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둘레길은 「단절된 녹지축을 살린다」는 취지로 한남정맥 줄기인 계양산을 시작으로
천마산 · 원적산 · 함봉산 · 만월산 · 만수산 · 관모산 · 문학산 · 연경산 · 노적봉 ·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S녹지축을 연결하는 코스다
일상에서 자연을 벗 삼아 여가생활을 하고 더불어 우리지역의 자연생태환경과 문화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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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코스는 인천역을 시점으로 대한제분 · 북성포구 · 만석부두 · 화수부두를 거쳐 동인천역까지
인천 동구의 부두를 걷는 길이 8.6km · 소요시간 2시간 20분의 길이다
인천역
물류로 인해 인천항과 연결되어 있으며
인천항은 일제가 여주 이천 지역의 쌀과 소래 남동 등지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반출하기 위해 1937년부터 수인선을 운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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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이다
중화가 패루(中華街 牌樓)
패루는 마을 입구나 대로를 가로질러 세운 탑 모양의 중국식 전통 대문을 일컫는다
중국 웨이하이시가 기증한 세 개의 패루 중 하나다
인천역 앞에 있는 제1패루다
러시아영사관 · 해무청사 터
러시아는 경성 한국주재영사관 내에 부영사관을 병설하고 인천 · 평양 · 진남포 등을 관할케 하고 있었는데
1902년 부영사관을 갑자기 인천에 이전 설치했다
제물포항을 일본이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자국의 병참기지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1974년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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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김중업에 의해 1957년에 세워진 해무청사는 1903년경에 설립된 러시아 영사관 건물과 나란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1992년경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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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가림막 있는 곳까지가 뭍이었고, 그 앞은 바다였다
인천항 기관차
철도관계자 여럿이 나와 차를 세우고 정리하더니 인천항과 인천역을 다니는 열차가 지난다
월미로
월미바다열차가 지나는 월미로 왼쪽은 바다였다
인천항 제8부두 출입문
소금 · 원당 등을 취급하는 청정잡화부두다
새우젓골목
인천 앞바다에서 잡은 새우를 소금에 절여 보관하던 창고와 가게들이 있었던 곳이다
골목에는 건어물가게도 있었으나 부두가 사라지면서 새우젓도 함께 떠나버리고
빈 창고와 가게는 인근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이 들어와 쪽방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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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분 앞이다
새우젓골목 · 동일아파트
새우젓골목 옆에는 인근 섬과 주안염전에서 들어온 소금이 있었다
소금은 가마니나 포대에 포장돼 전국 각지로 실려 나갔다
소금을 부리던 그 앞에 부두를 사람들은 한염부두라고 불렀다
소금공장이 떠나고 그 자리에 동일아파트가 들어섰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1951. 2. 10 ~ 2. 11, 대한민국 해군 · 해병대 단독으로 감행한 제2차 인천상륙작전 승리를 현양하기 위해 상륙지점인 현 위치에 해군이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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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적색해안)과 맥아더 길 빗돌 옆에 있다
북성포구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안내석 뒷쪽이다
선창산업
많은 원목들이 쌓여있다
선창산업 · 대성목재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수산물가게
예전 부두 파시가 이렇게 바뀌었다
북성부두(일명 똥마당)
부두 옆까지 바다를 메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낚시꾼이 보인다
북성포구 강화 볼음도회집
예전 바다였던 이곳은 이제 뭍이다
여우네 횟집
횟집 반은 문을 닫은 듯하다
북성포구 여우네횟집
만석초등학교 17회 동창회 간판이 있다
골목 꺾이는 지점에서 봤다
북성포구 입구
골목 꺾이는 지점에서 봤다
