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海美邑城 · 사적 제116호)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1417년(태종 18년)부터 1491년(성종 22년)까지 축성된 서산 해미읍성은
고창읍성 · 낙안읍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읍성 중 하나로 1414년(태종 14)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뒤
1651년(효종 2)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영장(營將)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군사전략상 중심지였다
1579년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충청병마절도사영에서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10개월간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을 처형했던 장소인 호야나무가 아직도 묵묵하게 서 있다
해미읍성은 서산 9경 중 제1경이며 한국관광 100선 중 하나다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 남문으로 문 주변의 성돌은 육축(陸築)이라 해서 큰돌로 견고하게 쌓고 홍예문 위에 3칸의 누각을 세웠다
해미읍성은 일반적 행정기능의 읍성이 아닌 조선 전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兵營城)이다
현감겸영장박공민환무공위덕비(縣監兼營將朴公民煥茂功威德碑) · 좌영루첩성중수비(左營樓堞重修碑)
박민환위덕비는 1849년 세워진 비석으로 비좌 위에 하나의 돌로 비신과 이수를 만들었는데
이수 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싸우는 형상이고 위는 둥글게 귀접이를 했다
당시 해미읍성의 공사를 담당했던 현감의 위덕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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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중수비
내용에는 주요 문들이 모두 무너지고 훼손되자 1847년 겨울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는 남문 기와 4만 장을 바꾸고, 4월에는 남문 성돌에 회를 발라 그림을 그리고 기와를 운반하게 했다
또한 5월에는 동문 공사 · 7월에는 서문 공사 · 8월에는 진남문을 낙성하기도 했다. 이어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읍성 중수 과정에 동원된 인원은 수백 명인데 공사 중 다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편 비를 세울 당시 감독한 사람은 이장보(李章輔) · 지덕홍(池德弘) · 정언복(池德弘) · 정언복(鄭彦福)
김영신(金永信) · 신대운(申大運) · 김계갑(金啓甲)이며 목수는 김해성(金海成) · 석수는 서일관(徐日觀)이 담당했다
북
진남문 누각에 있다
해미읍성 가운데 길 서쪽 방향이다
읍성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 성 안에 있었던 민가 · 학교 등을 철거하고 연차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였고
1974년에는 동문 · 서문을 복원하였고,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 지역을 발굴하였다
문화시설사업소 · 진남문
포루(砲樓)
진남문 서쪽 포루로 모두 측면 3칸 · 정면 1칸의 규모다
해미읍성 호떡
해미읍성
해미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병합하면서
정해현에서 해(海)자를 따고 여미현에서 미(美)자를 가져와 해미(海美)로 부르기 시작하며 유래되었다
동북쪽은 앝은 구릉으로 대숲 옆에 청허정(淸虛亭)이 있다
포루(砲樓)
해미읍성 포루(砲樓)
성벽 둘레는 1.8km로 바깥은 돌로 쌓아 올리고 안쪽은 잡석과 흙으로 뒤채움을 성벽이다
동헌(東軒) · 객사(客舍)
지성루(枳城樓)
해미읍성 서문이다
덕숭산
해미읍성 잠양루 너머로 보인다
서산고등학교
동헌(東軒) · 객사(客舍)
국궁체험장
북암문(北暗門)
북문은 문루가 없고 문은 판문으로 되어 있는 성벽이 지나는 평거식이다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도록 안쪽으로 들여 문을 설치했다
안면도
서산고등학교 너머로 희미하게 보인다
해자(垓字)
해미읍성 성벽에서 9∼10m 떨어진 거리에 해자 내벽이 위치했던 사실이 확인됐으며
1 · 2차 외벽과 성벽 회절구간 해자의 형태도 일부 파악됐다
해자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판 뒤 물을 댄 것을 말한다
해미향교
오학산 자락 숲에 있다
오학산
옆으로 누운 소나무
청허정(淸虛亭)
조선 성종 22년(1491) 충청병마절도사 조숙기(曺淑沂 · 1434~1509)가 건립한 것으로
조선 전기 대표 학자 성현(成俔 · 1439~1504)의 개인문집 〈허백당집(虛白堂集)〉에 그 유래가 전한다
정자 이름인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청허정(淸虛亭) 현판
조선 초기 해미읍성은 충청도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병사 · 兵使)였다
조숙기가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소나무 숲이 우거진 뒷동산에 청허정을 지었다
이후 이곳에 온 관리들은 청허정에서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1494년 방문한 충청감사 조위(曺偉 · 1454~1503)는 청허정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 풍경의 시를 남겼고
권오복(權五福 · 1467~1498)의 〈수헌집 · 睡軒集〉에 절도사와 수령이 일을 마치고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가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했던 이순신 · 1790년 해미로 귀양왔던 다산 정약용도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1872년 해미현지도에는 옛터(古址)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신사(神社)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철거되었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 다시 정비하였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 촬영지
