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아양동 보살입상(峨洋洞菩薩立像 · 향토유적 제10호)
안성 아양동 석불입상과 나란히 서있는 거대한 보살입상으로 이곳 마을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미륵부처로 존숭(尊崇)해오고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젊은 장수가 도기리 탑산에서 뛰어올라 알미산을 딛고 비봉산 장수바위로 뛰어가다가 실수로 여미륵의 목을 차서 부러뜨렸다고 한다
이후 그 장수는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아양동 사람들에 의해서 미륵의 머리는 복구되었다고 한다
원래의 위치는 현 위치에서 3m 앞이라고 하며, 일제 때 수해로 목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마을 주민들의 꿈에 미륵이 현몽(現夢)하여 주민들이 두레를 만들어 쌀을 거둬 복구했다고 한다
머리 부위에는 화관(花冠)과 화판(花辨)이 새겨져 있고 하단에 복발(覆鉢)이 있다
얼굴 전체의 인상은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후덕함을 느끼게 하며, 눈 · 코 · 입이 가지런하고 양귀는 가늘고 길다
보강한 목 부위에는 3도(三道)의 흔적이 엿보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고, 밑으로 내린 왼손과 허리 부분의 하부 이하는 매몰되어 있다
가슴 앞에 영락(瓔珞)의 문양이 보이고, 어깨와 팔 부분에도 화문(花紋)이 보인다
불상의 전체적인 조법은 고졸(古拙)하고 토속화된 경향을 띄고 있다
전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본래의 높이는 약 11자반(3.8m)이라 하는데, 현재 보이는 부분은 높이 3.37m · 어깨 폭 1.18m의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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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아양동 석불입상(峨洋洞石佛立像 · 향토유적 제15호)
아양동 보살입상 옆에 위치한 미륵불(彌勒佛)로 화강암 1석으로 으로 조각하였으며
수법이 고졸(古拙)하고 토속화 경향을 지닌 석불로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규모는 보살입상보다 작으며, 인상은 위엄이 깃들어 있다
머리 부위에는 관모처럼 두정에 표식이 있고, 눈 · 코 · 입이 가지런하고 귀는 짧고 목에는 3도(三道)의 표현이 없어 의문(衣紋)으로 보이는 넓은 띠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팔에 걸쳤는데, 좌우의 늘어진 소맷자락에는 각각 3개의 의문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무릎 부위 하단부(下端部)부터 매몰되었는데 현재의 높이는 240cm · 어깨 폭은 79cm 규모이다
석불 앞 시멘트로 조성한 제단석은 「을사년 정월십사일 아양동 일동(乙巳年 正月十四日 峨洋洞一同)이라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1965년 1월 보수 때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성 아양동 보살입상(峨洋洞菩薩立像) / 향토유적 제10호 · 안성 아양동 석불입상(峨洋洞石佛立像) / 향토유적 제15호
안성 아양동 보살입상(峨洋洞菩薩立像) / 향토유적 제10호 · 안성 아양동 석불입상(峨洋洞石佛立像) / 향토유적 제15호
안성 아양동 보살입상(峨洋洞菩薩立像) / 향토유적 제10호
안성 아양동 보살입상(峨洋洞菩薩立像) / 향토유적 제10호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젊은 장수가 도기리 탑산에서 뛰어 올라
알미산을 딛고 비봉산 장수바위로 뛰어 가다가 실수로 여미륵의 목을 차서 부러뜨렸다고 한다
원래의 위치는 현 위치에서 3m 앞이라고 하며, 일제 때 수해로 목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마을 주민들의 꿈에 미륵이 현몽(現夢)하여 주민들이 두레를 만들어 쌀을 거둬 복구했다고 한다
안성 아양동 석불입상(峨洋洞石佛立像) / 향토유적 제15호
석불 앞 시멘트로 조성한 제단석은 「을사년 정월십사일 아양동 일동(乙巳年 正月十四日 峨洋洞一同)이라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1965년 1월 보수 때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성 아양동 석불입상(峨洋洞石佛立像) / 향토유적 제15호
안성 아양동 보살입상(峨洋洞菩薩立像) / 향토유적 제10호 · 안성 아양동 석불입상(峨洋洞石佛立像) / 향토유적 제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