북성포구 입구 금바다수산
KBS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에 출연한 집이다
만석동 굴 직판장 1동
만석3차아파트를 지나 큰 길로 나오면 만석동 고가 앞에 있다
예전 만석부두 굴막이 새롭게 단장했다
만석동 굴 직판장 2동
굴까기 공동작업장 1 · 2동은 인천국제공항공사의 후원 · 사회복지공동모금회 · 동구청의 협력사업으로 조성되었다
또순네 바지락칼국수
칼국수와 콩국수 등을 파는 음식점이다
동일방직(주) 정헌 서정익선생 상
만석동 매립지에 들어선 동양방적(현 동일방직)은 1934년 10월 1일 종업원 3천 명에 직조기 1,292대로 조업을 시작했다
일설에 의하면 영화배우 도금봉(본명 정금옥)도 이 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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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유신 말기 여공들이 똥물테러를 당해 세간에 오르내리던 동일방직이다
정헌 서정익선생 상
일본에 본사를 두었던 동양방적은 경성 영등포와 인천 만석동에 공장을 두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다가 1948년 동양방적공사로 바뀌었다
이때 공장장 서정익이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고 이승만 정권의 귀속된 적산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
1955년 이사장 서정익이 회사를 인수해 동양방직(주)를 설립했고 1966년에는 회사명을 동일방직(주)로 변경했다
동일방직 의무실
1955년에 신축된 건물로 한때 강당 · 사내 직업훈련원 · 부속의무실 등으로 사용됐다
제물량로 안내판
원도심 갯골따라 생긴 자연포구 / 북성포구 · 만석부두 · 화수부두
우리나라 개항이 시작된 포구 / 만석부두
병인양요 ·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역 / 작약도
우리나라 최초 해수욕장 / 만석부두의 묘도해수욕장
우리나라 최초의 자전거 챔피온 엄복동이 경기한 지역 / 만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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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에 있는 글이다
만석동 행복복지센터
화수아파트
화평 운교(雲橋)
경인철도가 개통되던 즈음에 7m 정도의 높이로 설치됐다
그때는 나무다리라 썩지 말라고 검은 염료를 발랐는데 일본인들은 흔히 「흑교」라 불렀다
해마다 가을이면 인천여상에 있던 신사에서 출발한 일본인 축제행렬이 이곳을 지나갔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구경꾼들이 구름다리 위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다
화평동 · 화수동이 운교를 좌우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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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밑으로 전철이 지난다
황인의원
간판에 'Since 1958'이 붙어있다
화평철교에서 화평동냉면거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화평동 냉면거리
화수동은 공장지대였고, 노동자와 대건고 학생 등 주머니는 가볍고 배고픈 사람들이 많았기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냉면을 생각한 끝에 시중에 파는 냉면사리로 만든 세수대야 냉면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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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복복선 공사로 헐리기 전 오른쪽 전신주 옆에서 1976년부터 「아저씨 냉면」이 냉면집을 시작했다
아저씨 냉면
화평동 냉면의 원조다
인천극장 (현 화수할인마트)
1955년 3월 1일 이민 씨와 김태훈 씨가 연극 전문극장으로 개관했다. 이듬해인 1956년 4월 24일 화재로 전소하였다
1960년대 시민극장에서 인천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해오다 2001년 9월 문을 닫었다
주로 동시상영을 했던 인천 삼류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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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둘레길 코스는 아니지만 가깝기에 들렸다
대한성냥공장 (현 화수자유시장)
대한성냥공장이 이전한 후 40여 년 전부터 시장이 형성되었다
화수라는 이름은 붙었지만 옛 인천극장 바로 앞이라 화평동 생활권 시장이다
운석 장면(雲石 張勉) 박사 생가 터(현 PC빌딩)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부통령을 지낸 장면 박사가 인천에서 태여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낸 생가 터다
민들레국수집
