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王平) 이응호(李應鎬) 선생은 1908년 3월 15일 경북 영천 성내동에서 출생했다
아들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5세 때 모친을 잃고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
1924년 16세에 서울로 올라가 배재중학과 조선배우학교를 다녔다
식민지 대중문화운동에 돈독한 뜻을 두고 극단 「조선연극사」 소속으로 활동하며 전국을 순회공연하였다
왕평은 편월(片月) · 이호(李鎬) 등의 예명을 함께 쓰며, 1930년대 식민지 대중문화계에서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왕평의 주된 활동범위는 가요시 작사 · 연극 대본 집필 · 만담대본 창작과 출연 · 영화 설명 및 배우로서의 출연 등이다
전체 활동 가운데 왕평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분야는 단연 가요시 창작과 발표이다
그 중에는 한국인 대표적 노래로 자리잡은 「황성옛터 · 원명 황성의 적)」을 비롯하여 신민요 「조선팔경」 등이 있다
1940년 평안도 강계에서 악극단 공연 중 무대 위에서 연기 중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이후 부친이 살고 있던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 입구 산기슭에 안장되었다
남각산 수정사 일주문(南角山 水淨寺 一株門)
수정사로 가려면 이곳 왼쪽에 있는 도로로 올라가면 더 빠르지만 일주문을 거쳐 가는 숲길이 좋다
황성옛터 안내판
청송사람 왕평(본명 이응호)이 작사하고 전수림이 1928년 작곡한 노래로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를 찾아 받은 쓸쓸한 감회를 그린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이애리수가 불러 크게 히트해 삽시간에 전국에 퍼져 갔으며
그로 해서 조선총독부는 이의 유행을 방지하기 위해 금지시켰으나 계속 불렀으며 이후 고복수 · 남인수 등이 부르기도 하였다
수정사와 왕평의 묘로 가는 길이다
영천이공 왕평 응호 묘 입구 안내석
수정사와 왕평의 묘 갈림길이다
마른 내를 건너 왕평의 묘처럼 소박한 돌계단을 오른다
왕평 이응호 묘(王平 李應鎬 墓)
낮고 굽은 돌계단을 다 오르면 수정사 보살님 말씀처럼 작고 소박한 묘가 있다
숲으로 둘러쌓여 한낮이 되어야 햇살이 한 줌 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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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묘는 누구 묘인지?
왕평의 묘를 스님이신 부친이 손으로 흙을 한 줌씩 가져다 만들었다는 데
혹 부친의 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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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님께 알아볼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왕평 이응호 묘(王平 李應鎬 墓) 빗돌
낮고 작은 묘 때문일까 여늬 묘에서 느끼지 못했던 아릿함이 밀려 든다
왕평의 묘비 앞면이다
황성옛터 시인
근원 김양동 서(近園 金洋東 書)
왕평의 묘비 뒷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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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5, 25)