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1박 2일 걷기 첫째 날로 만복사지 · 관왕묘 · 광한루원 등을 둘러보았다
남원역
구 남원역은 본래 남원성 북문과 만인의총이 있었던 곳인데
정유재란의 남원 전투 당시 조선군이 최후의 항전을 한 곳이 남원성 북문이며
만인의총은 이 때 항전하다 전사한 조선군과 남원 주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무덤이다
비록 남원성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남원성 전투에서의 결사항전으로 일본군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이 있기에 전라선 남원역을 이곳 남원성 북문과 만인의총 자리에 설치한 것이
일본의 역사적인 보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역을 이설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거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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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이다
칠승리길
칠승마을회관
정재라는 높은 고개를 맞대고 세 마을이 자리를 잡았으니
한우물 방죽 옆 마을을 가운데로 교룡산 아랫마을인 웃정재와 뒤에 생겼다는 이곳 새정재를 말한다
이중 우리마을은 반달형세의 땅 모양이 마치 어미개가 7마리의 새끼 강아지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을 띠고 있어
일곱 꼭지자리가 정승을 낳을 명당터 지혈이라 하여 칠승마을로 이름하여 내려오고 있다
우리마을과 가운데 정재 사이에는 입적한 만복사 승려들을 장사지냈다 하여 증산골로 불려지고 있는데
이 일대는 농토가 비옥하고 소채류가 잘 되어 머슴살던 사람도 부자가 되어 나갈 만큼 흉년을 몰랐다고 한다
칠승리길에서 만복사지로 가는 길이다
남원2차오투그란데디아트아파트
교동산둘레길 · 만복사지 방향안내판
만복사저포기 벽화마을이다
남원 양사재(南原 養士齋) · 대방향약소(帶方鄕約所)
향교의 교육기능이 없어지자 양사재라 이름하여 과거공부 시키는 곳이 생겨났다
1642년에 세워진 양사재는 매년 봄 · 가을 절하는 예절(상읍례 相揖禮) · 글 읽는 예절(독법례 讀法禮)
술 마시는 예절(향음주례 鄕飮酒禮)를 시행하고 백일장을 장려하였으며
과거의 예습과 유학을 연구하는 선비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향약과 미풍약속을 지키는데 큰 힘을 썼다
과거제도가 없어지자 양사재는 「대방향약소(帶方響約所)」라 이름하였다
양사재(養士齋) 현판
현감김후계진흥학비(縣監金侯啓鎭興學碑) · 부사민후종열흥학비(府使閔侯種烈興學碑)
양사재중수기념비 2기가 양사재 마당 왼쪽에 있다
남원 만복사지(南原 萬福寺址)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쪽과 북쪽에 법당을 둔 동탑서전(東塔西殿)의 가람배치였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동 · 서 · 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
1991년 3월 3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만복사지 석인상(萬福寺址石人像)
본래 만복사지 당간지주에서 남쪽으로 4m 떨어진 곳에 2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도로변에 노출되어 있어 사고 위험이 높은 1기의 석인상을 이곳으로 옮겼다
석인상의 전체 높이는 550cm이며, 머리 위에서 다리 끝까지의 길이는 370cm 내외이다
만복사지 석조대좌(萬福寺址 石造臺座) / 보물 제31호
불상을 올려놓았던 육각형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眼象)을 새기고 그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중간부는 아래쪽보다 너비가 줄어들었는데 윗부분은 다시 넓어지며, 그 옆면 역시 연꽃으로 장식하였던 듯하다
위쪽 바닥 중앙에는 불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파놓은 사방 30cm 가량의 네모난 구멍이 있다
이 석좌는 높이 1.4m 정도인 하나의 돌에 정체를 조각했는데, 육각형 모양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만복사지 오층석탑(萬福寺址 五層石塔)
고려 초기에 세운 것으로 높은 받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윗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현재 남아 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은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첫 번째 층이 유달리 높다
각층 몸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마다 귀퉁이 아래를 약간 치켜올렸다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고려 초기에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바위에 부처의 서있는 모습을 조각한 작품이다
부처의 바깥 쪽에는 몸에서 발하는 빛을 묘사한 광배(光背)를 조각했는데, 위쪽 일부가 없어졌다
받침으로는 팔각형의 납작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으로 장식한 둥근 돌을 얹었다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부처의 바깥 쪽에는 몸에서 발하는 빛을 묘사한 광배(光背)를 조각했는데, 위쪽 일부가 없어졌다
석등대석(石燈臺石)
목탑지 중앙에서 12.1m 남쪽지점 즉 중문지와 목탑지 가운데 지점에 위치한다
1개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동서 120cm 남북 115cm 아래 부분을 정방향으로 만든 뒤
그 위에 일변 43cm 크기의 팔각을 돌출 구획하고 가변에 복엽연화문을 양각하였다
상면 가운데에는 당간지주를 끼우기 위해 직경 20cm의 구명을 파놓았다
연화문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만복사 창건 당시부터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복사지 당간지주(萬福寺址 幢竿支柱)
당(幢)은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문 앞에 내걸던 일종의 깃발로 거기에는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그림을 그렸다
당간지주는 이러한 깃발의 깃대를 받치기 위해 세운 버팀 기둥이다
기둥에는 위 · 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웠다
왕정교
광치천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전라북도 남원교육지원청
남문로에서 금하정1길로 가는 길이다
남원 관왕묘(南原關王廟) 탄보묘(誕報廟)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호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이다
남원 관왕묘는 원래 임진왜란 때 이곳에 주둔하였던 명나라 장군 리우띵(劉綎)이 자기들의 수호신으로 숭배하던 관운장을 모시기 위하여