서영남씨는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기 위해 25년 동안 입었던 수사복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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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 ·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 매일 400~500여 명 분의 식사를 대접하는 곳이다
화도교회
우리나라 대중욕탕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24년 평양에서다. 부(府)에서 직접 운영하였으며 관리인을 따로 임명하였다
인천에서는 신화수리(화수동)에 148.8㎥의 규모로 부립 공중욕탕(부영탕)이 설립되었다
그 후 욕탕이 폐쇄되고 그 자리에 화도교회 선교원이 들어섰다
화도고개
100여 년 전 화도진이 소나무 숲으로 뒤덮이고 바닷물이 진지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올 때
화도고개는 화도진에서 제물포(현 도심지)로 통하는 한 줄기의 오솔길이었다
화도진(花島鎭)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화도진도」를 토대로 복원했다
복원공사를 할 당시 이 터에는 피난민과 도시빈민의 허름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화도진 동헌(花島鎭 東軒)
고종 19년(1882) 5월 22일, 이곳에서 고종의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의 전권대신 슈펠트 제독 사이에 「한 · 미 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한국이 서구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구미 여러 나라에 대한 문호개방의 효시가 되었다
그 당시 바다에 떠 있던 미국 「스와타라함」에서는 21발의 축포를 쏘았다 한다
최근 조약 체결 장소가 이곳이 아니라 자유공원 석정루 아래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화도진(花島鎭) 빗돌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시행된 화도진 복원사업 중
공사 현장에서 출토되어 현 위치에 세운 것으로 화도진영 당시(1878~1879)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만석교회
괭이부리마을
동구 만석동 9번지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개항장 인천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부두와 시장 · 철도역이 있던 만석동 · 인현동 · 북성동 지역에 객지에서 온 사람들이 빈터에 집을 세워 정착했다
김중미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된 곳이다
괭이부리마을 굴막공동작업장
낮은 지붕의 집들이 줄지어 있다
괭이부리마을
가림막은 했으나 높은 곳은 그대로 보인다
화도진로 198번길
괭이부리마을에서 만석부두로 가는 길로 낮은 2층집들이 줄지어 있다
원괭이마을 안내판
횡단보도를 건너면 원괭이마을 벽화가 있다
성복낚시
만석부두로 들어가다 쌍용공장과 만석낚시점 사이로 들어가면 작은 조선소가 있다
만석부두 옆 작은 조선소
선박을 만드는 중소 규모 조선소들이 있고 그 옆으로는 고장난 배를 수리하는 「선박병원」이 있다
만석부두 굴막
예전 만석동 아낙들이 섬에 나가 굴을 캐와서 껍질을 까던 굴막이다
이젠 더 이상 작업하지 않고 대부분 만석동 고가 밑 굴막으로 이주했다
만석부두 오른쪽 벽에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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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8 사진)
만석부두 상점
라면 · 토스트 · 커피 등을 파는 가게다
만석부두
대부분의 부부가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해양경찰 만석출장소
조선시대 때는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세곡선들이 모여들어 서울로 향하던 곡물을 만석이나 쌓아놓았던 곳이라 해서 만석이라는 이름 붙었다
구한말에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화도진으로 가려는 미국의 슈펠트제독이 내렸다
출항신고를 관리하는 만석출장소가 왼쪽에 있다
만석부두
1900년대 매립이 시작되면서 부두가 형성되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작약도 · 영종도를 오가는 여객선의 선착장으로
본선화물을 실어 나르는 작은 화물선들의 하역 장소로, 인천 연근해 어업의 중심지로
사람이 몰리고 생선이 활발하게 거래되던 중요한 부두중의 한 곳이었어나 지금은 연안 개발에 밀려 어려움을 겪고있다
영종도 하늘도시 · 작약도
작약도 정상에 무인등대인 「무치섬등대」가 있다
계양산
원괭이마을 특화거리
과거 부두노동자 집단숙소로 한국전쟁 피란민들 · 뱃사람 · 부두와 연탄 야적장 부근에서 일하던 짐꾼들이
이 곳에 터를 잡고 새로 집을 짓거나 사택(일본식 건물)에 들어와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의 만석동 쪽방촌은 자식에게 버림받은 노인 등 갖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 됐으며
