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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울 정릉

서울 정릉(貞陵 사적 제208호)은 태조(太祖)의 두 번째 왕비 신덕황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96)의 능이다

신덕황후는 태조의 경처(京妻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로 있다가 조선 개국 후 현비(顯妃)로 책봉되었다

정릉은 원래 태조가 한성부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자신의 능자리도 미리 만들었다

그러나 태조의 첫 번째 왕비 신의황후 한씨의 아들 태종이 그녀를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아 능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작게 지은 후

목재와 석물을 태평관과 청계천의 광통교 복구에 사용되었고 왕후의 신주도 종묘에서 제외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1669년(현종 10) 현종이 송시열 등의 건의로 종묘에 신주가 모셔지고 능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되었다

혼유석 앞의 장명등과 혼유석의 받침돌인 고석만 옛 것이고, 나머지는 현종 대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정릉 매표소

 

 

 

 

정릉 경내 안내판

총 길이 3.8km의 산책로가 있다

 

 

 

 

정릉(貞陵)과 흥천사(興天寺) 안내판

 

 

 

 

 

정릉 재실(齋室)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재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방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실되었던 정릉 재실은 2012년에 발굴 조사하여 2014년 복원되었다

*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1m · 둘레 360cm · 나이 379년(2016년 기준) · 지정일자 1968. 7. 3

 

 

 

 

행랑(行廊)

행랑에는 대문 · 하인방 · 마구간 · 창고 · 집사방 등이 있는 부속방이다

행랑채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실이 있다

 

 

 

 

행랑(行廊)

책을 볼 수 있는 버들잎 방  · 빗물 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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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잎 방

태조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하다가 목이 타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움큼을 띄워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이성계가 버들잎을 보고 화를 내자 처녀는 "갈증이 심해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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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방

현종 10년(1669) 송시열 등이 정통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복위를 주장하자, 마침내 그녀의 신주가 종묘에 봉안된다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던 날 정릉 일대에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이 비를 백성들은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도서실

역사류 · 정기간행물 등이 있다

 

 

 

 

내문(內門)

제기고 · 재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제기고(祭器庫) · 재실(齋室)

 

 

 

 

재실(齋室)

제향을 준비하고 왕릉을 관리하던 영(令)과 참봉(參奉) 등이 사용하던 공간이다

 

 

 

 

재실 대청

 

 

 

 

재실

 

 

 

 

재실

 

 

 

 

재실 뒤뜰

 

 

 

 

제기고(祭器庫)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다

 

 

 

 

옆문

 

 

 

 

정릉 종합안내도

 

 

 

 

서울 정릉 왕릉해설 안내판

능은 토 · 일요일에만 오를 수 있다

 

 

 

 

조선왕릉 세계유산 빗돌

 

 

 

 

금천교(禁川橋)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물길을 건너는 돌다리다

 

 

 

 

금천교(禁川橋)

왕릉 금천교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다

진입공간으로 들어간다

 

 

 

 

예전 빨래 터

금천교 앞에 있다

 

 

 

 

수지 소나무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여주인공 양서연(수지) 나무다

예전엔 수지 소나무에 안내판도 있었고 인증 샷을 찍으러 많이 왔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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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오른쪽에 연못이 있었다 한다

 

 

 

 

홍살문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 때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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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공간으로 들어간다

 

 

 

 

정릉 안내판 · 상설도 해설

 

 

 

 

판위(版位)

헌관이 제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절을 4배 한다

배위(拜位)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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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 · 어로(御路)가 옆에 있다

 

 

 

 

정릉(貞陵)

죽은 자를 위한 성역공간(비각 · 능침공간)이다

수라간(水剌間) · 정자각(丁字閣) 뒤로 보인다

 

 

 

 

정자각(丁字閣) · 비각(碑閣) ·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은 왕릉에서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침전이라고도 한다

정자각은 제향 음식을 차려 놓는 정전과 제례를 올리는 배위청이 합쳐져 있는데 건물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丁(정) 자와 같아 정자각이라 불렀다

왕릉에는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경우에도 정자각은 하나를 세우고 제향을 함께 지냈다

대한제국 때는 침전 안에 집 모양 장식인 당가를 설치하면서 건물의 규모를 늘려, 건물 모양이 '一(일)'자형으로 바뀌었다

 

 

 

 

신계(神階) · 어계(御階)

월대(月臺)는 궁궐의 정전 · 향교와 같은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기단이다

 

 

 

 

신교(神橋) · 신로(神路)

정자각 뒤에서 능상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이다

 

 

 

 

신어상(神御床)

제향 때 신(神 혼령)이 위치하는 자리이다

정자각 뒷편에서 보았다

 

 

 

 

정릉 비각(貞陵 碑閣)

왕릉에 모신 왕과 왕비의 생애와 업적을 적은 비석인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보통은 정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비석 수가 늘어나면 칸 수를 늘려 짓기도 했다

*

정릉(신덕황후 강씨 神德王后 康氏)의 표석이 있다

 

 

 

 

대한 신덕고황후 정릉(大韓 神德高皇后 貞陵)

정릉의 표석은 1899년(광무 3)에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추존하고 1900년(광무 4)에 옛 표석을 갈아서 만든 것이다

갈아서 만든 표석이라 받침돌의 비석 홈이 여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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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시 대부분 표석 하나를 더 세우는데 정릉은 옛 표석의 표면을 갈아 다시 만들어 처음의 표석을 볼 수 없어 아쉽다

표석의 글씨는 고종황제의 친필이다

 

 

 

 

정릉 비각(貞陵 碑閣) 안내판

 

 

 

 

수복방(守僕房)

능에서 화재나 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수복이 근무하는 곳이다

 

 

 

 

수라간(水剌間)

왕릉에 제향을 지낼 때 쓸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등의 준비를 하는 곳이다

 

 

 

 

정릉 소전대(貞陵 燒錢臺)

소전대는 태조의 건원릉 · 제2대 정종의 후릉 · 제3대 태종의 무덤인 헌릉에만 있었는데

정릉의 소전대가 2009년 정릉 근처 약수터에서 발견되어 원래의 자리인 정자각 왼쪽으로 옮겼다

소전대는 조선 초기의 능에만 있었으며 축문을 태우던 곳인데, 정조 때 작성한 「춘관통고1」에 위치를 기록해놓아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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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燒錢)은 망자의 노잣돈을 마련해 주는 의식으로 화장을 하는 불교사회에서 매장을 하는 유교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유물로

세종 대 왕릉제도를 정비하여 이후의 능에서는 소전대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대신해 예감이 설치되었다

제2대 정종의 후릉 소전대는 세종의 지시로 없앴으며 세종 이후에는 예감(叡感)이 대신하였다

예감은 제례가 끝난 뒤 제물을 묻거나 지방을 태워 묻는 곳으로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한다

 

 

 

 

정릉(貞陵)

한양의 중심가에서 당시로서는 한양의 외곽이었던 정릉동으로 무덤이 옮겨진 것은 계모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증오심과 경계심 때문이다
원래는 안암동으로 능지를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능을 이장하면서 능 주변에 있던 비석 및 석상을 모두 제거하고 능을 묘로 격하, 사실상 주인없는 가묘(假墓)로 전락시켰다
세종대왕 때는 영정마저 불살랐다

그러다가 1669년 우암 송시열이 현종에게 제창하면서 종묘에 모셔지고 이 때 들어서 정릉으로 봉안되었다

 

 

 

 

정릉 관리소 ·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7m · 둘레 320cm · 나이 200년(2016년 기준) · 지정일자 1981. 10. 27

 

 

 

 

금천교(禁川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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