선조 32년(1599)에 남원성 동문 밖에 세웠던 것을 숙종 때 성안으로 옮겼다가, 영조 17년(1741)에 현 위치로 옮겨 짓고, 매년 춘추로 제사지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의 영향을 받아 관운장(關雲長)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당시 명군이 왜군을 맞아 힘든 전투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관운장이 신비로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싸움에 승리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598년(선조 31) 서울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가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재는 서울 남관왕묘 · 동관왕묘 · 안동 관왕묘 · 성주 관왕묘 · 남원 관왕묘 · 강진 관왕묘 총 6곳이 남아 있다
이 관왕묘에는 흙으로 빚은 관운장 형상을 안치하였다
관우(關羽) 상
삼국지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중국인들에게는 관운장(關雲長)이라 불리며
중국인들에게 무(武)와 충(忠) · 의리와 재물의 화신으로 인지되며 오늘날까지도 신으로서 숭앙을 받는다
그들의 나라에서 섬기듯이 조선에서도 관우의 현령이 그들과 함께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관우의 사당을 지었다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일컬어진다
춘향골공설시장
본디 광한루 정문쪽에 있던 시장을 50여 년 전 광한루 확장공사 때 옮겨왔다
상설시장과 4일 · 9일 열리는 5일장으로 되어 있다
송동순대
대부분 이곳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집이다
피순대 만드는 사장님
고샘
고샘이란 우물을 이르는 용어이며 「고」는 물꼬의 준말로 논에 물을 대거나 빼기 위하여 논두렁에 만들어 놓은 좁은 물길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부터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남원부의 동쪽에 있는 우리 고을 주산(主山)인 백공산으로부터
수맥을 따라 돌을 쌓아 「고」를 쳐서 물길을 조성하고 여기에 샘을 만들어 부민들의 식수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연유가 되어 이곳을 고샘이라고 부르고 이 골목을 고샘골목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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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샘의 별칭이 「젖 타는 샘」이다
아이 낳은 여성이 젖이 잘 안나올 때, 병에 물을 담아 양 젖꼭지에 매달면 젖이 잘 나왔다고 한다
고샘골목
남원예촌
옛 선조의 지혜를 담은 명품 한옥으로 장인의 손길이 닿은 한옥호텔이다
천우암 · 천지보살 · 영통암
보살집이 많은 곳이다
종가
옛 명지각 여관 자리다
춘향이와 이도령
이몽룡과 성춘향이 열여섯 되던 해 광한루에서 만나 서로 사랑에 빠져드는 장면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사랑이 싹트는 연인의 모습을 통하여 사랑의 도시 남원을 상징하고자 하였다
광한루(廣寒樓) / 보물 재281호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광통루」라 불렀다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건물이 전설 속의 달나라 궁전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 하여 광한루(廣寒樓)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 정유재란(1597) 때 소실된 누각을 1626년에 복원하였다
광한루(廣寒樓) 현판
광한루는 평양 부벽루 · 밀양 영남루 ·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 중 하나로
이중에서 가장 긴 역사와 유일하게 인공적인 조경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광한루(廣寒樓)
누각 뒤에 설치된 계단식 현관 시설은 1877년 추씨 대목장이 뒤쪽으로 기우는 광한루를 지탱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2층 내부엔 김종직 · 정철 · 백광훈 등 조선시대 명사들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출입금지다
광한루(廣寒樓)
이렇게 아름다운 누각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과 같이 몸살을 겪게 되는데
1910년부터 18년간 누각 마루 위는 재판소로 · 누각 마루 밑은 감옥으로 사용되어 군데군데 아픈 흔적이 남아 있다
1층 돌기둥마다 칸막이를 위해 파낸 홈들이 남아 있다
오작교(烏鵲橋)
1461년 부사 장의국(張義國)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는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다
방장정(方丈亭)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섬 · 방장섬 · 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자라돌(鼇石)
한서(漢書)에 발해(渤海)에 유대오(有大鰲)하여 배부삼산(背負三山)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연상해서 호중(湖中)에 삼신산(三神山 영주 · 봉래 · 방장)을 선조 15년(1579) 송강 정철이 만든 뒤
이 고장에 재난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여기에 자라돌을 만들어 삼신산을 지켜보게 한 뒤부터 재난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월매집
고전문학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으로, 남원부사 이한림의 아들 이몽룡이 구경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뛰던 성춘향에 반하여 월매집을 찾아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내용에 따라 월매집이라 하였다
월매방
춘향관(春香館)
춘향전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 뮤지컬 · 오페라 · 창극을 소개하고
관련 소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광한루원내 건축물 영상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역대 춘향영정 / 이당 김은호 · 작가 미상
춘향과 문화예술
18세기 소녀, 21세기를 살다
목숨을 거는 춘향의 사랑은 어느 시대에난 통하는 가치이다
이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춘향은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를 통해 현대의 캐릭터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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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의 형상이 가장 다양하게 변주된 장르는 영화와 TV드라마이다