청허정 뒤에 있다
대나무 숲
청허정 옆이다
잠양루(岑陽樓)
해미읍성 동문으로 평거식 문 위에 문루가 있다
동문과 서문은 1974년 복원했다
무궁화동산
오학산이 뒤에 있다
조선시대 병장기(兵仗器)
불랑기 · 운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병장기(兵仗器)
환도 · 검 · 쌍수도 · 장창 · 마상편곤 · 방패 · 부월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해미읍성 회화나무 /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 나무 나이 300년 이상
이 나무의 고유 이름처럼 불리는 〈호야나무〉는 회화나무의 충청도 사투리다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 수술을 시행하였으나
재차 부패되어 2004년에 외과수술 및 토량개량 등을 거쳐 보호관리되고 있다
1962년 태풍으로 잘려진 가지는 절두산 성지에 보관 중이고 해미순교성지기념관에는 2004년 회화나무 수술시 제거된 가지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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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는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이곳을 찾았다
순교기념비(殉敎記念碑)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이후 1882년(고종 19)까지 진행된 천주교 탄압 때
충청도 지방에서 잡아온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 · 처형한 곳이 해미읍성이고
나중에 잡아온 신도 수가 너무 많아지자 1,000여 명을 생매장한 곳이 해미읍성 인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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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곳을 방문하여 순교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해미읍성 옥사(牢房)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를 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 재현하였다
1935년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海美殉敎者略史)〉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미읍성 옥사(牢房)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곤장과 고문 도구인 주리가 마당에 있다
해미읍성 옥사(牢房)
다산 정약용도 천주교인이라는 죄명으로 이곳으로 귀양을 왔었다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5.9m · 가슴 높이 직경 150cm · 나이 200년 · 지정일자 1982. 10. 15
호서좌영(湖西左營)
충청병영이 청주로 옮겨진 후, 호서좌영이 들어서 무장으로 호서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해 근무하던 곳이다
효종 3년(1652) 해미에 있던 충청병마절제사영을 청주로 이설한 후
해미읍성에는 충청도의 5개 병영 중 하나였던 호서좌영을 설치하고 반양리에 있던 해미동헌을 옮겨 왔다
서산 관아문을 모방해 1970년대에 복원한 2층 문루다
호서좌영(湖西左營) 현판
해미읍성은 단순 행정기능으로서의 읍성이 아닌 조선 전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兵營城)이다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230년간 충청지역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서해안을 방어하는 중요한 지욕이었기에 충청 5진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을 두었다
동헌(東軒)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다
십자가의 길 제1처
해미순교성지까지 가는 길에 14처가 있다
객사(客舍)
고려 · 조선 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로 객관(客館)이라고도 했다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전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망궐례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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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기념품판매점 · 먹거리판매점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 정문으로 외부는 홍예식이고 안쪽은 석주를 세우고 평보를 걸친 평거식 구조다
해미읍성을 도는 마차가 지난다
황명홍치4년신해조(皇明弘治4年辛亥造)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로 조선 성종 22년(1491)에 문루를 포함해 중수가 있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주작(朱雀)
고대 중국에서 하늘을 별자리에 따라 크게 다섯으로 구분하여 오관(五官) 또는 오궁(五宮)이라 하였는데
그 중 동서남북의 4관 중 남관(南官)을 다스리는 신이다
청룡은 동방 · 백호는 서방 · 현무는 북방의 신이다
포루(砲樓)
성벽 아래는 최대 7단을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쌓았고 그 위로는 상대적으로 작은 돌들을 이용했다
성벽의 높이는 약 5m 정도이고 현재 여장은 없지만 상단 외부로 미석이 돌출해 있다
포루(砲樓)
남문과 서문 사이 2개 포루가 방형으로 돌출해 있다
남쪽 포루는 성밖으로 7.5m · 서남쪽 포루는 7.6m 돌출해 있고, 두 곳 모두 측면 3칸의 장포를 세웠다
지성루(枳城樓)
해미읍성은 둘레에 적의 침투를 막기위해 탱자나무를 많이 심어 탱자성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지성루(枳城樓) 현판
지성루(枳城樓)
해미읍성의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었다
해미읍성 북암문으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