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이후 임진왜란으로 인한 전소 · 일제총독부청사 신축에 따른 이건
6 · 25전쟁 시 문루 소실 등 험란한 질곡의 세월을 겪으면서 1968년 중심축이 틀어진 채 콘크리트로 복원되어 제대로 된 모습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2010년 8월, 제 모습을 찾은 광화문이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고종 연간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일제에 의한 변형된 축선이 제자리를 찾았고 금강소나무로 재건된 문루는 한국적 건축미를 뽑낸다
현판 또한 당시 글씨를 되살려 완성되었다
경복궁 광화문 해치상
불을 잠재우고, 선악과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2010년 광화문 복원과 함께 재차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나 원래는 광화문 70~80m 전방에 있었다
광화문(光化門)
1395년(태조 4) 9월 경복궁 정문으로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임금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
흥례문(興禮門) 행각
흥례문 좌우에 위치한 행각으로, 서측으로는 정색(政色)과 마색(馬色) · 동측으로는 결속색(結束色)이 위치한다
정색은 조선 후기 병조에 속한 부서로, 무선사(武選司)라 하던 것을 정조 연간에 바꾼 것이다
임명사령장인 고신과 매년 정월에 봉급증표인 녹패 수여 · 장병의 휴가처리 등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다
마색도 병조에 속하였으며 승여사(乘輿司)였던 것을 정조 연간에 바꾼 것이다
왕의 수레나 가마 · 행차시의 의장 · 마굿간 등을 관리하였으며 관원이 지방으로 갈 때 역마를 제공하는 일도 맡았다
결속색은 도성과 대궐문의 개폐의 보류를 담당했다
흥례문(興禮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휘(避諱)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례문(興禮門) 현판
영제교(永齊橋)
영제교는 현재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흐르는 금천 위에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에 수정전 앞쪽, 근정전 동쪽으로 옮겨 다니다가 최근 흥례문권역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돌난간의 엄지기둥 위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고
다리 사방에는 포복 자세로 어구(御溝) 바닥을 주시하는 네 마리의 신수가 배치되어 있다
영제교 서수(永濟橋 瑞獸)
다리를 통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사악한 기운을 막고, 흉한 것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듯이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
경복궁의 금천인 영제천 서북쪽에 있는 천록(天祿)이다
영제교 서수 중 서북쪽에 있는 천록은 유일하게 혀를 내밀고 있어 유명하다
근정문(勤政門) / 보물 제812호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근정문과 행각은 고종 4년(1867년)에 근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좌우의 행각이 회랑으로 변형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정문(勤政門) 현판
근정전(勤政殿)
근정문을 통해서 봤다
근정전(勤政殿) / 국보 제223호
왕이 문무백관에게 조회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며 즉위 · 책봉 · 혼례 같은 주요한 행사를 치르는 곳으로
왕과 나라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이다
백악산을 배경으로 한 중층의 전각은 높고 넓은 2층 월대 위에 당당히 올라서 있으며
근정전 주변을 둘러싼 행각의 기둥들은 마치 왕을 호위하는 듯 줄지어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다니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신하들이 걷는 신도가 따로 있으며, 신하들이 지위에 맞추어 자리하도록 품계석을 세웠다
근정전 답도(勤政殿 · 踏道)
근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구름 속에 노니는 봉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근정전 사자상
근정전(勤政殿) 현판
근정(勤政)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닫집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둘러쳐진 어좌(御座)가 높은 대 위에 있다
황룡(黃龍)
근정전 내부 천장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황룡 2마리가 있다
조선이 황제의 국가가 되었음을 알리려고 고종이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다 새긴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정전(思政殿) / 보물 제1759호
왕이 평소 머무르며 나랏일을 돌보았던 곳으로 깊이 생각하여 나랏일에 임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조선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세종이 밤 늦도록 학문을 연구하고 집현전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었던 곳도 사정전이다