영세민의 힘겨운 겨울나기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
역시 이곳도 새롭게 단장했다
생동감 프로젝트 안내판
「생기있는 동네만들기 감동프로젝트」의 줄임말로 생동감이라곤 찾기 힘든 오래된 골목 · 빛이 바래 낡고
이젠 젊은 사람 다 나가고 늙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만석동 원괭이부리마을 동네에 「생기와 감동」을 만들자는 취지로 추진됐다
*
명가순대집 벽이다
포토 포인트
벽화가 입체적으로 보인다
원괭이마을 특화거리
철길을 따라간다
괭이부리 카페
1층은 카페 · 2층은 지역의 역사를 담은 갤러리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사회공헌사업비 1억 5천만원의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마을카페는 지역주민의 자립적 운영을 위해 마을주민이 바리스타 교육을 이수하는 등 운영을 준비해왔다
*
들어가 보니 일하시는 분들이 모두 할머니들이다
원괭이마을역
철길 종점역이다
두산인프라코어
1937년 6월 4일 조선기계제작소(두산인프라코어 전신) 창립총회가 게최되었다
공장은 인천 만석정(현 화수동) 부지에 설립됐고, 본사는 서울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단위 기계공장이었으며, 근대 기계산업의 시작이었다
이천전기(현 인팡 물류창고) · 화수부두 안내판
일제강점기 1938년에 설립된 군수공장에서 광복 후 변압기 등을 만드는 이천전기로 재도약했다
1993년 삼성에 인수되었다가 1998년 12월 일진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되면서 일진중공업이 되었고 2002년 일진전기로 사명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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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팡물류창고다
화수부두 등대
화수부두 버스정류장 옆에 있다
화수부두
수산물직매장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화수부두
한때 인천 제2의 어항이었던 화수부두는 70년대 초 연안부두가 생기고 어시장이 들어서며 추억의 부두가 되었지만
70년대 만해도 옹진 · 강화 · 충청도 앞 바다는 물론 연평 · 백령도 근해에서 잡은 생선의 집하부두였다
60 ~ 70년대 연평도 조기잡이 배를 비롯해 강화도 · 충청도에서 생선을 가득 실은 배들이 드나들던 옛날의 화려했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화수부두 수산물직매장
화수부두에 정박하는 어선의 선주 32명이 직접 잡아 올린 해산물만 판다
철저하게 100% 자연산만 판매한다
서해호 매운탕전문점
「외길인생 35년 · 어부의 자존심」이라 써있다
남광닻
TV와 사진전 등에 여러 번 나온 곳이다
화수부두 등대
인팡물류창고를 끼고 나간다
화도진중학교
화도진로
예전 수문통이라 불린 갯골 수로가 있었다
이곳에서 동인천역 방향으로 간다
수문이발관
예전 수문통이었기에 상점 이름에 수문이 많다
수문통로
지금의 화평치안센터와 송현치안센터 사이 약 200m에 수문통이라 불린 갯골 수로가 있었다
횡단보도 좌 · 우측 화단에 「송현교」 엄지기둥이 있었는데 오늘 찾아보니 없다
송현교(松峴橋) 엄지기둥
예전 화평치안센터 사거리 양편에 있던 표지석이다. 예전에 다리가 있었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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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니 없기에 예전 사진을 올린다
(2018. 7. 8)
동인천역 광장
앞에 보이는 색색의 순대가게 건물 오른쪽으로 중앙시장 아치가 보인다
동인천역
1897년 3월 22일 경인철도 기공식이 우각현(일명 쇠뿔고개)에서 거행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도원역」이고
그 후 1899년 9월 18일 「축현역」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한 곳이 지금의 동인천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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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할 때는 청과물시장에 축현역이 생겼다
1926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역명이 상인천역, 다시 1955년 동인천역으로 개명했고 1957년에 역사를 새로 준공한 후
1989년 오랫동안 정들었던 역사를 허물고 민자 역사를 지으면서 인천백화점이 자리했다
인천백화점이 운영난에 문을 닫고 「엔조이쇼핑」이 다시 재기를 노렸으나 다시 문을 닫고 지금은 새로 리모델링 중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6.4km, 소요시간 6시간 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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