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전주 한벽당

전주 한벽당(寒碧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전주천 뒤 승암산(僧岩山) 기슭 바위 절벽에 세워진 누각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인 월당(月塘) 최담(崔霮)이 낙향하여
태종 4년(1404년)에 지은 별장으로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월당루(月塘樓)라 했으나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한벽당으로 바뀌었다
한벽당은 남원의 광한루(廣寒樓) · 무주 한풍루(寒風樓)와 함께 호남삼한(湖南三寒)으로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

한벽당(寒碧堂) · 요월대(邀月臺)
전주천을 걸어 오모가리탕을 내는 식당들을 지나 한벽교 토끼굴을 지나면 한벽교 옆 바위 절벽에 겨우 버텨선 한벽당이 보인다
반토막 경관이지만, 전주천 상류 쪽 전망이 빼어나다. 요월대가 옆에 있다

 

 

벽당(寒碧堂) · 요월대(邀月臺)
바위 절벽 아래에서 봤다

 

 

한벽당 기적비(寒碧堂紀跡碑)
한벽교 토끼굴을 지나 한벽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왼쪽에 있다

 

 

한벽당
1986년에 요월대가 복원되기 전 한벽당만 있을때는 보통 한벽루라 불렀다
1683년(숙종 9)과 1733년(영조 9)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28년(순조 28)에 크게 중수한 것이다

 

 

한벽당
불규칙한 암반에 맞추어 높낮이가 다른 돌기둥으로 전면 기둥을 세우고
뒤쪽은 마루 밑까지 축대를 쌓아 누각을 조성하였다

 

 

한벽당(寒碧堂) 현판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의 친필이다

 

 

한벽당
정면 3칸 ·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바닥 전체가 마루 구조다
삼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마루 주위에 계자난간만 둘러져 있어 주변 경치를 조망하기에 좋다
천장 아래 벽에 한시 글판이 많이 걸려 있다

 

 

전주천과 마을 풍경
한벽당 풍광에 대해 옛 사람들은 옥처럼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치며 흩어지는 모습이라 하여 벽옥한류(碧玉寒流)라고 표현하였다
한벽당에서 바라보는 전주천의 풍경을 한벽청연(寒碧晴讌)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
한벽당에서 전주천을 따라 전주자연생태원으로 이어지는 데크형 산책로가 있다

 

 

누각 내부에도 한벽당(寒碧堂)이란 현판이 있다
이 현판에 의성김예산구세근서(義城金禮山九歲謹書)라는 낙관이 있다
김예산(金禮山)이 9세 때 썼다는 뜻이다
그 옆에 16세손 인홍(仁洪)의 글이 있다
*
이곳을 찾았던 시인 묵객들의 한시들도 많이 걸려 있다

 

 

한벽당 한시
오래 전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다는 말을 증명이나 하듯 많은 글들이 걸려 있다

 

 

특히 최담 선생 후손들이 제영(題詠)한 시가 많이 걸려 있다

 

 

근차한벽당음(謹次寒碧堂韻)

 

 

15세손 · 18세손의 글이다

 

 

16세손의 글이다

 

 

한벽당중수기 · 15세손 글

 

 

경차한벽당음(敬次寒碧堂韻) / 후손 병조(後孫 秉照)

 

 

요월대(邀月臺)
한벽당 동편에 1986년에 복원된 요월대(邀月臺)가 있다
한벽당 각자석이 오른쪽에 있다

 

 

요월대(邀月臺)
석전(石田) 황욱(黃旭)의 글씨다
요월대는 「달을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으로 한벽당 옆에 흡사 한벽당의 부속 건물처럼 서있다

 

 

최월당 한벽당(崔月塘 寒碧堂)
요월대 돌계단 우측 돌이다

 

 

요월대(邀月臺)
최월당 한벽당(崔月塘 寒碧堂) 바위 뒷면이다

 

 

한벽굴
요월대가 왼쪽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1년 일본은 철로를 놓는다는 명분 아래 한벽당을 허물려 했으나 
월당의 17세손인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의 반대로 한벽당 뒤로 한벽굴을 뚫어 철로를 개통했다

 

 

한벽굴 안내문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전주팔경의 하나였던 한벽당의 정기를 자르고 철길을 만들었다
한벽굴은 그때 만들어진 전라선 터널이다
1931년 10월 전주 ~ 남원간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당시 전라선 철길은 이리역에서 삼례 · 덕진을 거쳐
현재의 전주시청이 있던 전주역을 지나 오목대 - 이목대 - 한벽굴을 거쳐 중바위 서쪽 아래를 타고 색장동을 통과해서 남원을 향했다
한벽굴은 나들이 장소로 유명한 한벽당 그리고 전주천 빨래터와 더불어 전주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곳이다
많은 학생과 시민이 이곳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으나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전주천 생태문화안내도 · 시나브로 길 안내도
한벽굴에서 전주자연생태원 가는 길 산기슭에 있다

 

 

월당선생찬시비(月塘先生讚詩碑)
월당 최담 선생이 조정을 떠날 때 안평대군 · 정인지 · 김종서 등의 선비들이 선생을 치하한 것을 후손들이 비석으로 세웠다

 

 

월당 최담(月塘 崔霮 1346~1434) 유허비각
유허비각 뒷편으로 창암 암각서(蒼巖 岩刻書)가 있는 울타리가 있다

 

 

월당 최담(月塘 崔霮) 유허비
유명조선통정대부호조참의(有明國朝鮮通政大夫戶曹參議)
집현전직제학월당최공유허비(集賢殿直提學月塘崔霮遺墟碑)
비문은 1828년 송치규가 짓고 앞면을 쓰고, 후손 최설이 뒷면을 썼다
*
한벽당 안내문에는 최담선생이 조선의 건국을 도운 공신이라 있으나
유허비를 보면 "고려 말에 참관을 잠시 하신 적이 있으나 전사년 문과 급제 후 노모를 모시러 낙향하였다가
조선 건국 후 천거에 의해 다시 벼슬생활을 하다 낙향하셨다"고 적혀있다

 

 

창암 암각서(蒼巖岩刻書)
월당 최담(月塘 崔霮)의 유허비 뒷편 바위에는
조선 후기 서예가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여러 개 남아있다
창암은 조선 후기 서예가로 전주 자만동(지금의 교동)에서 태여났다
친구 사귐이 늦고, 학문이 늦고, 후손이 늦다고 30대 이후에 스스로 삼만(三晩)으로 개명을 했다고 한다
창암의 필력은 당시 중국에 알려져 서예를 배우기 위해 전주까지 온 사람이 많았고
제주도로 유배가던 추사 김정희가 굳이 전주에 들러 창암을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창암 이삼만은 눌인 조광진 ·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명필」이다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주 전동성당  (0) 2021.11.07
전주향교  (0) 2021.11.07
전주한옥마을 1  (0) 2021.11.06
전주 자만벽화마을  (0) 2021.11.06
전주전통술박물관  (0) 202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