사정전(思政殿) 현판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는 뜻으로 사정전이라 하였다
어좌(御座)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둘러쳐져 있다
용신당(用申堂) · 협선당(協善堂)
사정전 서편 행각으로 1868년(고종 5)에 만들어졌으며 주로 일반적인 사무를 보는 공간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용신(用申)은 신하들을 잘 활용하여 널리 선정을 편다는 의미이며 협선(協善)은 임금과 신하가 서로 선을 돕는다는 의미이다
만춘전(萬春殿)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며, 사정전 동쪽에 위치하여 봄을 상징한다
만춘전(萬春殿) 현판
천추전(千秋殿)
사정전 서쪽에 위치하여 만춘전과 좌우대칭을 이룬다
천추전(千秋殿) 현판
사정전 서쪽에 위치하여 가을을 상징한다
안지문(安至門)
강녕전 앞의 작은 출입문이다
강녕전(康寧殿)
동소침인 연생전 · 서소침인 경성전 · 그리고 연길당과 응지당을 포함한 침전 일곽의 중심 건물이다
평면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대청마루와 온돌방 · 툇마루 · 협실 ·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강녕전(康寧殿) 현판
연생전(延生殿)
내전이자 침전인 강녕전의 부속 건물로 강녕전 동쪽에 위치하는 작은 침전을 뜻하는 동소침(東小寢)으로 지어졌다
연생전(延生殿) 현판
연길당(延吉堂)
1917년 창덕궁의 화재로 내전이 전소되자 이를 복원하기 위해 침전 권역의 건물들을 헐어 자재로 쓰게 되면서 헐렸다
1867년 복원 때에는 강녕전 · 연생전 · 연길당이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으나 지금의 연길당은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에 의해 독립 건물로 복원되었다
연길당(延吉堂) 현판
흥안당(興安堂)
강녕전 동쪽 행각에 있는 당 중 가장 북쪽에 있다
흥안(興安)이란 편안함을 키운다는 의미다
흥안당(興安堂) 현판
경성전(慶成殿)
내전이자 침전인 강녕전의 부속 건물로 강녕전 서쪽에 위치하는 작은 침전을 뜻하는 서소침(西小寢)으로 지어졌다
경성(慶成)은 경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므로 정령(政令)과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경성전(慶成殿) 현판
응지당(膺祉堂)
강녕전 동쪽 뒤편에 위치한 연길당과 대칭을 이루는 위치에 같은 기능의 전각으로
경복궁이 처음 지어질 때는 없었던 건물로 1867년(고종 4)에 처음 지어졌다
대국에서 관례처럼 천자 6침 · 제후 3침을 따라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자주적인 시도로 강녕전을 중심으로 5침이 회랑으로 연결되도록 지었다
응지당(膺祉堂)
응지(膺祉)는 복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우물
응지당 옆에 있다
흠경각(欽敬閣)
15세기까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 물시계를 설치했던 곳이다
흠경각(欽敬閣) 현판
자안당(資安堂)
자안(資安)이란 평안함을 의지한다라는 의미다
흠경각 서쪽 행각이다
함원전(含元殿)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세종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을 모셔두고 주로 불교의식과 행사를 열었으며, 단종이 거처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서쪽 · 흠경각 북쪽에 위치한다
함원은 원기를 간직하다 라는 의미이다
함원전(含元殿) 현판
양의문(兩儀門)
강녕전에서 교태전으로 드는 문이다
양의문(兩儀門) 현판
교태전(交泰殿)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교태란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명칭은 주역에서 따온 것으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방에 함께 합방하였다
그 이유는 오른쪽은 양 · 즉 임금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태전(交泰殿) 현판
원길헌(元吉軒)
교태전(交泰殿)의 동쪽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교태전과 이어져 지어진 아주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원길헌은 고종 때 교태전이 중건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다
만세문(萬歲門)
자경전의 남쪽 문으로 정문에 해당한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세웠다
만세문(萬歲門) 현판
만세(萬歲)란 만년 · 곧 긴 시간을 뜻한다
이곳에 거처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자경전(慈慶殿) / 보물 제809호
대원군이 고종을 양자로 삼은 신정왕후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1867년(고종 4) 자미당 터에 지은 건물로 대비는 이곳에서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행했다
준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가 발생했지만 1888년(고종 25)에 중건돼 경복궁의 침전 중 유일하게 100년 이상을 버텼다
왕가의 최고 어른인 대비에게 헌상된 자경전은 교태전보다 구조가 복잡하고 위엄이 느껴진다
전각을 정면에서 봤을 때 오른쪽에 청연루(淸燕樓)라는 누마루와 별채인 협경당(協慶堂)이 붙어 있고