1923년에 춘향전이 처음 영화화 된 이래 남북한 합쳐 현재까지 총 15편이상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당 김은호 화백 화첩
황희 · 정철 · 정인지 · 신흠 · 신감 · 신익성
광한루와 관련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춘향전 / 춘향을 따라 사랑을 만나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때, 단오일에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은 광한루에서 그네 뛰는 춘향을 만난다
첫눈에 반해 혼약을 하지만 이 부사가 서울로 가는 바람에 서로 헤어지게 된다
새로 온 남원부사 변학도는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고 명령하지만 춘향은 거부하고 옥에 갇힌다
그 사이 이도령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오고 춘향이 옥에 갇혀 내일이면 죽게된다는 말을 들은 이도령은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어사출두를 하여 춘향을 구하고 오래도록 행복한 일생을 보낸다
신분 차별이 엄격했던 시대, 양반과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 격차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낸 춘향은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단오일에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은 광한루에서 그네 뛰는 춘향을 만난다
춘향전 영문판(천연색 삽화) / 1955년
춘향전(목판언문) / 조선시대
언문은 한문에 비해 한글을 속되게 부르는 말로 근세까지 사용되었다
춘향전 / 1929년 평산태정
춘향전 / 1970년 · 박동진 · 김소희
춘향영화제
춘향, 역할을 맡으면 톱스타된다??
팽나무
조선 명종 13년(1558)에 심어졌던 것으로 광한루원 조성 전 「남산관」 마당에 정원수로 있었던 것을 기증받은 것이다
팽나무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기운이 허한 곳을 보완해 주는 비보림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 · 마을을 수호하는 당산나무로 심어지고 보호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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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높이 18m · 가슴높이 둘레 3.7m · 수관 폭 20여 m
춘향사당(春香祠堂)
열녀 춘향의 굳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사당이다
사당의 대문을 단심문이라 하는데 이는 「임 향한 일편단심」이란 의미이다
사당의 중앙에는 「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이 있고 사당 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참배객이 찾고 있다
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 편액
사당 정문 위에는 자라가 등에 토끼를 태우고 물결을 헤치며 이동하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충성의 표상인 자라와 번뜩이는 기지로 용궁을 탈출한 지혜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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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안치된 춘향영정은 본래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리고 뒤이어 이당 김은호가 그린 작품을 기증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석군(碑石群)
과거 남원과 인연을 맺은 부사 · 관찰사 · 어사들의 사적비 및 선정비 등이다
예전에는 남원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소실과 훼손을 방지하고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비석의 제작 연대가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하여 남원의 역사와 비석 형식의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관서당 남성재(官書堂南城齋)
광한루 뒷편에 자리한 이 건물은 1875년에 세운 것으로, 관리들의 자제들이 수학하던 학당이다
원래 이름은 성남재(城南齋)였으나, 광복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남원에는 예전에 남성재 · 성동재 · 운봉관서당 등 세 개의 서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성재만 남아 있다
남원에 살고 있던 강화노씨 · 영천이씨 · 옥천조씨 세 집안에서 장학회를 조직하고 학생들을 후원하여 남성재가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남성재(南城齋) 편액
남성재 마당
호랑이 훈장님과 함께하는 관서당 체험
맹꽁이 서당을 그린 윤승운 작가가 관서당에 있는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예루원 · 화인당
고전만화 4인방과 함께하는 골목길 여행
월매안길이다
월매안길 벽화마을
고전만화 4인방과 함께하는 골목길 여행 아치
박수동 · 신문수 · 이두호 · 윤승운
요천
승월교(昇月橋)
남원 땅에 살던 옛 사람들은 요천에 나와 승월대에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소원이 이루어지길 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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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과 승월대를 이어주는 다리로 1997년 개통했다
덕음봉
춘향테마파크가 산기슭에 있다
승월대(昇月臺)
승월대는 '달이 흐르는 길'이라는 뜻으로 광한루원의 이상향을 반영하고 있는데
8월, 한가위 보름달이 뜨면 승월대에 아름다운 황금 달빛 기둥이 만들어지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승월대 달빛 기둥을 타고 내려와
광한루에 모여 새벽닭이 울 때까지 춤과 노래를 즐기다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전해 내려온다
쌍교동성당 방향
승사교 방향
안숙선 명창의 여정 · 조갑녀 살풀이명무관
남문로
향단로
명문제과
항상 줄서는 명문제과, 생크림슈보루와 꿀아몬드가 유명하다
늦은 시간에 방문이라 초코머핀과 밤빵만 남아 있었다
법원사거리에 있다
남원성 남문지 석인상(南原城 南門址 石人像)
남문사거리 신협 앞에 있다
삼익모텔
마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