
기우성(奇友誠)은 백제 온조왕에게로 가서 시중(侍中)의 자리에 올랐고, 행주산성 및 고양시 덕양구 일대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이곳은 오늘날까지 2000여 년 동안 행주기씨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이로써 기우성은 행주기씨의 득성시조가 되었다
기우성의 후손들은 신라 · 고구려에도 널리 퍼지고 고려에 이르러서도 크게 번성하였다
고려 인종(1122~1146) 시대에 이르러 문하평장사를 지낸 기우성의 65대손 기순우(奇純祐)가 행주기씨의 중시조(족보 1세조)로 기록되었으며
오늘날 행주산성 내성리에서 태여난 그의 6대손 손녀가 바로 원순제의 황후인 「기황후」이다
원당농협
원당역과 연결되어 있다
걸은 거리 9.5km · 소요시간 5시간 8분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로5가 · 동묘시장 (0) | 2023.10.09 |
---|---|
안산오색길 (0) | 2023.10.07 |
서삼릉 태실 · 회묘 (0) | 2023.09.24 |
효릉 (0) | 2023.09.24 |
인천대공원 (0) | 2023.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