뒤편에는 온돌이 놓인 복안당(福安堂)이 연결돼 있다
자경전(慈慶殿) 현판
자경전 서수상(瑞獸像)
자경전 계단 옆에는 1860년대 제작된 서수(瑞獸)가 있다
청연루(淸讌樓) · 협경당(協慶堂)
자경전 동쪽 정면으로, 정면 1칸 · 측면 2칸의 청연루(淸讌樓)가 건축되었고 연이어 정면 6칸 ·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건축되었다
청연루(淸讌樓) 현판
협경당(協慶堂) 현판
자경전(慈慶殿)
자경전 문
향원정(香遠亭)
경복궁 후원 향원지 가운데 둥근 섬에 있는 육모지붕의 이층 정자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깃불이 켜진 곳이 향원정 일대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 지 7년만인 1887년으로 일본이나 중국보다 2년이 빨랐다
경복궁 중건을 마친 뒤 건청궁을 지으면서 새롭게 만든 왕실 전용 휴식 공간이다
경회루와 함께 경복궁의 여러 정원과 후원 가운데에 가장 주목받는 장소다
향원정(香遠亭)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퍼진다」는 뜻이다
향원정은 연못과 건물이 네모 반듯한 경회루와는 반대로 부드러운 곡선이 조경의 핵심이다
그래서 분위기가 자못 여성스럽고 아담하다
건청궁(乾淸宮)
구 한말 서구열강의 세력다툼 속에 어지럽게 돌아가는 정세를 새로운 각오로 돌파하겠다는 고종의 의지가 어려 있다
그러나 고종은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참극을 겪은 뒤 경복궁을 떠났다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궁궐이 되었다
*
왕의 처소인 장안당 · 왕비의 처소인 곤령합 · 별채인 복수당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건청궁(乾淸宮) 현판
함광문(含光門)
곤녕합(坤寧閤)의 남쪽 행각문이다
함광(含光)은 빛을 머금은 문이라는 뜻이다
옥호루(玉壺樓)
일본인들은 장안당과 곤령합 사이 뜰로 황후를 끌고와 시해했으며
황후의 시신을 곤령합의 일부인 동쪽 건물 옥호루의 방 안으로 잠시 옮겨 놓았다가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 남쪽에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기록돼 있다
옥호루(玉壺樓) 현판
곤녕합(坤寧閤) 현판
고종과 명성황후는 1885년부터 10년 동안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해로의 꿈은 1895년 일어난 을미사변으로 일순간에 날아갔다
그해 10월 일제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성황후를 곤녕합에서 무참히 시해했다
신변의 위협을 절감한 고종은 다음 해 2월 건청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주인이 없어진 건청궁은 1909년 헐렸고, 한 세기가 지난 2007년 복원됐다
사시향루(四時香樓)
곤녕합 남루(南樓)의 동쪽에 있다
언제나 꽃향기가 끊이지 않는 누각이다
녹금당(綠琴堂)
곤녕합의 뒷쪽인 북쪽에 있는 건물이 바로 복수당이고 그 서쪽의 행각이 녹금당이다
자선당(資善堂) 기단과 주춧돌
자선당은 왕세자 및 세자비의 거처로서, 자선은 어진 성품을 기린다는 뜻이다
자선당은 세종 9년(1427) 근정전 동쪽에 건립된 이후, 여러차례 화재와 소실로 중건을 거듭하다 고종 25년(1888)에 중건되었다
조선의 국권이 상실된 이후 1914년에 일본은 자선당을 철거하여 일본으로 옮겨갔다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1916년에 자선당을 동경에 있는 자신의 자택으로 옮겨 조선관(朝鮮館)이라는 현판을 달고 사설미술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이것을 1993년 당시 문화재 전문의원 김정동 목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가 발견하여 1995년 국내로 들여왔으나
구조 안전상의 문제로 동궁 권역인 자선당 복원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재사용하지 못하고 지금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청휘문(淸輝門)
건청궁의 동쪽에서 곤녕합으로 드나드는 문이며 청휘(淸輝)는 맑은 달빛이라는 뜻이다
복수당(福綏堂)
건청궁은 왕의 처소인 장안당 · 왕비의 처소인 곤령합 · 별채인 복수당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복수당(福綏堂) 현판
관문각지(觀文閣址)
고종 10년(1873)에 건립된 관문각 터다
건청궁 내 장안당 뒤쪽에 위치한 관문각은 당초에 관문당으로 불렸으나 고종 12년(1875)에 어진을 봉안하고 관문각으로 고쳤다
관문각(觀文閣) 사진
고종 28년(1891), 러시아 건축가 세레친 사바틴과 친군영이 공사를 맡아 2층(일부 3층)의 서양식 건물로 개축되었다
최초의 양관으로 불리기도 한 이 건물은 국왕의 서재 겸 집무실인 집옥채와 대조를 이루었다
집옥채와 관문각 사이에는 서양식 기계추 시계탑도 세워졌다
사바틴이 관문각에 기거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여 고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관문각이 헐린 시기는 광무 5년(1901) 이후로 보인다
장안당(長安堂)
건청궁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 안채(곤녕합) · 부속건물(복수당) · 행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장안당(長安堂) 현판
건청궁이 건립된 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으며
1885년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때까지 10여 년간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다
장안당(長安堂) 내부
왕의 처소로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
장안당 건물 서편에 남북 방향으로 정화당과 추수부용루가 붙어 있는 형태다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 현판
추수부용(秋水芙蓉)이란 가을 물속의 연꽃이란 의미이다
팔우정(八隅亭) · 집옥재(集玉齋) · 협길당(協吉堂)
경복궁 후원격인 향원정 연못 북쪽편에는 중국풍의 건물인 집옥재 · 협길당 · 팔우정이 자리잡고 있다
태원전 일원 건숙문(建肅門)
왕과 왕비가 죽으면 빈전에 관을 모시고 교외에 마련된 산릉에 시신과 관을 묻은 후에는
혼전에 신주를 모셔 정해진 장례 기간을 치룬 후에 종묘로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된다
태원전은 경복궁의 빈전으로 문경전은 혼전으로 건립되었다
주변에 공묵재 · 영사재 등 상례용 건물들도 들어서 일곽을 이루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철거를 겪고 한때 청와대 경호부대가 주둔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2006년 이 일원의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태원전 일원 정문이다
경안문(景安門)
경복궁의 빈전인 태원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태원전(泰元殿) 복도각
경안문(景安門) 현판
경안(景安)은 「크게 평안하다」는 뜻이다
태원전(泰元殿) 현판
숙문당(肅聞堂)
태원전 뒤편 서북방에 위치한 전각으로 승하한 임금의 말을 새로 즉위한 임금이 듣는다는 곳이다
1888년(고종 5)에 태원전이 건립될 때 같이 지어졌으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것을 2005년에 복원하였다
숙문(肅聞)은 엄숙하게 듣는다는 의미다
광림문(廣臨門)
신무문에서 유형문으로 가기 전 동쪽으로 난 문이다
광림문(廣臨門) 현판
광림(廣臨)’은 「널리 내려다 봄」을 뜻한다
현재의 현판은 2005년 태원전 복원 공사 때 만들어졌다
일중문(日中門)
태원전 권역의 남동쪽 외곽에 위치해 있으며 장고(醬庫)와 경회루로 연결되는 문이다
홍경문(弘景門)
일주문에서 보강문을 거쳐 공묵재로 연결되는 문이다
홍경(弘景)이란 큰 광명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묵재(恭默齋)
공묵재(恭默齋)
태원전 재실이다
영사재 옆 행각
우물
문경전 터(文慶殿址)
문경전은 고종 초 경복궁을 중건할 때 태원전 · 회안전과 함께 흉례에 쓰기 위해 지었다
1890년에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신주를 모신 혼전으로 쓰였다
1896년에 경운궁을 지으면서 옮겨 갔다
수정전(修政殿) / 보물 제1760호
집현전은 세종이 궁궐 안에 설치한 인재 양성과 학문 연구의 기관이다
집현전 이외에도 왕의 집무공간 가까운 곳에는 업무의 신속한 처리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관청들이 있었다
궐 안에 들어왔다 하여 궐내각사라 불린 여러 관청 가운데 현재는 수정전이 남아 있다
수정전이 들어서기 전 그 자리에 있던 전각이 세종 때 한글 창제의 산실이 되었던 집현전이다
집현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 고종 때 재건되었다
하향정(荷香亭)
경회루 연지 북쪽에 있는 정자로 1959년에 지어졌다
하향정은 일반 정자에서는 보기 드문 육각형 형태이며 규모는 작지만 건축 기법이 섬세하고 익공 형식의 조선 후기 궁궐 건축 양식을 따랐다
경회루(慶會樓)
연못 안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은 큰 누각으로 주역 사상에 바탕을 둔 우주의 원리를 건축에 담고 있다
왕이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열 때 이용하였다
경회루(慶會樓)
활쏘기를 좋아한 세조는 경회루에서 연못 너머에 과녁을 설치한 후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연못에 하나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 쏘았다고 한다
어린 단종이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에게 눈물로 옥새를 내어준 곳이기도 하다
경회루(慶會樓)
경회루(慶會樓)
이견문(利見門) 앞에 어도(御道)가 조성되어 있다
1868년(고종 5)에 만들었다
돌난간 서수
자시문(資始門)
자시(資始)는 「만물이 건원(乾元)에 의뢰하여 시작한다」는 뜻이다
만물의 생성이 건원에 의뢰하여 시작함을 말한 것이다
불가사리
몸에 털이 있고 코가 길어 코끼리와 흡사하다
풍기대(風旗臺)
풍기대는 대 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관측기구이다
18세기 유물로 추정하며, 탁자 모양의 돌 위에 긴 팔각기둥을 세우고 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유화문(維和門)
경복궁 서남쪽에 있는 궐내각사로 가는 정문이다
흥례문 일곽은 정전 근정전 영역과 바로 붙어있었기 때문에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 반포 등 여러 중요한 행사들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궐내각사에서 근무하던 관리들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유화문이 바로 그 역할을 했다
유화문(維和門) 현판
용성문(用成門)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있는 서문이다
육조거리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조의 육조 관아가 배치되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광화문 앞에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